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3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18) 본문: 히브리서 5:1-4 제목: 올바른 관계입니까? 서론) 예레미야 44:16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남 유다가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짓밟히고 초토화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가 4,600명이라고 예레미야 저자가 말할 정도로 유다다윗 왕조는 완전히 멸망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통치하기 위해 친 바벨론주의자였던 그다랴를 세워 총독으로 파송합니다. 하지만 그다랴 총독은 다윗가의 족속인 이스마엘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를 당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다랴 치하의 군 지휘관이었던 요하난과 기타 장교들이 이 반란에 동의하지 않고 그다랴 총독을 죽인 이스마엘에 대항하자 군사력에서 밀린다고 판단한 이스마엘은 암몬으로 망명합니다. 이 일로 인해 나라를 빼앗긴 유다의 정국은 지도자가 없는 대 혼란에 빠집니다. 요하난과 기타 군사 지도자들은 이스마엘을 축출하는 것 까지는 성공했지만 이대로 유다에 남아 있다가는 바벨론에게 다시 진압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피신할 것을 계획합니다. 헌데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요하난 일행이 추종자들과 이렇게 애굽으로의 망명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다 세워놓고 예레미야를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맞는 일인지를 예언자에게 물어보고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confirm (확인 도장 찍기)을 받고 싶었던 종교적 발상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들려준 소리가 정 반대의 메시지였다는 점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확인도장을 받으러 온 군사 지도자들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신탁을 전합니다. 예레미야 42:19-22절에 주목합시다.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두고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 너희에게 전하였어도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가서 머물려고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 혹을 떼려 온 자들이 혹 하나를 더 붙인 꼴이 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이 어떻게 나야하는 것이 정답입니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유다에서 정착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하난을 비롯하여 여사냐와 같은 군 지휘관들이 예언자 예레미야의 경고와 권면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결심한 뜻을 꺾지 않고 자기들의 고집을 실천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예레미야 44:16-17절입니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자기들의 계획을 이미 다 결정한 뒤에 하나님께 윤허를 받아내라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서 내증을 통해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고집과 생각을 관철하는 신앙의 행태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종교적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마그나카르타(대헌장)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을 유대인 랍비이자 철학자인 마틴 부버가 이렇게 패러디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갈파인 것이 분명합니다. “태초(처음)에 관계가 있었다.” (마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p,31.) 마틴 부버가 이 말을 한 배경은 ‘나’와 ‘너’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에게 작용하고 있는 ‘너’, ‘너’에게 작용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생명은 넘치는 근원적 관계로서의 ‘나’와 ‘너’의 관계임을 강조한다.”(위의 책, p,37.) 저는 이 문장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도 대단히 시의적절 하게 사용되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신앙의 정의도 곧 하나님과 나의 관계 설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백 번을 강조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의 시대에 종교를 대신하여 등극한 교리를 인본주의라고 정의합니다. “인본주의는 지난 몇 백 년 동안 세계를 정복한 혁명적 새 교리다. 과거에 장대한 우주적 계획이 인간의 삶을 부여했다면, 인본주의는 역할을 뒤집어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한다. 인간은 내적 경험에서 인생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끌어내고 있다.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하라. 이것이 인본주의가 우리에게 내린 제 1 계명이다.”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김영사, p,307.) 인간의 자유의지, 생각이 하나님의 자리보다 더 우월하다고 평가했고, 또 평가하라고 압박하는 시대가 인본주의라고 정의한 명제입니다. 오늘 설교에 국한하여 표현한다면 인본주의의 대명제는 이렇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요하난 일행이 자신들의 인간적 의지 계획을 이미 세워놓고 그 프로젝트에 날인하라고 압박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 바로 호모데우스 시대의 결론이자 정의라는 말입니다. 본론) 하나님은 모세에게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출애굽기 28:1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이렇게 세워진 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직책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소개됩니다. 본문 1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대제사장으로 세워진 아론이 해야 할 역할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중재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인간이 속죄 받도록 제사를 드리는 중재자가 아론의 역할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하나님이 택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었음을 본문 2절이 증언합니다.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인간의 속성을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로 정의합니다. ① 무식하다. ② 미혹되기 쉽다. 히브리서 저자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한 아론이 이런 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아론 스스로도 연약한 그 자체의 인간이었기 때문임을 분명히 합니다. 더불어 제사장이었지만 연약한 인간이었던 아론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자행된 본인의 속죄를 위해서 자신도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자였음을 3절에서 강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외가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본문 마지막 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인간이기에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에게 인간의 연약함을 아뢰고 대속의 은총을 얻게 해주는 대제사장의 직은 아무나 차지하거나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자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강력하게 천명합니다. 