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4.09 지역 셀 사역2024-04-23 16:1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이런 것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나누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사랑으로
● 날 세우시네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세상에게 살려달라는 교회
● 본문: 고린도전서 6:1-8
1) 본문에서 바울이 정의한 세상 법정에 있는 판사들에 평가는?
① 1절에서 언급한 정의:
② 4절에서 언급한 정의:
③ 바울의 종합적인 평가:  

2) 본문에서 바울이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교회의 대사회적인 송사 태도는?
① 1-2절 참고:
② 5-8절 참고:
③ 결론적인 태도를 주제에 맞게 설명하라.  

3) 적용하기
① 담임목사가 제시한 세상을 향해 구걸하는 교회가 되지 않으려면 해야 할 대전제?

② 교회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세상에게 손 벌리는 비굴한 일들을 하고 있다면 돌이키는 결단을 선포하자.   

 
사역하기 (WORK)
1) 고난주간 사역 지침 전하기
● 고난 참여를 위한 개인적인 신앙의 행위 드리기
(금식, 새벽예배 참석하기, 미디어 금식, 구제 등등)
● 부활주일에 지역 셀 전도 대상자 교회로 인도하기
2) 주간 중보 기도제목
● 지역 셀 전도 축제 은혜롭게 열매 맺도록 중보하기
● 다음세대 제자훈련 승리를 위하여
● 환우들의 치유를 위하여
● 5월 9일 대통령 선거에 국민들을 두려워하는 지도자가 선출되도록
● 피선교지를 위하여
● 담임목사의 목양 사역을 위하여
● 새 신자들의 아름다운 정착과 가나안 성도들을 구원하는 세인교회 되도록   

 
설교요약 (SUMMARY)
2017년 4월 9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8번째 강해)
제목: 세상에게 살려달라는 교회
본문: 고린도전서 6:1-8
 
  마태복음 16:18절은 교회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성경 내증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교회 말고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선언의 진의는 하나님 사람들의 공동체인 비가시적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가 음부의 권세에게 우리들의 치부가 여기 있으니 우리들을 무너뜨려달라고 애원하는 기가 막힌 아이러니들이 자행된다는 점입니다. 그 실례가 벌써 주후 1세기 고린도교회에 나타났습니다.
  
  본문은 음행의 사건이 아닌 고소 사건으로 주제가 옮겨졌습니다. 추론하건대,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송의 이유는 딱히 이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라는 당시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7장에 언급되어 있는 결혼에 관한 윤리적인 제문제(諸問題)들 즉 독신, 재혼에 관한 논쟁 등등을 비롯해서, 8장에서 보게 될 우상 제물에 관한 음식 규례에 대한 문제, 11-12장에서는 공적 예배에서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 그리고 음행에 대한 확실한 정의 등등 고린도교회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논쟁의 거리를 만들 수 있는 것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주석가 바클레이는 고린도를 포함하고 있었던 헬라 지역의 정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천성적으로 그리고 특징적으로 소송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법정은 사실상 그들의 주요 오락거리였고, 여흥거리였다. 헬라의 도시들에서는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변호사들이었고, 법률의 소송 판결을 내리거나 그것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헬라인들은 사실상 고소하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당연히 헬라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교회 안에 소송하는 경향을 유입시켰다.” (데이빗 프라이어, 고린도전서 주석, pp, 142-143)
  어떤 것이 소송의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세상 밖에 있는 법정으로 소송하는 것에 대하여 죄책을 느끼거나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즐기는 분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기막힌 영적 상태인 고린도교회를 보면서 바울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본문 1-2절).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세상 법정에 고소한 자들을 향하여 격하게 비난하며 공격한 것이 세상 법정에 있는 판사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판사들을 ‘불의한 자’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본문 4절을 현대인의 성경에서 “여러분에게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교회에서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워서야 되겠습니까?” 반전 포인트를 주어 번역하였습니다.
  바울은 세상 법정에 있는 판사들을 “교회에서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사람”들이라고 평가절하 하여 정의합니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 없는 아류들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을 던집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본문1-2절)
“성도(고린도교회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세상도 너희(고린도교회 성도)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이 두 구절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도대체 얼마나 못났으면 우리들이 살려주어야 하는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친단 말인가? 우리는 세상이 살려 달라고 손 내밀게 하고 그 때 그들에게 살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교회란 말이다.”
  바울은 이 기막힌 참담함을 보고 받고 이어지는 편지에서 이렇게 공격적인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본문 5-8절).
  세상 법정에 송사를 한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의 형제들을 향하여 내가 지금 편지에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너희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라고 고언합니다. 또한 얼마나 지혜가 없고 무식하면 형제의 일을 세상에게 고하여 고소하는 작태를 범하느냐고 직설합니다.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만에 하나 세상 법정에다가 교회의 일을 고해바치려거든 차라리 너희들 스스로가 아프더라도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것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교회의 일을 맡기는 것은 불의 그 자체이며, 형제를 속이는 행위라고 말하며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일련의 고린도교회 지체들의 작태를 고발하면서 쐐기를 박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 교회는 세상에 구걸할 수밖에 없는 일체의 비참함을 중단해야 합니다.
  
  오늘 주제로 삼은 ‘교회가 세상에 구걸하는 비참함’이라는 정의는 세상의 법정으로 교회의 분쟁 문제를 들이대는 행위로 국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제시한 내용들은 분명히 고린도교회의 분쟁거리들을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린도 법정의 세속적 판사들에게 넘긴 것을 비난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지적을 적용하기에 앞서 한 가지를 대전제로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송사의 상태를 만들지 말아야 함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고린도교회 밖으로 가지고 나간 것을 힐난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힐난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런 아쉬움을 담겨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송사거리를 왜 만들었느냐?입니다. 왜 교회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느냐?입니다. 교회 밖의 무리들에게 왜 살려달라고 손 내밀게 만들었느냐?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동성애자들이 교회를 향하여 집중적인 포화를 날리는 것은 동성애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일체의 일들에 대한 반향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못한 작태들을 행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동성애자들을 향하여 정죄할 수 있느냐는 역설적 도전입니다. 교회 안에서 음행이 자행되고, 성적 폭력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데 무슨 자격으로 동성애자들을 정죄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비참하게 살려달고 구걸하는 작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교회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 언급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심각한 위기 문제는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당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도들 대부분도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인 반면, 헬라적 그리스도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항상 주류와 비주류들의 묘한 긴장감으로 편하지 않은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행 6:1)
  헬라파 유대인의 소외는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될 수 있었던 위험인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위험인자 보다 더 심각한 것이 사도행전 6:2절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여기에 번역된 ‘제쳐 놓고’라는 구절을 NIV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to neglect the ministry of the word of God”(하나님 말씀의 사역을 게을리 했던 것).
  교회가 무력해지는 이유, 세상에 손을 벌려야 하는 기막힌 참담함의 원인, 세상이 훨씬 더 질 나쁜 영역이지만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교회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교회를 난도질해도 교회는 당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구걸하는 비참함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에 구걸하는 비참함을 벗는 일은 세상이 설득당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응답인 가장 교회다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입니다. 덧붙이지지 말고, 삭제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입니다.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그 십자가의 능력은 선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능력의 믿음으로 무장한 자는 세상에게 비굴하게 손 내밀지 않습니다. 세상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때 고통스러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비참함을 벗어나기 위해 말씀대로 살기에 천착하는 자들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에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치욕적인 삶이 아닌 세상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게 만드는 자존감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한 주간을 넉넉하게 살아내는 세인 지체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