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1일 주일 오전 예배 (히브리서 강해 7) 제목: 가볍게 여기지 말라 본문: 히브리서 2:1-4 서론) 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시인의 사연이다. 시인은 수년 간 남편 곁에서 병간호에 매달렸다. 남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병마와 싸웠지만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눈을 감았다. 시인이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낸 지 몇 달 뒤였다. 창밖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비가 내렸다. 시인은 두 손으로 빗방울을 받아내며 말했다. ‘여보, 오늘은 종일 비가 올 것 같아요.” (이기주,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황소 북스, p,58.) 저는 이 시인의 자전적인 글을 읽다가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움이 이론으로 표현될 수 있는 단어일까? 그리고 자답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그런 뒤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론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그리움이지만 그러나 느낄 수는 있다고. 어떻게? 빗물을 받아내며 오늘 종일 비가 내릴 것 같다는 동통(同痛)하는 마음으로 느낄 수는 있다고. 이 부부의 사랑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찰을 했던 저자였기에 위의 글을 소개한 뒤, 곧바로 다음의 글을 이렇게 소개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는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 아니다. 쓰라린 사연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상태다. 이는 공백이 아닌 여백이다. 공백과 여백은 엄연히 다르다. 공백은 애당초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므로 공란과 비슷한 반면, 여백은 곁에 머물던 무언가가 빠져 나간 후 채 가시지 않은 여운에 가깝다. 여백은 존재가 아닌 부재의 결과다. 만나고 헤어져야, 다가왔다가 멀어져야, 소유하고 있던 것을 잃어버려야 여백에 닿을 수 있다. 때론 눈물이라는 열쇠로만 우린 여백의 문을 열 수 있다.” (위의 책, p,60.)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2:42절을 읽어드립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린 예수님의 기도 내용입니다. 내용인 즉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처절함 그 자체의 기도였습니다. 죽기 싫다는 항변이 담긴 기도요 요청이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셨던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향한 호칭을 ‘파텔’ 즉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요청하는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어떤 마음을 가지셨을까요? 저는 이전 설교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가지셨던 마음을 한 시인의 시어로 대신 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고생했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주 아픈 날.” 페루에서 시성으로 불리는 세사호 바에호의 시어입니다. 김기석 목사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시평(詩評)했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픈 날,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날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신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김기석, “오래된 새 길”, 포이에마, p,237.) 적어도 우리들의 신앙적 자세는 하나님의 아파하심이라는 과정을 전제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무게감을 갖고 무장해야 합니다.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그 무게감이 구원의 은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은혜를 줍니다. 본론) 저는 지난주에 교우들에게 주군께서 들려주신 복음에 대하여 천착할 것을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주군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들려주신 복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응원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 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이 구절은 담임목사의 주석이 필요한 부분이라 설명을 보충하겠습니다. 2절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학자들은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통상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모세 오경 전체를 지칭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추론이 아니라 성경적 내증을 기초로 합니다. 사도행전 7:3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스데반의 설교 중에 나오는 메시지입니다. 이 구절을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의 조재천 교수가 이렇게 갈파합니다. “히브리서 2:2절에도 나오지만 시내산 언약 체결 시에 하나님에게서 모세의 율법이 직접 전달된 것이 아니라 천사가 그것을 매개하였다는 전승은 제 2 성전 시기 유대교에서 하나의 확립된 이해였다.” (조재천, “히브리서 연구”, 홍성사, p,51.) 분명히 제 2성전이 재건된 주전 516년 즈음부터 히브리서가 기록된 주후 60년대까지 유대적인 전승으로 계승되어 왔던 내용이 있었는데 바로 천사의 역할 중에 하나가 모세의 언약을 대신 받아 모세에게 전달했다는 사상이었습니다. 이 사상을 스데반도 설교에서 사용한 셈입니다. 유대인들이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천사들의 사역을 동원하여 본문 저자는 독자들에게 알립니다. 우리는 이미 1장에서 천사들은 숭배를 해야 하는 대상이 아님을 강력하게 천명한 히브리서 저자의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다만 극단적인 천사 폄훼가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 즉 유대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던 로마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는 민감한 테마인 것을 알았기에 천사에 대한 평가에 대해 연착륙을 시도합니다. 2절을 다시 목도합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 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봅니다. “지난날에 천사들을 통해 전한 메시지가 유효해서 아무도 피해갈 수 없었다.” 천사들을 통해 전해졌다고 믿는 시내산 율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는 행위, 순종하려고 했던 긍정적인 노력들이 있어 왔다는 것을 히브리서 저자도 인정한 셈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하여 더 강력하게 본질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권면한 내용이 바로 본문 3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앞 절 이해를 전제하니까 3절의 무게감이 느껴지십니까?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천사가 중재한 율법의 말씀 때문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율법을 위반하면 그에 상응하는 형벌이 내려진다고 믿었는데 하물며 천사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구원의 말씀을 가볍게 여겨 그 구원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를 강력하게 역설한 것입니다. 결코 구원의 메시지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종입니다. 더불어 구원 받은 것에 대한 감격을 소홀이 여기지 말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권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본문 4절에서 마치 쐐기를 박는 듯한 글을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구원의 메시지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보충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하나님도 응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응원하셨습니까? 