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성령이여 강림하사 (찬송가 190장) ● 나의 안에 거하라 (ccm)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진리 안에 거하자. ● 본문: 요한복음 14:16-17 1) 보혜사가 오셔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곁으로’ 은혜는 무엇인가? (영어성경의 번역을 중심으로) 2) 성령 하나님의 ‘곁으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성도가 견지해야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⓵ 본문 17절을 참고:
⓶ 요한복음 8:32 참고: |
3) 적용하기 ① 나는 진리이신 성령님 안에 거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 것인가? ② 나는 교회 안에서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가? 비본질을 추구하고 있는가? (시편 73편 아삽의 시 참고) ③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다음 세대 제자훈련과 필리핀 단기 선교를 위하여 (7/24-29) ● 피선교지들을 위하여 ●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의 건강과 치유를 위하여 (서정수, 최정희, 문혜경) ●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자녀들을 위하여 (명단:장종호, 이한빛, 김양진, 이유정) ●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들을 위하여 ●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6월 4일 성령강림주일 설교 제목: 진리 안에 거하자. 본문: 요한복음 14:16-17
오늘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은 우리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성령 해석이 아니라 균형 잡힌 성령 하나님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지키시기 위해 목요일 저녁 다락방에서 성찬을 나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새 계명을 제정하시는 소위 말하는 ‘다락방 강화’를 진행하신 뒤에 주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기사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내가 때가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회귀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갑자기 주군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적지 않게 혼돈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세속적인 계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혼돈스러워 하시는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는 주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가 주(主)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단히 중요한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본문이 아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세밀하게 살펴봅시다.
1) ‘곁으로’ 의 은혜를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본문 16절). 여기에 기록된 보혜사는 성령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보혜사’라고 번역한 성령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 영어성경의 여러 단어들을 집약해 보면 또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helper(도우미), advocator(옹호자), comforter(위로해 주는 사람), counselor(상담자) 등등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공통점은 옆에 있어주는 자들입니다. 성령님은 여러분과 제 곁에 있어 주시는 제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가 쓴 ‘기독교 변증’을 보면 그의 지성적 고찰이 보입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특정한 것을 믿으며, 이런 점에서 믿음에는 분명한 내용이 있다.”(p,200) 관계적 믿음이라는 이 단어를 주석하다보면, 일단의 종교에게서 보이는 공통적인 분모가 있는데 모든 종교에서 신자들은 믿는 대상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싶어 한다는 기본적인 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색다른 특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긴밀한 관계를 내가 맺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주군이신 하나님이 맺고 싶어 하신다는 독특함입니다. 맥그래스의 말로 다시 적용해 본다면 관계적 믿음을 갖기 원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기막힌 독특함이 기독교 교리의 정수입니다. 하나님께서 맺고 싶어 하시는 관계성이 helper(도우미), advocator(옹호자), comforter(위로자), counselor(상담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창세기 28:15절을 보시면 야곱이 형인 에서를 피해 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아주 먼 길을 택한 것입니다. 야곱이 가는 길은 외롭고 힘들고 지칠 수 있는 노정이었습니다. 이렇게 길을 가던 야곱이 하란의 한 지역에서 피곤하여 노숙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야곱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형의 축복권을 치사하게 빼앗아 도망가는 야곱이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그가 가는 길을 따라가시면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 라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분석할 수 있겠지만 그 야곱이 바로 나라면 그 때 나를 찾아오셔서 관계성을 회복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곁에 계셔주시는 은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은혜를 주시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그냥 은혜가 아니고 아주 값비싼 은혜입니다. ‘곁으로’의 은혜를 그래서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회퍼는 고통 곁에서 떠나지 않는, 고통 곁으로 다가가는 삶을 ‘값비싼 은혜’(expensive grace)라고 불렀다.”(김응교, ‘곁으로’,p,44.) 성령님은 내가 곤고할 때, 내가 죽게 되었을 때,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내 옆에서, 나와 함께, 내 곁에서 helper(도우미), advocator(옹호자), comforter(위로해 주는 사람), counselor(상담자)가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이 은혜가 내 은혜가 되는 세인 지체들이 되십시다. 두 번째는 이 ‘곁으로’ 은혜를 체휼하고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이 꼭 해야 하는 신앙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 진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본문 17절). 사도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대변합니다. 예수께서 대신 보내실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여기에 기록된 ‘진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알리데이아’는 아주 가끔 ‘본질’이라고도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대입한다면 성령님은 본질의 영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진리가 곧 본질이라는 것을 수용한다면 이렇게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 인에 거하는 것은 곧 본질 안에 거하는 것이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노래이자 시입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에 궁정 성가대의 대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절정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윗 시대의 궁정 성가대원들은 정말로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삽이 아무리 그런 신앙의 절정에 있었다 하더라도 나약한 인간이었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던 것으로 시편 73편은 보고합니다. 악인들의 형통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삽은 갈등 정도가 아니라 넘어질 뻔 했다고 고백합니다(시편 73:2-9). 악인들의 형통을 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삽이 이렇게 뿔나서 대들던 노를 사그라트리고 다시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는 고백이 시편 73: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악인의 형통함은 비진리(非眞理)의 테두리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 진리의 테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온 아삽은 악인들의 형통함이 부러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악인들의 형통함 때문에 넘어지고 미끄러질 일이 아님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반면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악인들에게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갈 때 가능했다는 아삽의 이 고백은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가는 것이 곧 진리 안에 들어서는 것이며, 본질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코 태생의 저명한 작가인 밀란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면 제 4의 주인공인 프란츠의 이런 독백이 있습니다.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담벼락을 제거하는 것이다.” (p,187) 프란츠의 이 독백을 오늘 설교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은 사적인 것 투성이의 비 본질로 막혀 있는 내 자아의 담을 허물고 오늘도 공개적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 본질이신 성령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매치하여 다시 선포하면 이런 말씀이 될 것입니다. “성령을 알지니 성령께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말은 본질적인 죄의 자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은혜 안에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는 복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학훈으로 삼는 대학에서 축제 때마다 상업주의가 판을 쳐서 캠퍼스를 세속적인 난장으로 만드는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연예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대학이 변질되고, 퀴어 축제의 온상이 되고, 신촌의 사거리는 음란과 술판의 천지가 되고,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가하다는 소설 속의 메시지처럼 바로 그런 무법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돌변하는 것을 수차례 목격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이 말씀은 방종으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은혜 안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본질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진리이시고 본질이신 성령 하나님은 나를 어떤 때는 앞에서, 또 어떤 때는 뒤에서 발 맞추시며 내 곁에서 나를 돕고, 응원하시고, 위로하시며, 상담해 주시는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강림주일을 보내며 진리이신 성령님 안에 거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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