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5.28 지역 셀 사역2024-04-23 16:2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을 때의 소회를 기억하여 나누어 보자.  

 
경배와 찬양 (WORSHOP)
●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찬송가 323장)
● 부르신 곳에서 (ccm)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부르신 그대로
● 본문: 고린도전서 7:17-24
1) 본문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 간에 피하고 싶었던 종교적인 행위들을 무엇이라고 진단했는가?
① 18-19절 참고:

② 21-22절 참고:  

2) 1번 항목을 진단하고 난 뒤에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권고하고 싶었던 것은?
*설교 주제를 중심으로 말해보자.
⓵ 19절을 읽자.
⓶ 22절을 읽자.  

3) 적용하기
① 부르심의 소명을 확인하자.
② 부르심의 소명을 희석(변질)시키는 일체의 것들을 고발해 보자.
③ 처음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다음 세대 제자훈련과 필리핀 단기 선교를 위하여 (7/24-29): 필리핀 정정이 안정되도록
● 5월을 잘 마무리하고 6월을 맞이할 수 있도록
● 피선교지들을 위하여
●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의 건강과 치유를 위하여 (서정수, 최정희, 문혜경, 이상순)
● 담임목사의 사역이 승리할 수 있도록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5월 28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32번째 강해)
제목: 부르신 그대로
본문: 고린도전서 7:17-24

  시각의 질적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앎과 삶의 합일과 합일하지 않음”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약삭빠른 내 삶이 아둔해지기로 결단하는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김기석 목사의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들음과 행함, 아는 것과 살아 내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어야 한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앎은, 특히 종교적 앎은 교만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p,101)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육비에 밑줄을 그어야 하는 교훈은 올바른 신앙생활의 척도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처음 마음으로 귀착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초심의 관점으로 다시 내 시각을 곧추 세우는 작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여러 차례 반복하여 언급한 문구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17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절)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22절 전반절) “부르심을 받은 자는”(22절 후반절)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24절) 이 구절들을 왜 바울이 반복하고 있을까요?
  1-16절까지의 테제는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과 이혼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갑자기 결혼과 이혼에 대한 연계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완전히 다른 기사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본문 구조를 클럽 샌드위치 구조라고 해석했습니다. 1-16절의 기사는 오늘 본문 텍스트인 17-24절을 건너뛰어 25-40절까지의 텍스트로 연결되는 구조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25-40절까지의 기사에서 바울은 아직은 미혼 여성들을 위한 권면과 이미 결혼한 여성과 과부들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연관이 되면 이해가 쉬운데 오늘 본문은 전혀 생뚱맞은 내용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두 가지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⓵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구조 (18-19절):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② 종과 자유인의 구조(21-22절):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먼저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구조를 분석해 보십시다.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수신자는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자들인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방의 땅입니다. 이 말은 이 지역에는 당연히 할례를 받은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더 많이 존재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다 보니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이 헤게모니를 갖고 고린도교회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고린도에 산재해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었을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고린도는 공중 목욕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기에 목욕탕 안에 들어가면 한 눈으로 이 사람이 유대인인지 아니면 비 유대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누군가가 유대인으로 공증되면 고린도교회 안에서 상대적인 박탈을 당하는 불이익 때문에 할례를 숨기려고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과는 정 반대의 현상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도리어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할례주의자들 즉 유대적인 성향이 아주 농후한 자들로 인하여 적지 않은 내분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구원의 완성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거짓 복음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흔들어 놓았던 것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거짓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은밀하게 할례 유용론에 빠져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반대입니다. 유대인들이 어려서 받은 할례를 숨기려는 분위기가 고린도교회 안에 팽배했다는 점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고린도 교회의 주류들에게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종과 자유자에 대한 의미 해석입니다. 종으로 번역된 ‘둘로스’는 노예입니다. 노예라는 신분은 인권을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는 노예제도가 인정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법적인 차원에서 볼 때 노예를 부리던 자들은 아무런 죄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예 된 자 입장에서는 고대이든 현대이든 노예의 신분은 벗어나고 싶은 그 자체일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고개를 이상한 바울의 지침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21절은 학자들 간의 첨예한 논쟁 구절입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이 구절이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원문 해석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개역 개정판에 앞에 전술한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사실은 두 가지의 번역이 원문으로 가능합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당신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하더라도 당신의 현재 상태를 더 잘 활용하십시오. (NRSV 번역), 두 번째의 경우는 “당신이 부르심을 입었을 때 노예의 상태였습니까? 그에 대하여 너무 괘념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만일 자유를 얻을 기회가 온다면 그것을 취하십시오.” (RSV, NIV, NEB 번역)
  전자도 해석이 가능하고, 후자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전자로 해석하면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하라는 메시지이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후자의 경우를 지지한다면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바울이 노예제를 지지하고 노예를 가지고 있는 기득권 계층의 부유한 자들을 옹호한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노예옹호론자였는가? 에 대한 답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바울이 후자의 경우처럼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지침으로 21절을 말했다면 바울은 급진적 종말의식의 관점을 염두 해 두었다는 포석입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바울 신학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재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노예 신분의 유지나 벗어남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해석입니다. 바울의 주된 관점은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의 재림을 통한 임박한 심판이 그에게는 더 큰 그림이었기에 노예라는 신분에서 그렇게 벗어나려고 하지 말라 권고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시면 그 때는 온전한 자유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차원을 해석할 때 앞에서 언급한 할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할례 받은 것을 숨기려는 것이나 아니면 할례를 받은 것에 대한 비본질적인 내용에 대하여 설왕설래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방점을 찍고 싶어 했던 가장 중요한 영적 교훈은 ★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의 그 초심의 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본문 19절).
  할례, 무할례를 가지고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본문 22절도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사람의 종이든, 아니면 종이 아닌 자유자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유자와 노예, 그리고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논하면서 그것의 헛헛함에 목매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반복적 문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르신 대로”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부르심을 받은 자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24절)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교훈은 주님이 부르셨을 때의 처음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첫 소명, 첫 사랑, 첫 마음으로의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토라(율법)를 배우고도 토라로 괴롭지 않은 자, 죄를 짓고도 자신을 용서하는 자, 어제 기도하였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 – 가장 나쁜 악당도 그 사람보다 낫다!” (P,208) 지난 주간 읽은 마틴 부버의 ‘열 계단’에서 벼락같이 받은 금언입니다. 이들이 가장 나쁜 악당보다 더 질 나쁜 자들인 이유는 초심을 잃은 습관적인 신앙의 변질 때문입니다. 나를 부르신 방법은 각자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르실 때의 첫 감격을 결코 상실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성도 된 자의 겸손함입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이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