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30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16) 본문: 히브리서 4:12-13 제목: 말씀은 서론) 김기석 목사께서 지난 주간에 근래에 출간한 저서를 한 권 보내주었습니다. 시편 산책을 한 책인데, 책 속에 나오는 한 글을 교우들에게 읽어드리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뮌헨에 있는 프라우엔키어헤(성모교회)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나는 얼핏 게시판에서 알 듯한 얼굴을 본 것 같아 잠시 멈추어 섰다. 그 얼굴은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였다. 그는 현대철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인데, 게시판에는 그가 한 말이 적혀 있었다. 번역하면 이렇다. 나는 일생 동안 참 훌륭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속에서 시편 23편에 나오는 네 단어보다 내 마음을 더 고요하고 기쁘게 해 준 말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DU BIST BEI MIR.' 즉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말입니다." (김기석, "하늘에 닿은 사랑", 꽃자리,p,492.) 임마누엘 칸트는 자기의 전 인생의 여정에서 언제나 시편 23편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적용하며 살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2022년은 교회를 개척한지 14년이 되는 해입니다. 2008년 11월 초 어느 날, 하나님께서 득달같이 제게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서울로 교회를 옮길 것인가? 제천에서 개척을 할 것인가를 놓고 밤잠을 자지 못하던 그 어느 날이었습니다. 서울로 사역지를 옮기면 나름 안정적인 교단 목회자가 될 것이고, 제천에서 개척을 하면 광야 생활을 자초하는 것일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를 놓고 불면의 밤을 연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주께서 기도하던 제게 이전에도 그렇게 하셨던 익숙한 방법인 말씀으로 오셔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18:9-10절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고린도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단 한 명의 지인이 없었기에 외롭고 또 외로웠던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현현하셔서 격려하시고 응원해 주시며 하셨던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2008년의 그 어느 날, 하나님이 제게 오셔서 환상을 보여주셨든지, 아니면 제게 신비로운 그 무언가로 저를 사로잡는 정도의 만남이었다면 아마도 저는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는 사역자로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헌데 그날, 하나님은 제게 치명적인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했고, 지난 14년이라는 세월의 기간 동안 참 힘들었지만 세인지기로 지금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저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자도 있지만, 이 성에는 그래도 저를 돕는 하나님의 백성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그저 감흡(感吸)할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앞에 꼼짝없이 항복한 이유는 제가 오늘 교우들과 나누는 본문 말씀이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 남은 날의 시간 동안도 여전히 진행되었고, 되고 있으며, 될 것을 믿기에 다시 한 번 본문의 은혜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에 본문을 나누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한 번 더 묵상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말씀의 세밀성 때문입니다. 다시 12절을 곱씹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난 주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말씀이 살아 있기에 우리는 말씀대로 사는 크리스티아노스들이 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살아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 봐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단언해서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활력이 있어” 우리들이 읽고 있는 개역개정 판 번역입니다. 물론 개역개정판 번역이 문제가 있거나 오류가 있는 번역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번역은 개역 판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번역을 선호하는 이유는 ‘운동력’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에넬게스’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에넬게스’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이 그 유명한 ‘에네게이아’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 단어 ‘에너지’가 나왔습니다. 에너지가 무슨 뜻입니까? 네이버 사전에 나와 있는 해석이 이렇습니다. “인간이 활동하는 물리적, 심리적 힘” 그러나 저는 ‘에넬게스’를 하나의 해석을 더 첨가해서 교우들에게 그 뜻을 풀어 보겠습니다.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물리적, 심리적, 영적 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영역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 영적인 에너지를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습니다. 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②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③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대단히 적확한 이해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영적인 힘이 말씀이라는 의미는 사탄이 공격해 올 때 그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더 큰 영적 화력이 있는데 그것이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설명하는 메시지에서 유일한 공격용 무기를 검으로 묘사했습니다. 에베소서 6:17절을 봅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세속적 가치로 무장하고 사탄의 견고한 진에 빠져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검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우리들 중에 세속적 가치로 무장한 칼날의 공격에서 자유롭거나 안전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거나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연약한 당신과 나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김기석 목사의 글에 이런 갈파가 실려 있습니다. “오늘의 개신교회가 힘을 잃은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기준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기 때문이다.” (위의 책, p,453. 바꾸어 말하면 세상은 차치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고 떠벌이는 우리들조차 성공의 가름대와 지렛대를 세상의 것과 똑같은 것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히브리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인 유발 하라리가 인간의 끝이 과연 어디일까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한 뒤에 인간의 성공이 곧 재앙이 될 것임을 시사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해 볼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 올린 다음에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미래의 역사”, 김영사, p.39.) 