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3:7-19
제목: 오늘입니까?
서론)
신학교에 편입을 해서 첫 학기 때 배웠던 과목이 구약개론이었습니다.
당시 과목을 맡으셨던 교수님이 모세오경 중에 출애굽기의 개관을 설명하셨는데 제게는 아주 인상 깊게 남은 수업 중에 하나였습니다.
교수님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 중에 하나인 출애굽 사건을 예를 드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출애굽 사건을 해석하는 방법은 반드시 두 가지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① What did it means?
② What does it means?
교수님의 설명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it = exodus 라고 전제할 때, 반드시 두 가지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무엇을 의미했던 사건인지를 나에게 묻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요, 그 출애굽 사건이 오늘 나에게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고 답을 찾아야 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신학 중에 성서신학을 공부하는 자가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임을 강조하셨던 것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어제 우리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성탄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설교를 통해 교우들에게 선포했던 메시지의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주전 7세기와 6세기에 걸쳐 예언했던 예레미야 예언과 그가 경험했던 남 유다의 멸망이라는 기막힌 참담함이 과연 그 당시 유다 백성 공동체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심도 깊게 나누었습니다.
선민공동체였던 남 유다는 다윗 왕께서 세운 본인들의 나라가 할례도 받지 않은 야만 민족이나 다름없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뼈아픈 일이었는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고통이었음을 예레미야 예언자의 눈물로 부른 노래를 통해서 나누었습니다.
What did it means?를 살핀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성탄절 설교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의 노래는 유다 스스로 회복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군이신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호소한 메시지임을 나누면서 저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적용했습니다.
나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내 노력이나 내 의지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임을 선포했습니다.
What does it means?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까지 제가 피력한 내용으로 접근하도록 강력하게 유도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본론)
본문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7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브리서 저자는 성령이 너희에 이르신 바를 독자들에게 선언합니다.
성령이 너희에 이르신 바라는 범위는 3:7-4:13절까지입니다.
앞으로 살피게 되겠지만 이 범위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정황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쓰라리게 경험했던 출애굽 정황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구약성경 시편 95편에 있습니다.
시편 95편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살면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자행했던 한 사건에 대하여 고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시편 95:8-11절이 그렇습니다.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살았던 광야 사건 중에 불순종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므리바, 맛사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학자들은 두 장소(므리바, 맛사)에서 다르게 일어난 불순종으로 보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므리바와 맛사를 한 지역으로 보고 같은 사건으로 여기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제가 동의하는 후자를 택하여 해석하고자 합니다.
므리바, 맛사 사건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민수기 20:1-13절의 기록입니다.하세롯(므리바)에 도착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마실 물이 없자 그 고통을 토로하기 위해 모세와 아론에게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전에 해왔던 버릇대로 다시 이들에게 볼멘소리를 하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민수기 20:4-5절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 때가 이제 광야에서 생활한지 40년이 되는 시기였으니까 백성도 지치고 모세, 아론도 지칠 때 인 것이 분명합니다.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심판하심을 동시에 경험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였건만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나아지지 않은 이스라엘을 본 모세는 감정적으로 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도 인간인지라 이스라엘에 대한 미움이 싹튼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순간의 혈기를 잠재우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대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감정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해석하여 임의적으로 일을 자행합니다.
그 정황을 민수기 20:8-11절에 아주 소상히 기록합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의 행동과 말이 왜 잘못되었습니까?
민수기 20:8절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그런데 실상이 어떠했습니까?
민수기 20:10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나님의 명령은 무시하고 모세는 자기의 손을 들어 자기가 갖고 있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내신 물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이 창작해 낸 물로 둔갑시켰습니다.
혈기로 인해 불순종한 모세에게 내리신 심판은 12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어처구니없는 비극적 사건을 빗대서 학자들은 므리바, 맛사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동시에 자행한 불순종의 극치를 대변하는 사건이 바로 므리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시편기자가 95편에서 인용합니다.
어떻게 인용합니까?
시편 95:7-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시편이라는 시가서의 저술 연대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는 다윗 왕정 시대에 저술된 반면, 또 어떤 시는 포로기 시대에 저술된 것도 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하며 연대가 일정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접근 가능한 점은 시편의 저술 연대는 출애굽 연대보다 후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시편 95편의 저자는 본인이 언급한 7-11절의 정황을 출애굽 시대 후에 일어난 므리바, 맛사 사건이라는 정황을 인용하면서 What did it means?의 질문을 What does it means? 의 사건으로 체휼하여 오늘에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감동을 줍니다.
이것도 감동인데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주전(BC) 사건이었던 맛사, 므리바 사건과 시편 기자의 므리바, 맛사 사건을 주후(AD) 1세기의 사건으로 다시 적용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은혜의 적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후 1세기 인물입니다.
그가 같은 동시대에 살고 있었던 로마 근교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오늘의 적용을 강조합니다.
이런 감동을 준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 13절에서 정말로 너무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13절을 다시 읽어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주의하여, 죄로 인해 여러분의 대응능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쐐기를 박는 듯한 ‘오늘’이라는 단어의 강조점을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본문 15절에서 시편 95편을 인용하면서 그 강조점을 마무리합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자, 오늘 여기까지의 메시지를 통해 송년 주일, 주시는 레마를 삼겠습니다.
