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6:14 서론) 신념감사주일입니다. 세인 공동체에 성령 하나님께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2022년 52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약간은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친구 목사가 제게 작년에 사석에서 이렇게 충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의 글과 설교의 전반을 읽고 듣노라면 상당히 개혁적인 부분이 많은데 한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설교의 상당 부분에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인 아이든 토저의 글 인용이 많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정체를 밝혀라.” 농담 섞인 말로 제게 토설한 친구 목사의 이 이야기를 듣고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친구야, 내 정체는 예수주의자다.” 그 친구가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겠지만 신년감사주일 설교의 시작을 아이든 토저의 글 하나를 인용하며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기 위해 중요한 두 가지 조건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정체된 영성에서 벗어나려면 두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려면 완전히 세속적인 가치를 버려야 한다.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돌아서야 가능하다.” (아이든 토저, “십자가에 못 박혀라”, 규장,p,139.)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한 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미국교회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초청 받지 못했습니다. 두 번 다시 나를 초청하는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강해 설교자인 그를 미국교회가 초청하지 않았을까? 마틴 로이드 존스가 사역하던 그 시대에 미국교회에 불어 닥친 광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저는 이 광풍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easy believism(편하게 믿기)이 팽배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위의 책,p,13.) 로이드 존스는 초청받아 사경회를 인도한 교회에서 미국 사조와는 정 반대되는 불의 사자후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설교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2022년 신년감사주일, 저는 세인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전할 말씀의 제목으로 교회 1년 표어로 정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입니다. 본론) 우리 교회 1년 표어의 주제 절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너무나 유명하고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이 메시지를 2022년, 세인교회 주제 절로 정했습니다. 이제 이 주제 절의 의미를 공부하기에 앞서 잠시 갈라디아서와 관련한 성서 안과 밖의 정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라는 바울의 작품은 주후 49-56년 즈음에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의견을 모읍니다. 주후 49년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해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해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독교회의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의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할례 논쟁으로 충돌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교회의 수장들(예루살렘교회, 수리아 안디옥교회)이 모여 회의를 한 시기가 주후 49년입니다. 물론 제 1차 종교회의라고 할 수 있는 이 회의에 성령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구원의 조건으로 포함해야 하는 것이 할례라고 말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주장을 일축하고 할례논쟁에 대해 종지부를 찍게 하심으로 이방인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총회가 끝났는데 갈라디아 지역에 있었던 교회가 이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다시 할례논쟁에 불을 지피는 불온한 일이 벌어져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보호하고 변론하기 위해 쓴 편지가 갈라디아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6년쯤이라 한 것은 예루살렘 총회와는 별개로 바울이 사역을 마친 제 3차 전도여행의 끝 해인 56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여 잘 길러낸 이방 지역의 교회였던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 안으로 유대적인 율법을 버리지 못했던 할례주의자들이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일들을 목도하였기에 단호하게 복음으로 다잡이 하게 하기 위하여 쓴 편지가 갈라디아서라고 해석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전자든 후자든 공히 갈라디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반기를 든 자들이 벌인 행태에 대해서 바울이 최선으로 방어하고 공격한 기독교 복음의 절정을 선포한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적지 않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 성도들이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의 공격에 하릴없이 넘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떨어져 나가고 심지어는 배교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태의 엄중함을 느낀 바울이 서신의 대부분의 글을 명령형으로 기록하면서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결연함으로 갈라디아교회 안의 무너진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신앙의 사수를 선포한 것입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십자가 신앙을 사수하려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두 가지의 중요한 신학적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 나의 세속성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강력한 권면이 있습니다. 본문 후반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구절을 영어성경 NLT 번역으로 직역해 보겠습니다. As for me, may I never boast about anything except 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Because of that cross, my interest in this world has been crucified, and the world's interest in me has also died. “나에 관해서 말씀드린다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 관해 절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나의 흥미가 못 박혔기 때문이고, 내 안에 있는 이 세상의 흥미들이 또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보이십니까? 바울이 토로한 이 세상 안에서 볼 수 있는 흥미들, 동시에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흥미와 재미들이 무엇일까요? 세속성입니다.(SECULARITY) 바울은 이것들을 죽이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라고 힘차게 본문에서 역설합니다. 바울은 정말 쉽지 않는 영적 부담을 우리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줍니다. 다윗이 죽었습니다. 뒤를 이어 유다의 왕으로 등극한 솔로몬은 작은 아이였습니다. 육체의 외형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 비해 이모저모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미성숙의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죽고 왕위를 이어 받은 솔로몬의 심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두려움과 중압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2:1-4절입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솔로몬은 아버지가 살아생전 강하게 역설했던 유언을 생각해냈고 그대로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기브온에 있는 산당으로 올라갑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솔로몬은 그곳에서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일천번제가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현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왕상 3:5) 이 질문을 받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고백한 내용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듣는 마음’ (레브 솨마 즉 지혜로운 경청)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답을 들으신 뒤에 칭찬하셨습니다. 