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우리 교회가 향후 8주년 이후 이런 사역을 더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세상 모두 사랑 없어 (찬송가 503장) ●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보란 듯이 역전하는 교회 ● 본문: 예레미야 7:1-7 1) 예레미야 시대(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의 외형적 신앙의 행태와 결론적 결과에 대해 말해보자. ① 다윗왕조 신앙: ② 시온 신앙: ③ 결론적 결과: |
2)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강조한 남 유다가 집중해야 할 행동은 무엇이었는가? ① 본문 2-3절, 5-7절을 참고해서 말해 보라.
② 윗 항목의 교훈을 설교 주제에 맞게 말해 보자. |
3) 적용하기 ① 한국교회와 내가 섬기는 세인교회가 버려야 할 이기적 교회주의에 대하여 말해보기. ② 반대로 추구해야 할 이타적 이웃주의 실천적 방안들 나누어 보기. ③ 조국교회의 바로 섬(정의와 공의가 흘러넘치는 교회)을 위해 중보하자. | 사역하기 (WORK)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이룰 수 있는 대통령이 선출되게 하옵소서. ●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주옵소서. ● 하나님 교회에 등록한 새 신자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 하게 하옵소서. ● 이단(신천지집단, 안상홍 집단, 신사도운동, 구원파 등등)들이 틈타지 못하는 강력한 복음의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 5월 가정의 달 사역을 위하여 ● 담임목사의 사역에 기름부음이 있게 하옵소서.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주일 낮 예배 설교 (창립 8주년 기념주일 설교) 제목: 보란 듯이 역전하는 교회 본문: 예레미야 7:1-7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7장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읍의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당시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유지들(부유한 자, 권력 상층부의 기득권 세력들)에게 선포한 벼락 치는 천둥소리 같은 설교였습니다. 성전 설교는 본문 7장뿐만이 아니라 예레미야 26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26장은 예레미야의 설교에 대한 유다 백성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 일 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예레미야 1:1-3절).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전 627년인 요시야 재위 13년부터 예언활동을 시작해서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 왕 때 유다가 멸망을 당한 이후인 585년경까지 이른바 오랜 시간동안 활동을 한 선지자입니다. 주목할 것은 오늘 본문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야김 왕의 즉위 초기인 주전 608년에 행한 설교라는 점입니다(렘 26:1). 주전 608년이라 함은 하나님 신앙의 전성기였던 요시야 시대가 저물고 그의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팔레스타인의 강자였던 애굽의 바로에 의해 폐위가 되고 다시 첫째인 여호야김이 친 애굽 정부의 꼭두각시로 등극하게 된 시대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정황은 영적으로 아주 극을 달리는 흑암의 시대였습니다. 예레미야 36장은 아마도 여호야김 시대가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성경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여호야김 제 4년에 두루마리 책에 불러주신 신탁을 서기 바룩을 불러 적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신탁을 받아 적은 내용들을 바룩은 공식적인 집회 때마다 읽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이 하나님의 신탁을 읽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두려워하는 갱신이 일어납니다. 이 이야기가 궁정에 들어가자 여호야김이 그 신탁의 책을 빼앗아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 궁에서 여호야김은 자기의 책사인 여후디로 하여금 읽게 합니다. 여후디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 여호야김이 보인 반응을 예레미야 36:23절은 보고합니다.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참지 못하던 시대, 그래서 그 말씀을 칼로 베어버리는 시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화로불로 태워버리는 시대가 바로 여호야김이 통치하던 주전 608-598년의 유다 시대였습니다. 이 기막힌 세대에 수많은 가난한 자들은 억압의 대상이었고, 있는 자들은 사치의 극을 달렸고, 법정은 뇌물로 매수되었고, 관료들은 이 시대를 즐겼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유다의 종교입니다. 요시야는 아몬과 므낫세로 이어지는 조부와 선친의 패역을 과감하게 개혁하고 예루살렘 이외에 우후죽순 난무했던 일체의 우상 숭배 본거지인 산당들을 제거하는 종교 개혁을 이루는데 성공합니다. 신명기서에 기록된 예루살렘 제사 단일화의 율법대로 예루살렘 성전만 남겨 둔 혁명과도 같은 일체 쇄신 운동이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종교 개혁을 일으킨 요시야가 뜻밖에 애굽과의 전투인 므깃도 전투에서 유감스럽게도 전사하자 다시 유다는 하나님과는 멀어지는 격랑에 휩싸이게 됩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등극한 여호아하스는 재위 3개월 만에 애굽의 바로에 의해 축출되고 유다의 왕이 된 여호야김은 자기 주체가 없이 만년 친 애굽적인 모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유다는 하나님 신앙이 아닌 이방의 국력을 의지하는 어처구니없는 불신앙의 나락을 떨어졌고, 그 한 복판에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명목적인 율법 신앙만이 난무했습니다. 대체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던 신앙은 다윗왕조에게 주신 계약신앙과 또 하나 예루살렘 성전이 시온에 있었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시온 즉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오니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은 유다의 자존심이자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한 성전 종교의 중심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의들을 행하면서 성전에만 들어오면 모든 것들은 용서받는다는 이상한 궤변적 신앙으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 여호야김 시대의 이스라엘 종교였습니다. 