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타당성으로의 진입 “특정 해석이 나에게는 좋거나 참될 수 있겠지만 상대방이나 다른 누군가에게도 반드시 좋거나 참된 것은 아니다. 오늘 나에게 좋거나 참되다고 해서 내일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미로슬라브 볼프,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 IVP,117.) 목회자나, 성도가 끊임없이 공부하고, 치열하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전술한 문장의 삶을 날마다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아날로그에 길들여 있는 자는 디지털 팬덤을 이해할 수 없고, 디지털에 길들여져 있는 자는 아날로그의 멋을 알 리 만무입니다. 도리어 서로를 번잡함과 진부함으로 폄훼합니다. 극과 극일 수밖에 없는 이런 이해의 폭을 좁힐 수 있는 완전한 방법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좁히는 선방을 위해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공부입니다. 이런 교우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 교회 목사는 책읽기, 공부하는 것 말고는 다른 것에는 도대체 관심이 없어!” 헌데 이런 교우들은 만에 하나, 책 읽는 것, 공부하는 것과 담을 싼 목사를 만나면 분명히 이런 볼멘소리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노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어!” 정말로 무서운 사람은 자기 확신이라는 괴물에 학습된 효과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입니다. 왜 이런 사람이 무서운가하면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 무지 때문인데, 더 소름끼치는 것은 그것을 본인만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앞글에서 소개한 미로슬라브 볼프의 글을 접하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그가 말한 특정 해석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에 저 또한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마치자, 제 설교를 모니터링 해주는 많은 동역의 지체들이 제게 던져준 상반된 이야기를 듣다가 앞에서 작년 말에 읽었던 소개한 미로슬라브 볼프의 이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피드백에 장단 맞추기가 쉽지 않았기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 지난 주일 설교 전에 부르셨던 ‘광야를 지나며’ 찬양을 들으면서 은혜가 넘쳐서 눈물이 났어요. 목사님, 목사님이 부르는 찬양은 왠지 쨘! 하는 감동이 있어서 감사해요. 꺾기가 있어서 그런가요.(ㅎ) 지난 주일과 같은 찬양을 많이 불러 주세요.” 아뿔사! 같은 설교에서 같은 찬양을 들었던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목사, 부르려면 제대로 불러라! 박자 무시, 멜로디 무시, 최악이었다. 찬양은 준비하고 불러야 그게 하나님께 대한 예의다. 모르는 찬양이면 아예 부르지 말기.” 등등으로 압박했습니다. 가뜩이나 잘 못 부르는 찬양 부르기인데 앞으로는 더 의기소침 될 것 같습니다. ‘보편적 타당성으로의 진입’이라는 사회학적인 전문 용어를 들어보셨습니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리더에게 가장 힘든 리더십이 있다면 모두를 공감시키는 능력이라는 사회학적인 논제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어언 30년 이상을 이끌어온 사람으로 이 문장이 주는 무게감이 얼마나 어마무시한지 알아도 너무 잘 압니다. 예수님도 12명의 제자 전부에게 세속적 관점의 스펙트럼으로 볼 때 보편적 타당성으로의 진입에 실패했으니, 이 문장에 부합한 삶을 살아내는 리더가 있을 리 만무입니다. 해서 100톤의 무게감은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누가 뭐라든 주군께서 조명하시면 나는 내 길을 가겠다고 말입니다. 그 길로의 발걸음은 공부인 것 같습니다. 공부 밖에는 모른다고 타박을 주든 말든 그냥 지금 해오던 대로 공부에 최선을 다하렵니다. 그게 목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취할 최선의 공격이자 수비라고 믿기에 말입니다. 사순절 넷째 주일 부를 찬송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입니다. 아날로거가 근래 나온 찬양을 따라 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지난 주일의 핍박을 만회하기 위해 눈만 뜨면 이 찬양을 들었습니다. 박자, 멜로디가 제발 틀리지 않기를 고대하면서 듣고 있습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