열왕기상 3:10-11절입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하나님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솔로몬이 장수, 부, 원수 멸함을 구하지 않았고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혹시나 하셨던 염려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개진한다면 바로 세속성이었습니다. 기우였습니다. 솔로몬의 구함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던 이유는 그가 세속성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감을 표하려고 합니다. 솔로몬의 이 마음이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11:9절입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슬픈 구절이 보입니다. ‘마음을 돌려’입니다. ‘돌려’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나타’의 원뜻은 ‘비스듬히 구부리다’라는 뜻입니다.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삐딱하게 서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것들이 눈에 보이면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삐딱하기 시작합니다. 솔로몬의 불행은 여기에서 출발했습니다. 펜데믹 하에서 성도가 정말로 예민하게 분별해야 하는 것은 세속성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의 말이 신년 벽두에 제게 다가와 복기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두 가지의 그릇된 기초가 있다. 첫째는 내 성취를 통해서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견해와 인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고, 둘째는 그것만이 중요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두란노,p,132.) 팀 켈러가 갈파했던 두 가지의 그릇된 사고가 무엇일까요? 세속적 성취와 만족입니다. 창세기 기자의 논거에 의하면 이런 종류의 세속성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마력에 매몰된 존재들은 나의 창조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구부러지기 시작합니다. 2022년, 세인 공동체는 솔로몬을 통해 얻는 그의 일생에 대해 반면교사를 삼는 영적 분별력이 있기 바랍니다. 세속성에 빠진 지체들은 반면교사 삼기를 바랍니다. 2)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와 성도가 되려면 십자가가 자랑이어야 합니다. 본문 전반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저는 바울의 이 고백을 담으면서 그가 얼마나 치열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는지를 가늠하는 지남철 같은 말씀으로 삼았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를 뒤돌아보십시다. 그가 십자가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였습니까? 그럴 리가요. 오늘의 언어로 환언하여 해석해도 천부당만부당한 발언입니다. 그는 출신성분에 있어서 진골, 성골출신입니다. 주후 1세기 팍스 로마나의 정치 제도권 하에 있었던 모든 피식민지 계층의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갈구하는 것이 있다면 로마의 시민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태어나면서 갖고 태어났습니다. 바울의 출생지인 길리기아 다소는 지금의 터키에 소속된 도시입니다. 로마의 속주였던 도시였습니다. 바울 역시 이런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기에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최고의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학력도 자랑거리였습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경제적인 뒷받침을 토대로 주후 1세기 최고의 유대교 학파인 가말리엘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을 마친 자였기에 그는 주후 1세기 강남 8학군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예루살렘 SKY 캐슬에 진입한 행운아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출신이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종교적 권력의 상층부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는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거리 천지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비한 주후 1세기 남성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만 더, 그는 종교적인 경험도 충만하게 체휼한 영적 실력도 있었던 자였습니다. 주후 1세기의 유대 종교적인 색깔이 진했던 그는 자기가 고백했던 대로 삼층천에 올라갔다가 왔다는 신비적인 경험을 토로할 정도로 유대교적인 영력도 갖춘 자였습니다. 바울, 참 많은 것을 갖추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이런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할례논쟁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자들에게 사자후를 토해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권위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서 치명적인 정치적 중죄인들에게 처해지는 사형법인 십자가형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자랑한다니 이게 어디 궤변입니까? 로마의 통치에 반항하는 자들에게 다시는 거역하지 못하게 하는 본보기 형인 십자가를 자랑한다니 이게 어디 말이 될 법한 고백입니까?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고 언급조차 기피대상인 십자가를 언급한 바울은 이렇게 토로합니다. 나는 그 십자가를 자랑한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바울은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까지 동원하며 갈라디아 교회의 배교자들을 비난했습니까?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는 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이었기에 오늘 본문뿐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2:20절과 고린도전서 2:2절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결론) 2022년이 밝았습니다. 끊임없이 공세를 가하고 있는 바이러스 대침공의 시기,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난 2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지나왔습니다. 수많은 실천신학자들과 교회 성장학자들이 대안을 제시하며 몸부림쳐왔습니다. 저 역시, 발등에 불 떨어진 형국이라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각론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펜데믹 하에 교회가 살아날 틈새가 보이니 따라 해보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었습니다. 제가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제가 기대하는 것은 각론이 아니라 총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2022년에 각론에 귀 기울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총론에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세속성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 박는 일입니다. 대신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장송곡으로 많이 부르는 찬송가 494장의 가사를 오늘 설교의 결론으로 음미하고자 합니다. 엄청난 위로와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터스 토플 레이디 목사가 만든 찬송가 494장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쉼이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 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살아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나는 2022년 우리 세인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아무 공로 없어 마치 빈 손 든 우리들이지만 주님 앞에 함께 나아가 십자가를 붙들 수 있도록 경주할 것입니다. 의가 없는 우리들이지만 주께서 아름답게 안아 주실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 우리 세인 교회입니다. 본회퍼가 쓴 ‘선한 능력으로’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네/ 그 크신 팔로 날 붙드시네/ 절망 속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는 주 얼굴 구하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 주 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 날/ 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