이 두 축 중에 하나인 다윗왕조 신앙은 요시야가 급사하는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믿고 더 붙들었던 것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 신앙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의들을 행하면서 성전에만 들어오면 모든 것들은 용서받는다는 이상한 궤변적 신앙으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 여호야김 시대의 이스라엘 종교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된 종교인들을 향한 최후통첩 같은 예레미야의 비수의 메시지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본문 4절).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는 당시의 성전신앙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태로 볼 때는 돌에 맞을 경천벽지의 메시지였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에 걸친 반복 문구로 성전 종교의 헛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가 상징하는 것은 예배당이 여러분을 구원한다는 말을 믿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구원시켜준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2600년 전에 예레미야가 남 유다에 선포한 메시지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처럼 들리는 이유는 2,600년 전의 남 유다의 성전 종교의 그림이 오늘 한국교회의 자화상으로 다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이름으로 포장하면 만사가 오케이 되는 현 한국교회의 상황이 여호야김 시대의 성전종교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본문 8-11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기만 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의 종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의 그 일체의 가증한 일을 내 눈으로 보고 있으며 너희들이 내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너희들의 피난처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합니다. 예배당으로 나오는 행위가 너희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와 몇 푼의 알량한 물질을 하나님께 가증하게 드리고 나면 세상에서 지은 죄들이 속량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와 모든 예배에 다 참석하는 행위를 통해 지은 죄악들이 속죄 받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더 가증한 일이라고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식적 성전 종교에 함몰되지 말고 진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정신을 차려야할 신앙의 행위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본문 2-3절).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본문 5-7절). 예레미야는 몇 가지의 행동 강령을 선언했습니다.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3절), ‘이웃에게 행위를 바르게 하여 정의를 행하라’(5절),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라’(6절),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6절)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기막힌 세태를 역전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실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 이기적인 교회주의가 아니라 이타적 이웃주의 교회로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공동체는 교회와 가정입니다. 교회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가 소중한 공동체라고 해도 교회가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주의는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주의라고 합니다. 교회가 교회만을 위한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하면 그것은 중세 가톨릭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실패한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종교의 환상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경종하였습니다. “이웃에게 행위를 바르게 하여 정의를 행하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고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고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철저한 이타적 교회가 되어 이웃과 함께 나누는 교회, 신자가 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포한 메시지의 압권이 우상숭배 척결이 먼저가 아니라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지 않는 것이 먼저라고 한 점입니다. 혁명과도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그만큼 이타적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10년 뒤인 18세가 되었을 때 “교회가 세속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판이 대체적인 정황이었는데 선배님들이 그 판을 세상에게 감동을 주는 판으로 역전시켰습니다.” 라고 행복하게 간증하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교회는 이타적일 때만 교회”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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