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6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14) 본문: 히브리서 4:1-11 제목: 흔들리지 말자. 서론) 창세기 2: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창조하셨고, 7일째 되는 날은 쉬셨다는 이해입니다. 헌데 2:2절의 표현은 이런 일반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어떤 뉘앙스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일곱 째 날도 일하셨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 대목입니다. 영어성경 NASB 버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by the seventh day God completed His work which He had don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done.” 직역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즈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셨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행하셨던 사역으로부터 벗어나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2:2절을 해석한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글이 의미심장합니다. “엿새 동안 창조가 이루어진 뒤에 우주에 무엇이 없었는가? 메누하(menuha-안식)가 없었다. 안식일이 되자 메누하가 왔다. 그리하여 우주는 완전해졌다. (중략) 일곱째 날에는 무엇이 창조되었는가? 평온, 고요, 평화, 그리고 휴식이었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안식”, 복 있는 사람,p,73.) 창세기 2:2절과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을 종합한다면 안식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산물이자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의의 클라이맥스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 직접 만드신 안식에 참여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작품인 안식을 결코 무시하거나 버려서는 안 되며, 그 안식 자체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재독학자인 한병철 교수가 갈파한 내용이 10여 년 전에 대한민국을 강타했습니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 p,23.) 한 교수가 이렇게 직격한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 개인적 판단은 이렇습니다. “이후 훨씬 더 심해졌다.” 펜데믹 3년차를 맞이한 2022년의 상태는 성과에 대한 요구가 더 강해졌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어떻게 하든 잉여의 결과물을 더 많이 내려는 조급함이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성과를 내기 위해 피로한 사회로 더 급속히 진입한 2022년 오늘, 본문은 그래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본론) 본문 1-3절을 다시 음미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이 구절 이해가 쉽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 보십시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대단히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합니다.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앞서 언급했던 창세기 2:2절에서 피력한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공동체의 불신앙과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3절은 지난 주일에 인용했던 시편 95:11절의 인용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출애굽 시기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렇게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실패의 역사에 대하여 두려워해야 함을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경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경종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희망을 선포합니다. 이 희망의 노래가 본문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분명히 선포한 메시지는 우리들은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저자는 바로 이 구절에서 언급한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가나안 입성’이라는 출애굽 당시의 약속에서 머물지 않고 조금 더 확장하고 있습니다. 양용의 교수가 해석한 1절 본문을 소개하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일곱째 날 하나님의 안식이 내다보았던 실체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인식이 궁극적으로 내다보았던 안식의 모형이었을 뿐이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종말론적인 안식이다.” (양용의, “히브리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 유니온, p,114.) 종말론적인 안식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내신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 구원의 감격 안에서 내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하면 2절 말씀의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선포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 실패했던 가나안 입성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 복음을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못해 실패했던 그 흑 역사를 두려워하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본문 4-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저는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한 이유를 앞서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단어가 7절에 두 번씩이나 삽입되어 있는 ‘오늘’이라는 단어입니다.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출애굽 시대의 공동체는 가나안 입성 즉 하나님이 이미 허락하신 안식의 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실패했지만 지금 이 글을 듣고, 읽고 있는 주후 60년대에 살고 있는 유대적인 전통을 버리기를 두려워하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인 너희들 독자들은 이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주후 60년대)은 결코 출애굽 시대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실패하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거나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죄를 범하여 주께서 들어오라고 초청하신 진정한 구원의 안식에서 탈락되지 말 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강하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 마지막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8-11절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 약속은 여호수아 시대에도 파기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파기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 일자를 ‘오늘’로 갱신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도착’과 ‘안식’의 약속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안식하고 계십니다. 이 여정 마치는 날, 우리도 틀림없이 안식할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서 마침내 안식처에 도착하도록 하십시오. 순종하지 않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주 선명하게 8-11절 본문이 들어옵니다. 정말, 우리들이 또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인 ‘오늘’도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안식의 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메시지이자 교훈입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레마를 받겠습니다. ※ 궁극적인 안식의 場에 들어가는 날까지 흔들리지 말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켜내십시다. 