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5:5-10
제목: 주께서 걸으셨던 길
서론)
아무리 어둡고 험난한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아무리 가파른 고갯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넘어갔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어둡고 험난한 이 세월이/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과/ 위로를 줄 수 있기를
1987년 미 프로야구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을 수상한 스티브 베드로시안의 아들인 주니어 베드로시안이 쓴 글입니다.
유명한 아버지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드로시안은 2010년 미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전체 29번 지명을 받고 LA 에인절스 유니폼을 입으며 화려하게 데뷔를 한 장래가 촉망되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고질적인 부상이 결국 그를 붙잡아 조기에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불운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잘 나가던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수생활을 시작했던 인생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 베드로시안이 쓴 이 시는 그의 인생 역경을 대변해 주는 듯한 글감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저항 가수로 알려진 안치환씨가 곡을 만들어 노래함으로 많은 대중들에게 익숙해진 시입니다.
이 시에서 제가 주목하는 시어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무도 걸어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곱씹어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면서 때로는 폭풍우를 만나고, 또 때로는 첩첩산중에 홀로 남은 것 같은 막막한 사면초가에 놓일 때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다시 부침하여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우리 삶의 선배들이 그 길을 먼저 경험하였기에 버거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걸어가면서 쌓아 놓았던 여러 노하우들을 거울삼아 다시 도전하며 용기를 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우리들의 삶의 여정은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분명히 이런 궤적 안에서 살아온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이런 가정을 해 보십시다.
앞에 걸어간 적이 정말 아무도 없는 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두렵고 또 두려울까.
두렵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려운 길을 걸으신 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 분을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론)
본문 5-6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셨다고 적시합니다.
지난 주일설교를 통해 살폈듯이 대제사장의 시작은 아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즉 조카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라 명령하셨고, 모세는 순종하여 그렇게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사람인 모세가 사람인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2:7절을 인용하며 이 사실을 천명하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중요한 직책을 하나 맡기셨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영원히 세울 것이라는 직책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성경을 조금 깊이 읽으신 교우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지체들을 위해 멜기세덱을 소개합니다.
마침 이번 주간 수요일 설교와 그 다음 주간 수요일 창세기 강해를 통해 소개할 대상이기에 시기적으로도 잘 맞아떨어지는 기회도 될 것 같습니다.
소돔이 있는 소알 지역 즉 요단 동편의 비옥한 땅으로 머리 돌리며 이동한 롯은 그곳에서 안락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롯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그곳은 세속적 가치가 우글거리는 영적 전쟁터였습니다.
소돔 지역은 이미 도시 국가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거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거민들은 야훼 하나님 신앙과는 관계없는 공동체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막강했던 공동체는 3개 연합공동체였는데 사해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이 구분되어 각기의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네 나라(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가 서쪽에 자리를 잡았던 다섯 나라(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에 비해 훨씬 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창세기 14장은 보고합니다.
이런 이유로 서쪽의 5왕들은 12년 동안 동쪽 왕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하국가의 치욕을 당했는데 13년째 되는 해에 반란을 일으키고 조공 중단은 물론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마땅히 동쪽에 있었던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네 나라의 왕들이 좌시하지 않고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싸움은 해보나 마나였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동쪽 연합군이 서쪽 나라들을 파죽지세로 진압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던 엘람 왕 그돌라오멜은 소돔과 고모라를 진압하면서 거기에 살고 있었던 롯과 그의 식솔들을 인질로 잡아가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려고 머리를 굴렸던 롯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소식을 헤브론에 살고 있었던 큰아버지 아브람이 듣게 되었고 아브람은 정예군사 318명을 선발하여 롯을 잡아간 엘람 군사들을 추격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롯을 구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 담긴 자세한 메시지는 이번 주 수요 예배 시간 설교를 통해 교우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기적적으로 롯을 구출하여 돌아오는 아브람의 일행을 소돔 왕과 살렘 왕이 영접했다고 창세기 14:17-24절이 보고합니다.
이 텍스트에서 창세기 기자가 보고한 살렘 왕 멜기세덱의 정체를 한번 조망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14:18-20절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주목해도 괜찮은 의미가 담겨 있는 구절입니다.
백석대학교 송병현 교수는 살렘 왕을 아마도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왕이라고 진단하고 있는데 이것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런 그가 아브람이 먹을 수 있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긴장하며 들어야 할 메시지는 창세기 기자가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정의한 대목입니다.
동시에 그는 아브람을 축복했다고 보고합니다.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노획물의 1/10을 드렸다는 것으로 성경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멜기세덱 기사를 마무리합니다.
송 교수는 이렇게 그의 주석서에 기록합니다.
“신약에 와서 이 타이틀이 예수님께 적용되며 예수님은 제 2의 멜기세덱으로 표현된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국제제자훈련원,p,287.)
그렇다면 본문 6,8절에 기록되어 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다는 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수월해집니다.
성경에 ‘반차’로 번역한 단어가 생소할 것입니다.