※ 배운 말씀이 오늘 나의 현장에서 나를 꿈틀거리게 하고 있습니까?
다시 재확인합니다.
2021년 지난 51주 동안 들었던 말씀이 52주 주일인 오늘도 나를 살리고 있습니까?
2021년 12월 26일 송년주일을 드리며 한 해를 마감하는 지금 이 시간, 지난 한 해 동안 들었던 말씀이 오늘도 유효합니까?
고린도후서를 통해 던졌던 메시지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세인교회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적용되고 있습니까?
수요일마다 주의 종이 기도하며 선포하고 있는 창세기의 말씀이 여러분의 길이요, 등으로 적용되어 오늘도 여러분의 길라잡이가 되어 비추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그 때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지 수 세기를 건너 뛴 세대에 살고 있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호들갑이지! 라고 반문하며 무감각한 상태로 버려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로고스 서원의 대표인 김기현 목사의 글 하나 소개합니다.
“굶고 있는 가여운 이들을 보고 예수는 어떻게 밥을 주겠냐고 제자들을 시험한다. 계산 빠른 빌립은 가진 것을 다 긁어모으고 거기에 더 보태도 어림없다고 보고한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니 7개월 치 월급이다. 그러나 빌립의 산수는 크게 잘못되었다. 한 가지를 빼고 계산한 것이다. 바로 예수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던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다.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정도를 넘어서 차고 넘치도록 채우실 예수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 있어도 예수가 없으면 다 없다. 다 없어도 예수가 있으면 다 있다. 이백 데나리온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부족하다.” (김기현, “말씀 앞에 울다”,SFC,p,109.)
소름끼치는 갈파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What did it means?를 오병이어라는 기적을 통해 주님이 묻고 있는데 오늘 여러분의 개인적 삶의 복판에서 전율하는 감동으로 What does it means?의 오병이어 사건으로 적용하고 있습니까?
15-18절 본문을 읽어보십시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95편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광야 공동체가 자행했던 죄악을 과거의 시점 그대로를 인용했습니다.
이렇게 비수를 던진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 마지막 절에서 본인은 물론 이 설교를 듣는 독자들에게 지금(오늘)의 관점으로 적용함으로 글을 맺고 있습니다.
다시 What did it means?를 질문한 뒤에 What does it means?를 다시 질문하고 있습니다.
19절 마지막 절입니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오늘 내게 적용하지 않는 말씀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소용이 있습니까?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는 유리관 속의 死文書로 성경이 사장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말씀이 적용되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오늘입니까?
결론)
이제 송년주일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서 애시(Arther Ashe)는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입니다. 그는 1960-70년대를 주름잡던 선수였습니다. 모든 테니스 선수들의 꿈인 그랜드슬램에서 세 번이나 우승을 했고, 그 중 한 번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에서의 우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그가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두 번이나 수술을 받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술 중에 잘못 수혈을 받아 에이즈에 걸리고 맙니다. 아서 애쉬는 1993년, 그의 나이 5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에이즈에 걸린 것이 알려졌을 때, 그는 전 세계의 팬들로부터 수많은 위로의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처럼 나쁜 병을 위해 당신을 선택해야 했습니까?’ 아서 애시가 에이즈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누군가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질문에 아서 애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명의 어린이들이 테니스를 배웁니다. 그중 50만 명이 직업 선수가 됩니다. 그중 5만 명이 리그전에 참여합니다. 그중 5000명이 그랜드슬램대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중 50명이 윔블던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중에 네 명이 준결승전에 진출하고, 그중에 두 명만이 결승전에 갑니다. 제가 윔블던에서 우승컵을 들었을 때, 저는 왜 접니까?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만일 제가 심장마비 혹은 에이즈에 걸린 것을 두고 왜 접니까? 라고 묻는다면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 라고 물어야 하고, 그것을 누리는 제 권리에 대해서도 질문해야 합니다. 1975년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한 그 다음날, 저는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하여 왜 접니까? 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만일 저의 승리에 대해 왜 접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면, 저의 실패와 재앙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 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김영봉,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IVP, pp,138-139.)
이 설교를 수년 전에 교우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며칠 뒤에 김지안 집사와 소그룹에서 나눔을 가졌습니다.
김 집사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설교 시간에 전해주셨던 아서 애시의 메시지를 듣다가 많이 울었습니다. 저도 사실 근래에 너무 많은 고통에 시달렸거든요. 그런데 받은 은혜에는 감사로 적용하지 못하면서 받은 고통에는 따져 묻는 저를 보면서 많이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회개를 하고 섰는데 그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천 세인 지체 여러분!
말씀을 적용하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나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메시지가 내 말씀이라고 인정하고 행동하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주의하여, 죄로 인해 여러분의 대응능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유진 피터슨 목사의 13절 메시지 번역이 엄청난 공명으로 울리는 송년주일입니다.
무감각하지 마십시오.
말씀 앞에서 우십시오.
바로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