마가복음 7:24-30절로 교우들을 초대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로부터 잡종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심한 차별을 받았던 한 여인이 등장을 합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26) 수리아 베니게 출신의 여인입니다 마가는 분명히 이 여인을 헬라인이면서 수리아 베니게 지방 출신이었던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15장에서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이런 이방인 출신의 여인이 주님을 찾아온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적인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을 찾아온 이유는 단 한 가지, 귀신들린 딸을 고치겠다는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께 나아와 자신의 딸에게 침입해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청을 받은 주께서 그녀에게 되돌려준 반응은 매우 실망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이 구절이 주는 충격이 너무 커서 신약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변호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예수께서 그 여인을 시험하기 위함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예수께서 여인에게 한 이 말은 예수님의 독백이었다고 해석하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내놓기도 합니다. 제가 주석에서 본 또 하나의 참담한 주장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향하여 그 그릇된 의식에 사로잡힌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일부러 이런 퍼포먼스를 주께서 행했다는 해석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궤변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동의할 수 없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런 비인간적인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솔직하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모릅니다. 예수께서 왜 이리도 비정한 말씀으로 여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했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변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잘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그냥 여백을 남겨 두십시다. 다만 자위를 하자면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일어난 이런 담론에는 또 다른 이면에 은혜가 있다는 것으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대하셨던 주님의 싸늘한 반응보다 이어 등장하는 후속기사가 주는 메시지가 이 기사의 엑기스입니다. 마가복음 7:28-30절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저는 28절에 기록되어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이 신약성경에 언급된 신앙고백 중에 최고의 고백이라고 평가합니다. 아마도 마가복음 7:24-30절의 기사를 마가복음 저자가 복음서 안에 남겨놓은 이유는 예수님의 비정함이나 심지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신 예수님의 어록을 상기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담론의 복음서 삽입 이유는 여인의 신앙고백을 독자들에게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마가복음 7:29절을 복기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 구절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5:28절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렇습니다. 분명히 복음서 저자들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입에서 나온 위대한 신앙고백을 믿음으로 적용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수로보니게 여인의 담론 기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이야기입니다. 어떤 믿음이야기입니까? 치욕을 주고 있는 상대가 예수였지만 유일한 치유 자이신 그 예수만이 내 딸을 고쳐줄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는 믿음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믿음이야기입니다. 마가의 포석은 여인이 갖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부각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생명력이 무엇입니까? 나를 구원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생기는 능력입니다.다시 말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 받음에 대한 확실한 믿음입니다. 어떤 굴곡지고 어려운 상황이 나에게 임한다고 하더라도 나를 구원해 주신 주군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생명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최종적인 구원의 마침표인 궁극적 안식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음을 강력하게 피력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강력한 복음주의 설교자인 폴 워셔 목사가 이렇게 도발했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를 괴롭히는 가장 큰 해악을 극복하는 방법은 성경적인 구원관을 회복하는 것이다.”(폴 워셔, “확신”, 생명의 말씀사,p,32.)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해본다면 성경적이지 않은 구원관으로 인해 적지 않은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럴듯한 인위적으로 가공된 은사로 구원을 사버리는 성도와 그것을 부추기는 교회,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물질을 드려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무당 종교 보다 못한 잘못된 복을 전하는 오늘의 교회와 성도, 새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품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서 복음과 십자가의 진리 선포를 주저하고 반대로 귀에 달콤하게 들리도록 변질된 거짓 메시지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현혹하는 복음을 상업화하는 종교 장사꾼들이 즐비한 이유로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명심하십시다. 진정한 안식의 장으로 들어가는 믿음의 사수는 유사 믿음을 흉내 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믿음에서 1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베드로가 진정성 있게 고백했던 그대로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갖고 있는 자만이 궁극적인 안식의 장인 영적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있는 것임을.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일침을 소개하면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기독교회의 메시지는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면은 다른 여러 단체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곳입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 (마틴 로이드 존스, “히브리서 강해”, 복 있는 사람,p,61.)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이 메시지에서 흔들리지 마십시다. 이 복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다. 이 믿음에서 요동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믿음은 코로나 19 바이러스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성도의 무기입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예수께서 나를 위해 못 박히신 그 십자에게 못 박힌 교회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