헬라어 ‘탁시스’의 번역인 ‘반차’는 영어단어로 재 표현하자면 ‘order' 즉 ’질서‘ 혹은 ’순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과 같은 위치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아들 예수님은 아론처럼 사람에 의해서 임명된 제한된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된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된 제사장이 예수님이시기에 그는 누구도 걸어보지 않았던 길을 걸어야하는 분이셨습니다.
본문 7-9절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 구절은 대단히 감동적인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하면서 때로는 심한 통곡을 하며 눈물도 쏟고, 간절한 간구를 드리고, 소원을 하나님께 아뢴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며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아들이신 예수께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않은 생소한 일이며 길이었습니다.
심지어 8-9절에서는 아들이신 예수께서 고난당하심(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희생요구에 순종함으로서 모든 자들을 구원하는 근원이 되셨다고 보고합니다.
이 길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소한 길이었습니다.
이전 역사를 통해 단 한 번도 일어난 전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일무이한 사건을 맞이하신 주님이 두렵기 짝이 없었던 이 일을 감당하시기 위해 행하신 일이 바로 7절인 것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바로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예수님도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하나님 아버지)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소하고 누구도 경험해 보지 않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이 길을 순종하면서 주께서 가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이 길을 가야만 나와 당신을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8-9절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누가복음 22:42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그 유명한 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올린 기도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주님의 처절함이 보이는 대목입니다.
본문 7절 전반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분명히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육체의 나약함을 갖고 계신 주님은 죽음이라는 무섭고 두려운 길을 가야 하셨습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철저히 이타적인 사랑 때문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이 일이 가능하면 아버지의 뜻에서 어긋난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소망으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갖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지와 소망대로가 아닌 죽어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을 안 주님은 받으신 고난의 명령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결과,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주 몰링 대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마이클 프로스트가 이렇게 말한 것을 내 기억의 창고 안에 저장해 두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길로 걸어가는데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마이클 프로스트, “위험한 교회”,SFC,p,445.)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길로 걸어가기’가 주님의 걸어가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성도가 걸어가는 길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본문 9절을 다시 읽습니다.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 구절에서 저와 여러분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교훈이 발견됩니다.
구원의 근원이 되신 주님의 그 은혜를 받는 자는 분명한 전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께 순종하는 모든 자입니다.
순종이란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구원자로서 실천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이 걸으셨던 순종을 본받아 세속적인 사람들이 걸으려 하지 않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예배 큐티 시간에 생명의 삶 한절 묵상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도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입으로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항상 넓은 문으로 가려 한다면, 그 고백은 자기의 암시일 뿐 참된 믿음은 아닙니다. 값싼 복음은 달콤한 말로 구원을 약속하지만, 참된 복음은 우리를 희생과 갈등, 오해와 외로움이 따르는 좁은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생명의 삶, 2022년, 2월호, 두란노, p,111.)
인도 선교사이자 인도 첸나니에 있는 레이크뷰 신학교 교수로 사역하는 크리스토퍼 휴어츠가 대단히 중요한 성찰을 하나 독자들에게 던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쉽게 착각하는 세 가지의 속임수가 있다고 갈파합니다. (크리스토퍼 휴어츠, “눈뜬 자들의 영성”, IVP, pp,75-80)
①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는 거짓말.
② ‘내가 듣는 평가가 곧 나’라는 거짓말.
③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라는 거짓말.
기막힌 성찰이자 통찰입니다.
언제나 우리들은 나 개인에게 너그럽습니다.
그렇게 평가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휴어츠는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도 맞는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결코 내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절대적 기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내가 걷는 길이 옳은 길이 아닙니다.
주님이 걸으셨던 길이 옳은 길입니다.
내가 판단하는 생각이 정답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해 주신 것이 정답입니다.
대단히 불편하고 부담스럽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그 길에 천착하십시다.
주님이 걸으셨던 순종의 길이 저와 여러분을 살린 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 하나 나누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소그룹모임을 하는데 참여한 지체 한 명이 나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천국에는 이재철 목사님과 김기석 목사님만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순간 지체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한 사람 더, 이강덕 목사님도 계실 겁니다.”
듣다가 한참을 웃었습니다.
지체가 그날 이렇게 나눔을 한 이유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말씀대로 100%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속적인 가치가 점령한 이 땅을 살면서 어떻게 100%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다만 노력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렇게 완벽하게 살려면 김기석 목사, 이재철 목사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그룹 반에서 언급한 지체의 말이 어떻게 들리셨습니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지 않으십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동안 100%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설교를 맺으면서 저는 그래도 천국에 있을 가능성이 있는 목사라는 말에 힘입어 한 마디만 첨언하겠습니다.
실패할 것은 알지만, 또 넘어질 것은 알지만 주님이 걸어가셨던 그 순종의 길을 걸어는 가십시다.
이탈하지는 마십시다.
노력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김기석, 이재철, 이강덕 목사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인 공동체에 속해 있는 우리 모두가 그 나라에 안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주님이 가셨던 그 길에서 우리도 이탈하지 않으면 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거친 언덕길
지치신 주님의 음성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 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