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살면서 인격적으로 대우 받은 감동의 이야기나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은 일, 나누어 보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오 신실하신 주 (찬송가 393장) ● 주의 나라가 임할 때 (ccm)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인격적으로 반응합시다. ● 본문: 고린도전서 6:9-11 1) 고린도교회 지체들이 보인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두 가지로 분류해 보자. ① 비인격적 교제: 본문 9-10절
② 인격적 교제: 11절 |
2) ‘하나님의 부재’ 라는 신학적 언어를 에덴동산과 랍비 코스꼬와 관련하여 설명해 보자. ①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② 마틴 부버의 ‘인간의 길’에 소개된 랍비 코스꼬 담론: |
3) 적용하기 ①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떤 방법으로 이어가고 있는가? ② 혹시 비인격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대우하는 경우가 있다면 어떤 경우인가? ③ 인격적 관계유지를 위해 대안 찾기 및 기도하기 | 사역하기 (WORK)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이룰 수 있는 대통령이 선출되게 하옵소서. ●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주옵소서. ● 하나님 교회에 등록한 새 신자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 하게 하옵소서. ● 독서 여행이 행복하게 하옵소서. ● 이단(신천지집단, 안상홍 집단, 신사도운동, 구원파 등등)들이 틈타지 못하는 강력한 복음의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 창립 8주년 기념 주일이 은혜로운 주일 되도록. ● 담임목사의 사역에 기름부음이 있게 하옵소서.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4월 23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9번째 강해) 제목: 인격적으로 반응합시다. 본문: 고린도전서 6:9-11 역대상 21장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인구조사를 한 결과로 70,000명의 인원이 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거두시고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갓을 통해 다윗에게 명령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여부스로 올라가서 오르난에게 너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아야 하는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오르난이 기쁨으로 여호와를 위한 제단으로 사용될 타작마당을 왕에게 헌물하겠다고 말하나 다윗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반드시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빼앗지 아니하겠고 값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하니라”(대상 21:24절). 이렇게 정당한 삯을 지불하겠다고 말한 다윗은 오르난에게 금 육백 세겔을 지불하고 그 타작마당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전염병을 거두어 달라는 간절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그 결과 전염병 심판으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이렇듯 성경의 내증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가지고 있는 물리력과 공권력을 사용하여 힘없는 백성의 땅을 갈취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땅을 구입하여 번제를 드린 다윗의 행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격적인 신실함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당신의 사람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며, 더불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끼리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일전에 ‘ICH UND DU’ (나와 너)라는 걸작을 남긴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인간의 길’이라는 유대인들의 철저한 율법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하씨딤’의 가르침을 삶으로 활용하는 책을 썼는데 그 안에 이런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대 랍비인 코쓰크가 그를 찾아온 유대교 학자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학자들은 그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질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이 온통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데.” 비웃고 있는 유대인 학자들에게 랍비 코쓰크가 이렇게 자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받아들이는 어느 곳에나 머무십니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곳에 하나님이 머무십니다. 그래서 그곳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에게 나아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를 물으며 도전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곤란하게하기 위한 아주 소위가 악한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아신 주님은 그들에게 항복하게 하시는 말씀을 천명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절).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적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런 차원으로 볼 때 본문의 배경이 된 고린도교회를 섬기는 자들 중에는 아주 철저하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부류가 있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철저하게 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던 부류들이 있었음을 바울이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본문 9-10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향해 음행하는 자들을 용인하고, 성도간의 송사 사건으로 고소, 고발하는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안타까운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또 경종하였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바울이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불의한 자라고 정의한 부류들의 분류는 본문에만 10개의 행위를 하는 자들임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입니다. 이렇게 10개로 정리한 이들 부류들에게 임할 비극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비극입니다. 본문 9-10절에서 두 번에 걸쳐서 강조한 바울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강력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아주 반대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들이 아닌 본문에서는 굳이 그렇게 바울이 문장화시키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상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류들을 대조하여 언급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본문 11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 바울의 이상으로 본문에 작성하고 있는 대조적인 두 부류들을 분류한 글 솜씨를 통하여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비인격적 관계의 집단이지만, 후자는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부활절 이후 두 번째 주일에 우리들에게 주시는 영적 테제를 얻게 됩니다.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아픈 비극은 에덴에서의 추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에덴에서 추방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후 찾아온 비극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단절된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에덴동산에서의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비극을 ‘하나님의 부재’ 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아픈 비극은 내 안에 하나님이 부재하신 인격적 관계의 단절입니다. 음행하는 자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리 만무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비인격적 반응의 무리들입니다. 간음하는 자의 장소에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머물러 계실 수 없습니다. 탐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매일반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자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자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어진 형벌은 하나님 나라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고 상응하는 반응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깁니다.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이런 논제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변증을 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것까지 하시는 분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것’(things)이 아니라 ‘헛것’(nonentities)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상호 모순되는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약한 피조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은 하나님께도 똑같이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pp,41-42) 루이스의 이 논제의 핵심을 신정론에 대한 해석으로 받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이 얼마나 인격적인 존재이신가의 차원에서 해석하면 하나님의 속성 중 깊은 곳에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인간을 로봇처럼 취급하지 않으시고 전인격의 존재로 대우하신다는 그런 감동이 있습니다. 이 해석은 역으로 하나님께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께 보이는 전인격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 코쓰끄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체의 곳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인격적인 반응이 있는 곳이라는 해석은 옳습니다. 시편 50편을 보면,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7-8절). 이 시에서 모든 대명사는 1인칭, 2인칭 단수(‘내’ ‘네게’ ‘네’ ‘너’)입니다. 주님은 인격적으로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저 사람에게 찾아가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말은 너무나도 옳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나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이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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