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5.07 지역 셀 사역2024-04-23 16:1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쓰기를 참 좋아하는 말, 하나씩 소개하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찬송가 442장)
●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신앙의 언어를 잘 파악 하십시다.
● 본문: 고린도전서 6:12-20
1) 고린도교회의 일탈된 성도들이 즐겨 쓰던 슬로건을 말해보고 그 뜻을 설명해 보자.
① 슬로건:

② 의미:  

2) 자유함을 빙자하여 방종으로 변질되었던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잘못 배운 내용과 바울이 바로 알려준 내용을 실례를 들어 말해보자.
① 13절 전반절의 잘못 배운 것:
② 13절 후반절의 잘못 배운 것:
③ 바울이 다시 바로 가르쳐 준 내용:  

3) 적용하기
① 바울이 알려준 신앙의 언어에 잘 적응하는 태도 첫 번째 내용을 말하고 내게 적용하자.
② 바울이 알려준 신앙의 언어에 잘 적응하는 태도 두 번째 내용을 말하고 내게 적용하자.
③ 1번과 2번을 적용한 뒤, 잘 실천할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이룰 수 있는 대통령이 선출되게 하옵소서.
●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주옵소서.
● 하나님 교회에 등록한 새 신자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 하게 하옵소서.
● 이단(신천지집단, 안상홍 집단, 신사도운동, 구원파 등등)들이 틈타지 못하는 강력한 복음의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 5월 가정의 달 사역을 위하여
● 담임목사의 사역에 기름부음이 있게 하옵소서.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7년 5월 7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30번째 강해)
제목: 신앙의 언어를 잘 파악하십시다.
본문: 고린도전서 6:12-20
  
    고린도교회는 그들만이 쓰고 있던 언어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인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자들이기에 오늘 본문 12절에서 고린도교회 내에 존재하던 음행의 죄를 범하던 자, 세상의 법정으로 문제를 이끌고나가 송사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인임을 만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언행의 동기는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음행의 죄를 지었던 한 아들의 일화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여자를 자기의 아들로 들이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담대함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를 자기의 여자로 들인 이유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라는 율법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이 되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여자를 취함으로 음행의 죄를 범한 이 아들의 심각한 오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아래에서의 자유함을 잘못 알고 잘못 배웠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이구동성의 지론들입니다.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인 신약학자 김판임 교수는 바로 이 대목을 “고린도교회와 바울”에서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세례를 받은 자들의 자기 이해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세상적인 가치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였을 것이고, 세상에서 금지하는 계모와의 결혼을 시도할 용기(?)엿을 것이다.” 즉, “잘못 배워도 한 참을 잘못 배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 자유함을 방종이라는 것으로 착각한 자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고찰해 봅시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에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조심해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민하게 접근하여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체의 종교를 칼과 물리력을 동원하여 압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함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13절을 주목해야하는 구절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서 영적으로 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내개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을 무엇이나 하면서 돌아다녔다면, 나는 변덕의 노예가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살기 위해 먹지만, 나중에는 먹기 위해 산다는 옛 격언을 기억하시지요? 어찌 보면 몸은 덧없는 것이라는 말이 타당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몸을 음식으로 가득 채우거나, 여러분의 몸을 섹스에 내맡기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몸으로 여러분을 영화롭게 하시니, 여러분도 자신의 몸으로 그 분을 영화롭게 하십시오.”(유진 피터슨 역).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존재하던 방종주의자들을 향하여 강력하게 제어한 것은 말장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 배운 것을 가지고 고집을 피우거나 우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언어를 쓸 때에는 정확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방종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하다는 슬로건을 토대로 음행도 자행하고, 송사도 행하고, 믿음이 적은 자들을 비난하고, 성적인 차이라는 빌미로 이혼을 밥 먹듯이 하고, 자기들의 은사들 외에 다른 은사들은 폄훼하거나 공격하는 등등의 일탈들을 행했는데 이런 작태에 대하여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음란함에 대하여 전혀 문제시 하지 않으며, 성적으로 문란했던 자들을 향하여 경고성 쐐기를 박고 있는 장면이 본문 15-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신앙의 언어가 얼마나 적확한 온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신앙의 언어의 선명성을 부각해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성적 담론을 성경적 이해의 외적인 요소로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교회의 일부 음행자들과 음행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 음행을 묵인해 준 또 다른 공범자들을 향하여 지체 없이 공격했습니다. 이미 살핀 3:16절에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몸을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의 신학적 바탕을 근거로 강력하게 선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의 몸을 창녀의 몸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녀와 합하는 자가 음행하는 자라고 선포합니다.
    바울의 언어에는 분명한 선명도가 있습니다. 흐릿한 색깔이 아닌, 특별히 성적 담론에 있어서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습니다. 음행하는 자는 자기의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이 언어적인 표현은 메타포(은유)가 없습니다. 상징적인 비유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포장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근래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 담론들이 원래의 의미에 맞지 않게 포장되어 왜곡된 채로 요즈음 유행하는 가짜 뉴스처럼 세인들에게 전달되는 경우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자기들의 인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목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게 교회이고, 그게 목사이고, 그게 성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지켜야 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마저도 탈 근대화의 화두인 획일주의의 탕아로 취급하여 도리어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범죄 집단화시켜 무슨 일을 해도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려는 세상의 힘이 핍박을 받는 소수의 무리가 아니라 도리어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합니다.
    동성애자들이 대선후보의 동성애 반대의 이유를 기독교인들의 눈치를 보는 작태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그들이 교회를 얼마나 무시하면, 교회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면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옳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자가 감히 교회의 뺨을 때린단 말인가에 한편으로는 경악하며 한편으로는 너무나 수치스럽습니다.
    동성애는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마땅히 반대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다른 단어로 포장하면 안 됩니다. 동성애는 동성애이고 음행은 그냥 음행입니다. 성적 일탈을 포장하면 안 됩니다.

2) 잘못 배운 것을 인지하게 해 줄 때 받아들이는 것은 은혜라는 교훈입니다.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자신의 고린도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본문 12-13절을 도표화시켜 잘못 배워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고치라고 말합니다.
    잘못 배운 것을 알고 돌이키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 중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종 하는 자들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 했으니 음란해도 괜찮다는 사람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으니 날 건드리지 말라, 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함이 있다는 사람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시편 49:20절에서 고라 자손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신앙의 언어의 온도는 깨달음이 바로미터입니다. 두 가지의 온도를 체감합시다. 성적인 담론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 말고는 다른 것으로 대치하거나 이해하지 마십시다. 더불어 내가 잘못 배운 것이 있으면 겸손히 돌이키고 다시 잘 세우십시다. 이 두 가지의 교훈을 가슴에 담는 백성들이 신앙의 언어 온도에 잘 적응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한 주간도 넘쳐 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