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나도 모르게 말을 실수해서 난처함을 경험했던 에피소드가 있으면 나누어 보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신자 되기 원합니다. (찬송가 463장) ●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말이 아닙니다. ● 본문 : 고린도전서 4:18-21 1) 고린도교회 지체들(특히 그리스도 파) 중에서 스스로 교만해 진 이유를 바울은 자신과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있는가? ★ 19-21절의 본문과 담임목사의 설교를 참고해서 말해보자. ① 19-21절을 읽자. ② 담임목사의 설교를 상기해 보자. |
2) 바울이 본문 20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역설했는데 ‘말’과 ‘능력’을 5장의 ‘음행’과 관련하여 비교해 보자. ① 고린도전서 5:1-2절의 음행을 합리화시킨 ‘말’은 – 자유함을 빙자한 상황주의 및 열광주의와 연관해 보자. ② 진짜로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능력’이란 무엇인가? - ‘음행’과 관련하여 |
3) 적용하기 ① 오늘날 한국교회와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말잔치로 포장된 합리화를 반성하자.
② 더불어 나를 곧추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올바른 신앙생활의 기초인 ‘능력’을 얻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나의 결단을 말해보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 지역 셀이 섬기는 전도 대상자들을 위하여 ● 교회 소그룹 성경 공부반들을 위하여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 피선교지를 위하여 (특히 루존교회를 위하여) ● 춘계 셀 대 심방 사역을 위하여 2) 헌금 3) 광고 ● 부활주일 셀에서 섬기는 전도프로젝트 상의하기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3월 5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3번째 강해) 제목: 말이 아닙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4:18-21 말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 10:19). 언어 사용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동 강령을 제시한 야고보서 1:19에서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어지는 1:26절에서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 야고보서 3:2-6절을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야고보 기자의 결론적인 성경적 가르침은 ‘말을 줄이는 것이 최선의 신앙생활이다.’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 19-20절을 보면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며 고린도전서를 작성했을 때 고린도 교회의 영적 정황은 분파주의적인 다툼으로 인해 교회가 만신창이가 된 무질서한 상태였습니다. 이 다툼의 정점은 특히 그리스도 파였습니다. 4개 분파 중에 가장 골칫거리였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는다고 말하는 교만덩어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 파의 또 다른 치명적인 교만함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자유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더럼대학의 신약학 교수인 CK 바레트는 자신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고린도전서 4:18절“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교회의 발전을 주도하였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부 회중들의 방종을 막았다. 이것은 그들이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방지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앙을 통해 부여받은 자유를 무절제한 방식으로 행사하는 것을 방지했던 것이다. 바울이 등을 돌리자(설교자 주: 에베소로 떠나자) 그들의 자유는 방종으로 변했다. 바울이 없는 동안 그들은 무절제한 향락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바울이 다시 고린도로 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렸다. 그들은 제멋대로 처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을 범한 것이다.” (국제 성서주석 고린도전서 p,147) 고린도전서 5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그리스도 파와 같이 교만의 극치를 달리던 자들이 버젓이 자행하던 음란의 죄에서 자유를 빙자한 방종이 얼마나 무서운 타락의 결과를 낳는지를 보게 됩니다. 바울은 전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성도가 계모와 혼인한 사건)을 자유함이라는 방종으로 일탈한 저들을 향하여 가장 격한 어조로 맹비난합니다. 5:1절에서 바울은 이 일을 ‘음행’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는데 이 단어는 헬라어 ‘포르네이아’의 번역으로 바로 이 단어에서 ‘포르노’라는 단어가 나온 것처럼 바울은 성경을 빗대 방종 하는 자들이 정욕을 채우는 죄악인데도 그것을 마치 자선 사업한 양 변질시키고 가장한 고린도교회의 분파주의자들의 교만의 극치를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들(그리스도 파로 추정되는 자)이 이렇게 방종의 늪으로 빠진 가장 큰 이유는 바울이 다시는 고린도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일탈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직설했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본문 19-21절). 바울이 전하고 있는 진정성이 있는 메시지의 함축적인 내용은 나의 부재로 인하여 겁 없이 일탈하고 있는 일부 고린도교회의 분파주의자들과 교만한 방종주의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히 다시 너희들에게로 갈 것이다.” 그런데 다시 갈 때는 그냥 가지 않고 방종주의자들, 교만한 자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바울이 엄한 훈육관으로 채찍을 들고 갈 수 있음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단정한 이유는 주후 1세기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능력이 언제든지 상존할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각종 영적인 권세로 고린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적 탈을 쓴 만행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의 주제 절이라고 할 수 있는 20절에서 이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테마는 * 21세기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사람들의 선동이나 웅변적인 삶이 아니라 변화를 나타내는 삶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한 남성이 계모를 취하였을 때 그가 계모를 취한 근거는 지적인 능력을 토대로 한 비성서적인 자유함이었습니다.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이자, 바른 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인 김판임 교수는 본인의 저서인 ‘바울과 고린도교회’에서 고린도교회의 음행을 합리화시킨 5:1절의 대다수의 고린도교회 주인공들을 향하여 이렇게 맹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교회의 문제가 그저 성적인 욕구에 의한 자연적인 사건이나 남 보기에 부끄러워 숨기는 애정행각 수준의 사건이 아니라, 지적인 근거를 갖고 자랑했던 정도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는 데에 있었다.”(p,59) 세상의 아우성과 외침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의 소리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외침과 말 중에서 교회가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을 직시하고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중들이 큰소리로 말해도 거기에 주눅 들지 않고 그 중에 왜곡된 세상의 말을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소리에 때로는 귀를 기울이지만 그들이 내는 큰소리에 분별력을 갖고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외치는 웅변이나 선동이나 화려한 수사어구가 포함된 말이 정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말씀의 능력만이 정의와 공의임을 100%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고 또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이 수없이 외치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던 미슈파트(정의)와 쩨다카(공의)가 전제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짜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올바른 신학이 배제된 그래서 언제든지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자의적 해석할 수 있는 편협함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말씀은 오순절 계통의 일탈된 열광주의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혹은 물질적인 힘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상업적인 부흥사들의 현란한 말솜씨로 만들어지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능력이란 내 삶이 변화되게 하는 공의와 정의가 살아 있는 능력이며, 일회적으로 변화된 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전시성 변화를 촉발하는 그런 능력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늘 나의 크로노스의 현장을 카이로스의 현장으로 삶의 질을 바꾸어 놓는 능력입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위젤은 ‘이방인은 없다.’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우리 주변은 온통 소음 투성입니다. 귀가 얼얼할 정도죠. 저마다 뭐라고 말들은 하는데 듣는 사람은 없어요. 사실 이렇게 듣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침묵인데요. 하지만 슬픈 것은 사람들이 그런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p,260) 마태복음 26장은 예수께서 가야바에게 잡혀 와서 심문 당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이기로 각본을 짠 종교인들이 여러 차례 주님에게 질문하는 내용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왜 대답이 없느냐” (62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3절). 궁색한 자들은 말로 그리고 웅변으로, 선동으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침묵이셨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이미 삶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삶으로 말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능력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변화된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로 선동하는 자들이 아니며 또 넘어가는 자들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살아내셨고, 또 나타내셨던 그 삶을 살아갈 때 나에게도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자신 있게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17)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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