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5.21 지역 셀 사역2024-04-23 16:2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가보았던 박물관 중에 기억에 남는 박물관 소개하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찬송가 383장)
● 오 신실하신 주 (찬송가 393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박물관에서나 볼 것 같은
● 본문: 고린도전서 7:1-16
1)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가르쳤던 대체적인 결혼관에 대하여 말해 보자.
① 5절:           
② 9절:
③ 10절:           
④ 15절:  

2) 15절에 관한 세부적인 이해를 해보자.
*고린도전서 6:11절, 11:20-22절과 연관하여 설명해 보자.
① 이혼에 관한 특별한 예외조항 – 6:11
② 불이익 감수 – 11:20-22  

3) 적용하기
① 이혼을 결심한 고린도교회 여성 신자들의 순결한 신앙을 나는 오늘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
② 라인홀드 니버의 갈파와 관련하여 박물관 신앙을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움으로 매도하는가?
③ 박물관 신앙의 장점을 나누어 보고 그런 신앙의 여정이 되도록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새로 뽑힌 대통령이 초심을 잃지 않고 낮은 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정치를 할 수 있도록
● 5월 교회 표어에 맞게 이타적인 교회로서의 실천적 삶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 제천 밀알 장애우 나눔 사역을 위하여(25일)
●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의 건강과 치유를 위하여
● 다음 세대들의 제자훈련과 필리핀 단기 선교를 위하여 (단기선교: 7월 24일-29일)
● 지역 셀이 영혼구원의 장소가 될 수 있도록
● 담임목사의 사역이 승리할 수 있도록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5월 21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31번째 강해)
제목: 박물관에서나 볼 것 같은, 본문: 고린도전서 7:1-16

  교회의 교회다움과 교회 본질의 사수는 물리적인 힘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속적인 힘에 기울게 될 때 교회는 이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정체성을 알아봅시다.
   
  주후 1세기 고린도교회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 해 볼 때 이방 그리스도 공동체의 결혼에 대한 지침들 중에 적어도 이 정도의 선은 지켜야 하는 룰이 존재했습니다. ① 부부는 기도하기 위한 시간 외에는 분방하지 말라. (5절) ② 정욕을 참지 못하거든 결혼하는 것이 독신으로 있는 것보다 낫다. (9절) ③ 이혼은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곤 하지 말라. (10절) ④ 그 한 가지 경우란 불신자와 결혼을 한 경우인데 결혼 후에도 믿지 않거든 갈라서라 (15절). 문자적으로 본문을 이해하면 이 정도로 간주하고 지나칠 수 있는 텍스트가 본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이미 살핀 대로 음행이 만연했던 공동체였습니다. 오늘의 시각으로 이해한다면 음행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주후 53-55년이라는 이 편지가 작성될 즈음의 고린도는 음행이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높은 윤리적 가치를 동반해야 하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도리어 전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살폈지만 정욕에 불타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일이 과부를 돌보는 일로 인정받을 정도로 인식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남편들이 이미 결혼한 아내와 분방을 하거나 심지어는 이혼을 밥 먹는 듯이 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고 심지어는 이혼이 남성들의 전유물로 악용되는 기막힌 현실이 고린도 지방의 상례였습니다. 이런 질 나쁜 일들이 고린도교회 안에도 팽배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상태를 알고 있었던 바울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성윤리 혹은 결혼 윤리에 대한 지침을 내리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2절). 일부일처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제시한 구절입니다. 그런 뒤에 바울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본문 3-4절).
  적어도 결혼을 한 기혼 남성과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부부 의무에 대하여 바울은 아주 선명한 어조로 못 박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부부 의무를 천명한 바울은 이것을 전제로 분방 금지를 선포한 것이 그 유명한 본문 5절입니다. 이렇게 결혼관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제시한 바울은 그만의 독특한 신학적 어조로 독신의 은사를 지지합니다. ‘정욕을 억제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전제로 제시한 것입니다(8-9절). 그런데 여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에 대한 입장을 제시한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결혼에 관한 본인의 신학적인 주장을 내놓습니다(11-16절).
  바울의 대 전제는 결혼한 남녀의 이혼을 금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은 예수께서 이미 천명하셨던 이혼 금지 대 명령(마가복음 10:1-7)을 받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혼 금지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에게 남녀 공히 동일한 지침이었습니다. 바울이 이혼을 금지한 전제는 같은 믿음으로 묶어진 부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편(偏)믿음의 부부에게도 적용되는 권고였다는 점입니다. 남편은 믿고, 아내는 믿지 않은 상태, 혹은 아내는 믿고 남편은 믿지 않은 상태에서의 불협화음이 있어도 이혼은 불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로 제시한 본문이 오늘 본문 마지막 16절입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요즈음의 언어로 말하면 “참고 살면서 불신자 아내, 불신자 남편을 구원하려고 노력해 보거라. 누가 아는가? 당신을 통해 믿지 않던 상대방이 믿게 될는지.”
  이 구절이 불신자 남편과 아내와 결혼한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구절로 오용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본문의 경우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라는 이미 성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공동체를 향한 추스름에 목적을 둔 메시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을 추적해 보면 부득불 이런 고린도교회의 비정상적인 일들이 다반사로 발생하는 비상 상황에 직면한 바울이 이혼 불가 방침을 선포하였지만 눈에 띠는 한 대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15절)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라서라는 말이 당황스럽습니다. 이 정도로 멈추지 않고 강력하게 쐐기를 박는 것 같은 마침표와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즉 이혼을 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병 주고 약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앞 절과 전혀 상반된 모순된 말을 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1세기 초기 교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인 김판임 교수는 자신의 고린도 주석서에서 6:11절의 말씀과 접목시키는 탁월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에 기록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김 교수는 이 구절에 기록된 ‘씻음(아폴루오)’, ‘거룩함(하기아조)’, ‘의롭다하심(디카이오오)’는 유대교의 정결 예식 형태에서 사용하던 단어들임을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단어들은 세례 예식에 참여한 자들에게 부여되던 상용어입니다. 본문 15절에 기록된 ‘믿지 않는 자’는 고린도전서 6:11절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를 받지 않은 자’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주후 1세기의 세례자는 지금의 세례자와 전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순교적인 믿음이 있다고 공동체가 인정한 경우에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 결혼 전에는 세례자들이 아닌 상태에서 결혼을 했는데 이후 세례를 받은 경우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 이후 ‘씻음(아폴루오)’, ‘거룩함(하기아조)’, ‘의롭다하심(디카이오오)’의 경험자가 되어 새로운 영적 삶을 살게 된 부부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 세례 대상자일 경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아내가 세례 대상자일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는 점입니다. 아내가 세례를 받은 경우, 고린도교회 성도 가정 공동체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 것은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요구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유를 김판임 교수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세례신학에 의해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가진 여자가 거룩하여진 몸 즉 성령을 받은 몸인데, 그렇지 못한 남편과의 성생활을 함으로서 다시 더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혼을 원하는 방향을 나아가는 상황에서 바울이 표한 지적이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P.84)
  주석을 통하여 얻는 이해는 바울이 여성의 영적인 인권을 수용했다는 점입니다. 아주 특별한 예이기는 하지만 바울은 여성의 관점에서 남편의 거룩해짐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여 여성의 이혼권리를 보장하라는 바울만의 독특한 관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석한 내용을 21세기의 현 상황에 맞추어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과유불급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측면의 신앙적 접근을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신앙적 순결성입니다.

