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예수를 믿고서 수지맞은(영적 부활 경험) 것 진솔하게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무덤에 머물러 (찬송가 160장) ● 주님께 영광 (찬송가 165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사망이 사망되다. ● 본문 : 디모데후서 1:8-10 1) 바울이 디모데에게 두 번째 편지할 때의 육체적 상황과 영적 상황을 비교해 보자. ① 육체적 상황: 디모데후서 4:9-11 참고
② 영적 상황: 디모데후서 1:8 |
2) 바울이 영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 근본적인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① 본문 9절에 있는 근거:
② 본문 10절에 있는 근거 : |
3) 적용하기 ① 일반적인 부활 신앙의 현재화란 무엇인가?(주제를 참고하여 말해보자.) ② 내 부활 신앙의 1인칭 현재화를 진솔하게 파악하고 살아내기 ③ 결단을 기도하기 | 사역하기 (WORK)1) 주간 중보 기도제목 ● 지역 셀에서 지속적인 전도 사역 전개 중보하기 ● 다음세대 제자훈련 승리를 위하여 ● 환우들의 치유를 위하여 ● 5월 9일 대통령 선거에 국민들을 두려워하는 지도자가 선출되도록 ● 피선교지를 위하여 ● 담임목사의 목양 사역을 위하여 ● 새 신자들의 아름다운 정착과 가나안 성도들을 구원하는 세인교회 되도록 ● 제 8주년 창립 기념주일의 승리를 위해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4월 16일 부활절 설교 제목: 사망이 사망되다. 본문: 디모데후서 1:8-10 우리들의 주군이신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역사적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약 21세기 전의 일입니다. 이 시간의 갭과 팔레스타인이라는 공간의 다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고스란히 현재화되는 결정적인 증거를 오늘 본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고 있는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때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던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는 바울이 상당히 육체적으로 곤비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정황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미 많이 노쇠해 있었기에 로마의 가을 추위를 힘들어 했고 순교도 직감했기에 사랑하는 양아들 디모데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지금 구금되어 있는 로마의 감옥에는 주치의의 역할을 했던 누가이외에는 아무도 그의 곁에 없었기에 사람으로 인한 외로움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했기에 바울은 이 편지의 말미에 이런 소회를 진솔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디모데후서 4:9-11절). 바울의 이러한 육체적인 곤비함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처절하리만큼 디모데후서에 기록되어 있는 반면 그의 영적인 면은 약함의 빈틈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본문 8절). 바울은 육체적으로 심히 곤고했던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에게 두 가지를 권하고 있습니다. ① 주를 증언한 것과 주를 위하여 갇혀 있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②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린도전서 1: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선포한 메시지를 통해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당시의 주류적인 멤버들인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반응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주후 1세기 십자가는 기피 형벌 1호였습니다. 십자가형은 저주의 심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전했던 것이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였습니다.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톰 라이트 교수는 “이것이 복음이다.”에서 이렇게 이 황당함을 현대적 서술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의 이름은 예수라고 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빤히 쳐다 볼 것이다.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누구든지 그는 오늘 무엇을 잘못 먹은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뙤약볕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십자가형은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미 그 사람은 죽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주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단 말인가?”(p,50) 이것이 오늘 본문의 시대적 정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고한 것은 “주를 증언한 것과 주를 위하여 갇혀 있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며,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부담감 백배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지켜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본문 9절) 이제 바울이 디모데에게 무리수 천만인 것 같은 그리고 부담 백배의 십자가 복음의 증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동참해야 하는 당위성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들 예수를 그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하나님께서 나 바울과 너 디모데를 구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이 너와 나를 불러 소명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구원과 소명은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획하신 은혜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충분한 근거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오늘 부활 절기에 더 강력한 이유를 본문 마지막 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 구절에 기록되어 있는 헬라어 ‘에피파이네인’ (나타나심)은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의 사건과 관련하여 쓰입니다. 하나는 성육신과 관련된 단어이고(디도서 3:4),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과 관련하여 사용된다는 점입니다.(디도서 2:11-14). 이것을 종합한다면 본문 10절에 기록된 예수의 나타나심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두 경우 전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바울의 신학적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메시아로 오신 초림과 앞으로 심판의 주로 오실 재림의 시간적 간극 사이에 주님이 보여주신 가장 위대한 사건은 다시 사신 부활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디모데에게, 그리고 21세기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살고 있는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리고 이루신 감동이 있습니다. 부활은 사망을 폐하신 것입니다.(10절 중반절)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사망을 주어로 삼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사망이 패했다.” DBY(DARBY TRANSLATION) 영어성경은 “죽음을 취소(말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our Saviour Jesus Christ, who has annulled death.), 가톨릭과 개신교회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이 부분을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없애버리시고” 라고 기록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에는 주님의 부활하심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부활하신 순간, 사망은 사망되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순간, 사망은 사망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알았던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5-58절에서 이렇게 담대히 선포한 것입니다.“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주님의 부활을 21세기라는 시간적 간극을 뛰어넘어 그 부활을 나의 부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당위성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 나의 삶의 부분 부분마다 스멀대고 올라오며 나를 짓누르고, 나를 또 죽이려고 하는 일체의 영적 사망이 사망되었음을 체휼하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망이 사망된 오늘, 우리 세인지체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승계하며 살아야 합니다. 2017년 부활절, 이 방법을 제시합시다.
* 썩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셨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면 마땅히 부활의 주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도무지 썩지 아니할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 말로 당연한 의무인 것입니다. 10절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영적인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어 사용되는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조에’라는 단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들은 ‘조에’ 라는 영생을 부여받은 백성들입니다. 이 ‘조에’ 는 썩지 않는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주변 환경에 우리들의 영혼을 썩어문드러지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이 땅에서 공격받는 공통분모입니다. 요한복음 15:5절을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이 대목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앞에 외모, 지식, 돈, 육체적 건강, 이 모든 것들은 반드시 썩는 것들이나 반대로 썩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3-25).”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썩어지는 것을 위해 살았던 삶의 방향성을 바꾸어 썩지 아니하는 영원한 삶을 위해 내 삶의 방향성을 돌이키는 것이 바로 오늘 나 또한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한 자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TD, 영성훈련, 치유 부흥회, 엠파테이션, 양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나는 결코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듦으로 날마다 삶 속에서 현재적 부활을 경험하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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