다시 말해 아론이야 말로 하나님이 불러 세운 대제사장이라는 영광에 오른 자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세웠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대제사장의 소속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음미합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이 구절을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각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 임명받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의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불러 세우신 이유는 인간에 의해서 파괴된 관계를 다시 설정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론은 이런 중재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대제사장은 그 인간의 나약함을 용납하는 동통의 감성을 소유하고 있기에 하나님과 무너져 있는 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이어주는 중재자요 가교의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아론만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2:9절을 아시지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베드로를 통해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전서 2:5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렇습니다. 아론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백성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다시 말해 저와 여러분들은 제사장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 된 우리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슬픈 사실이 있다. 일요일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신자들’로 가득 찬다. 그들의 교리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하여 알고, 예수에게 동의하지만 예수를 신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에서 그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꽃자리, p,210) 한희철 목사가 갈파한 글을 읽다가 목사로 살고 있는 나는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선 레이스가 한참입니다. 여야 후보로 나온 인사들을 보면 목사로서 당해야 하는 수치스러움이 극에 달해 분노를 넘어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당 후보는 기독교신자라는 이름을 갖고 살지만 다닌다는 교회에 7년 동안이나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아 제적 신자가 된 모양새고 어머니는 권사, 그 부인은 교회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반주자로 봉사했음을 자랑했지만 실상 그 당사자는 공인의 신분을 망각한 채로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일탈들을 서슴지 않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고, 야당의 후보라는 인사는 집에 성경이 너무 많아 몇 권이 있는 모를 정도라고 자랑질하고 천주교 신자 때는 암브로시우스라는 영세 명까지 받았다고 떠벌이고 있으며, 결혼은 스님이 중매해서 했고, 후보시절이나 검찰의 총수로 있을 때 정책적인 자문은 무속적인 성향이 농후한 현대판 머털 도사가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갈 때까지 다 간 세속적 랜덤 인생을 살면서도 신자 티를 내고 있는 저들의 행태를 보면서 목사로서 분노를 뛰어넘어 극도의 수치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교회를 우습게 여겼으면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관계란 1도 없는 자들이 신자 행세를 하고 있는가 하면 이런 자들이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하는 또 다른 부류들의 기독교적인 지도자들이 즐비하니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내가 반주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수 십 년 교회를 다녔다고 되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집에 성경책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대통령이 되었다고 되는 것은 도무지 아닙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올바르게 맺고 있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이자 축복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세운 금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절하지 않는 자는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께 절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절개를 지켜 거부합니다. 이들의 행위를 바벨론의 다른 관리들이 고발하여 이 세 친구는 풀무 불에 던져집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이렇게 던져진 풀무 불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다니엘 3:24-25절을 읽어드립니다.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이 구절을 남아프리카 공화국 신학자인 알란 뵈삭이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하나님은 불을 끄지 않으셨다. 그 이상을 하셨다. 하나님은 맹렬히 타오르는 화덕 속에 들어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함께 계셨다. 그리고 그들은 순종의 의미를 넘어 인간의 순종에 뒤따르는 신적 연대성의 기쁨을 발견했다.” (Allan Bboesak, "Walking on Thorns, WCC,p,32, 김기석, “하늘에 닿은 사랑” 꽃자리, p,594, 재인용) 이 글을 읽다가 한 구절에서 멈췄습니다. “신적 연대성”입니다. 오늘 설교의 레마로 바꿉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순종의 극치를 보여준 다니엘의 세 친구와 관계를 이어가셨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니코스 카찬차키스가 한 수도원을 찾았을 때 몹시 지친 수도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기진맥진해 보였습니다. 카잔차키스가 수도자에게 물었습니다. “수도자님! 아직도 사탄과 씨름을 하고 계십니까? 너무 힘들어 보이십니다.” “웬걸요, 사탄과의 씨름은 벌써 끝났습니다.” “아니, 그러면 누구와 싸우기에 그렇게 지쳐 있습니까?” “하나님과 싸우지요.” 대답을 들은 카잔차키스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싸운다니요? 감히 하나님을 이기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때 수도자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 지려고 싸웁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 지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꽃자리, pp,245-246.)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지는 것은 쉽지 않은 영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매일 묻고 성찰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왕 같은 제사장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찬양하겠습니다. 예수 하나님의 공의 예수 하나님의 공의 주 독생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예수 제물이 되신 주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나라 영원하며 그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네 예수 하나님의 공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