  주후 1세기 고린도 지역은 남성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극단적인 예외로 인정했지만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였습니다. 고린도가 남성 중심적 구조 사회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모든 권리 구조가 남성 편의적으로 합법화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여성이 이혼을 할 경우 곧바로 들이닥치는 것이 생활고였습니다. 아무런 재산상의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혼한 여성은 잘못하면 굶어죽을 수도 있는 사회상이 고린도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성경적 내증 중에는 이 시대 이혼한 여성들의 아사(餓死)를 염려하는 근거로 추론되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린도전서 11:20-22절).
  고린도교회는 매일 저녁 만찬을 식탁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이 만찬은 애찬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마음껏 먹는 만찬이었습니다. 이혼한 여성들이 하루에 한 끼만을 먹더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평상적인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이곳에 빌붙어 음식을 축내고 배를 불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굶주리고 있는 여성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비겁하고 야비한 그들을 향하여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맹공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지 못한 남편과 부부생활을 하게 되면 나는 다시 더러운 자로 오염될 수 있어서 그러느니 아사의 고통이 엄습하는 아픔이 있겠지만 차라리 이혼하여 순결하게 살겠다는 고린도교회의 여성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지만 그런 박물관 신앙인, 벳세다에서 군중 속을 다니며 발품을 팔았던 안드레, 자유함의 방종보다 자아를 성찰하며 바닥을 적시는 신앙인, 그런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합리화된 종교의 도그마만을 인정하고 추구하려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은 오늘, 사해 바다 부근에서 등장하는 나약한 예수를 따르는 힘없는 그러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종자라고 놀림을 당하는 그런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보고 싶습니다. 박물관 신앙, 21세기에 촌스럽기 그지없는 시대착오적인 폐기물 신앙이라고 치부되지만 싸늘한 신 사사시대인 작금의 랜덤 시대에 박물관 신앙인들이 다시 움직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의미로 박물관 신앙이야 말로 우리들이 목적해야 할 순결한 신앙의 목적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