세속의 가치가 하나님의 가치보다 더 뛰어난 가치로 둔갑되는 시대, 가인의 폭력이 정당방위로 변질되어 아벨을 살해한 것이 뭐 어떠냐고 대드는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호모 데우스’의 시대 즉 ‘신이 된 인간’의 시대인 작금입니다. 그래도 ‘생각하는 인간’의 시대인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는 희망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는 하나님의 된 시대로 돌입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 엄청난 괴물과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 무시무시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앞에는 세속적 칼날의 무자비한 공격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의 삶을 사는 한 백전백패입니다. 이 공격에서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수비용 무기로 장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자비한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공격용 무기를 갖추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바로 이 공격용 무기 장착이 바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검으로 삼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나아가십시다. 성도의 유일한 공격용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검으로 무장하게 되면 극복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음을 본문에 제시합니다. 다시 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세속적인 가치라는 인정사정없는 사탄의 공격으로 무참히 병들 수 있는 대상이 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격받아 상처가 난 내 영, 혼, 관절, 골수를 찔려 치료하는 능력(에너지)이 말씀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이 무참히 무너져갈 때 바로 이 내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고 헤아려 다시 일어서게 해 주는 영적 아딧줄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히브리서 4:12절에 가장 적합하게 치유를 받은 인물을 들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베드로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가야바에 뜰에서 예수님을 배신하는 과정을 마태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첫 번째는 모른다는 부인이었습니다.(마 26:70) 두 번째도 첫 번째의 반복이었습니다. (마 26:72) 세 번째 부인은 참담한 부인이었습니다. (마 26: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은 대단히 격정적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 바로 그 때에 닭이 울었다.” 이 정도라면 회복 불능의 베드로라고 보아도 무방한 참담함입니다. 헬라어 ‘카테나데마티조’를 번역한 것이 ‘저주하다’입니다. 허나 사실 이 단어는 더 극단적인 의미의 단어입니다. ‘자기를 불태운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저주에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확고한 임전무퇴의 의지가 자기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베드로가 어떻게 치료되고 회복될 수 있었을까요? 기막힌 반전이 이어지는 마태복음 26:75절에 담겨 있습니다. 역시 공동번역으로 마태복음 26:75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 베드로가 극적으로 회복의 은혜를 받게 된 반전의 포인트가 보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이 떠올라”입니다. 베드로를 다시 살린 것은 좌우에 어떤 날 선 검보다 예리한 운동력이 있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이 말씀 말입니다. 마태복음 26:33-35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오늘 히브리서 16번째 강해를 통해 주시는 레마는 이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영적 에너지입니다. 부산에 로고스 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기현 목사는 본인의 걸작인 ‘말씀 앞에 울다’의 프롤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독하게 썼다. 성경이 어찌나 나를 혹독하게 다루는지 거의 죽는 줄 알았다. 말씀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차 없이 내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있는 치부, 욕망, 약점을 건드렸고, 가족사도 파헤쳤다. 나는 아팠고, 피를 흘렸으나, 내가 이해되었고, 좀 더 사랑하게 되었다. 성경은 참으로 독하고 쓰디 쓴 약이다. 성경은 내게 그리했듯이 여러분도 마구 찔러 쪼갤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면 조금은 아플 거다. 그러나 아파야 낫는다.” (김기현, “말씀 앞에 울다.”, SFC,p,13.) 말씀 앞에서 치열하지 않는 자들은 그럭저럭 살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끄러운 구원 받음으로 만족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앞으로 더 치열하게 펼쳐질 호모 데우스의 시대에 그들이 구원 받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김기현 목사의 갈파처럼 죽을 만큼 나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말씀의 치열함이 없이 기분 좋은 말씀 선택하기, 귀에 듣기 좋은 사탕발림에 버금가는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축복의 말씀에 함몰되고 중독된 자들은 영적 에너지인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주어지는 감동적인 치유는 결코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죄를 용서 받게 해주는 돈으로 사는 죄 사면 용지였습니다. 무지한 중세 가톨릭 신자들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돈으로 면죄부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사제이자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이 가증하고 참담한 거짓 면죄부를 고발하기 위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당의 문 위에 라틴어로 종이에 쓴 95개 논제를 붙였습니다. 95개 논제를 요약하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모금 목적에 대한 이의 Ⓑ 연옥에 대한 교황관 부정 Ⓒ 죄인이 용서 받아 구원 받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 이후 루터는 서슬이 시퍼런 보름스 재판에 소환되었습니다. 루터의 파문하기 위한 종교재판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파문을 당하는 보름스 종교재판을 앞두고 있던 루터에게 사탄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루터에게 속삭였습니다. “너도 똑같은 죄인인데 무슨 자격으로 이런 죽을 짓을 해.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너는 살 수 있어.” 이렇게 종용하는 사탄의 음성을 듣고 루터는 낙심했습니다. 해서 포기할 것인가를 고민할 정도로 갈등이 심했던 루터에게 어느 날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루터의 귀에 메가폰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던 세미한 소리는 이것이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용기백배하고 이 말씀의 검으로 무장한 루터는 죽기를 각오하고 보름스 종교 재판에 참여하여 주장 철회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에 이렇게 단호히 선언합니다. “나는 성경에 굴복하며, 내 양심은 말씀 안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건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여기 서 있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참담한 신 사사시대이자 신 바벨탑 시대를 살고 있는 나와 당신을 살리는 유일한 영적 에너지는 살아 있는 말씀임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말씀 붙들고 우리도 루터처럼 이렇게 노래하십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