아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일으키셨던 표적, 기사, 여러 가지 능력들을 함께 증언하셨다고 말합니다. 4절 하반절에 아주 중요한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헬라어 ‘쉬네피말튀레오’의 번역입니다. ‘누구와 함께 증언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아들입니다. 이렇게 문장을 만들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이룬 구원의 놀라운 사역을 표적(쎄메이온), 기사(테라스), 능력(뒤나미스)으로 뒷받침하며 함께 증언(응원)하셨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또 한 가지를 행하심으로 아들을 지원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바울은 성령을 통해 나누어준 것을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밝혔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바울에게 영향을 받은 제자이기에 동일하게 바울이 말했던 내용을 성령이 주셨던 여러 가지에 포함시켰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8-10절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상 본문의 내용을 종합하면 이런 결론을 응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역사하신 구원의 은혜를 어떻게 가볍게 여길 수 있단 말인가! 본문이 주고자 하는 레마를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 내가 받은 구원의 사건은 내 인생 최고의 은혜임을 잊지 마십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오늘 제가 설교하는 주제절이라고 할 수 있는 3절에 대해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아느냐를 묻는다. 이 복음, 이 큰 구원을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느냐를 묻는다. 이 복음이 너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해 주는지를 아느냐고 묻는다. 이 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 밖에 머무는 이유를 건드리고 있다.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답은 한 가지뿐이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무서운 상태인지를 깨달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히브리서 강해, 복 있는 사람, p,67.) 읽다가 밑줄은 그어 놓은 이유는 이 문장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영국에 살고 있는 무신론자, 그리고 기독교문화에서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영적인 하나님과의 엔-카운터를 경험해 보지 못해 출생 신고서에 ‘크리스천’이라고 부모들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전혀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스프링클 크리스천이라는 참담한 영국인들에 대해 선포하는 사자후가 로이드 존스 목사의 일갈입니까? 오늘 우리 세인교회 지체들의 영적 기상도는 어떻습니까? 2주에 한 번씩 팀 켈러의 ‘하나님을 말하다’를 나누는 지체들과 지난 주 세션에서 나눈 텍스트에서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私譯을 가미했습니다. “기독교신앙의 본질이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역사 때문에 얻는 구원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한 은혜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되었다는 믿음은 크리스천을 더 없이 겸손하게 한다.”(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두란노, p,107.) 왜 구원의 감격이 내 인생의 최고의 감격입니까? 구원은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정말로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전적으로 나를 건지시기 위해 계획하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5:1-20절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는 거라사 광인의 치유 기사입니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의 열거로 마가복음 5장에서 거라사 지방에 거주하던 광인을 만납니다. 평범한 것 같은 예수님의 이 기사는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너무 귀한 은혜가 담보되어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그림 설명)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약 56Km 지점에 있는 도시로 표시되어 있는 가다라가 보이십니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거라사‘라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에는 ’가다라‘라고 기록된 이곳으로 주님이 제자들과 이동하셨습니다. '가다라'는 갈릴리 호수의 남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10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이 지역을 주목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극도로 경계하는 이방인들의 지역이라는 해석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그 지역은 유대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에 관한 율법인 코세르(kosher)와는 정반대로 부정한 음식들이 이곳에서는 허용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갈릴리 맞은편에 위치한 이 거라사는 무덤이 산재되어 있었고 돼지, 귀신들과 같은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는 것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라는 설명이 통상적인 해석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토록 금기시되는 거라사를 왜 방문하셨던 것일까요?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곳에서 만나게 될 한 사람을 말입니다. 마가복음 5:2-4절을 읽겠습니다.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같은 기사의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8:28절을 보면 마태는 이 자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몹시 사나운 귀신들린 한 사람입니다. 누구도 접근하지 않으려던 그 사람, 모두가 이미 포기한 그 사람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의 귀신을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하시며 축사하심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주목하려는 것은 구원 그 이후입니다. 마가복음 5:16-20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한 사람의 구원 사건은 큰일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건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자 감격적인 은혜입니다. 이토록 큰 은혜를 가볍게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같은 교단에서 사역하는 장로 한 사람이 자녀의 결혼에 대한 소식을 SNS로 알려왔다고 합니다. 이 장로는 아주 먼발치에서 인사만 하는 처지였기에 자녀 결혼을 알릴만한 사이가 아닌데도 청첩장을 보낸 것이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친구 목사는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축의금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끝난 며칠 뒤에 단체 톡으로 축의를 전달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에 자기 이름을 포함시킨 채로 그 공간에 간단한 인사가 도착했는데 그 장로의 謝意가 적힌 의례적인 인사말을 보고 대단히 불쾌했다는 전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럴 사이도 아닌 내게 청첩장을 보낸 것도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지켜 인사치레를 했건만 그렇게 무더기로 보낸 명단에 자기 이름이 올린 채로 성의라고는 1도 없는 글을 보고는 다시는 상종하지 못할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라도 대단히 불쾌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예의가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중해 줍니다. 하물며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 그 분의 일하심 즉 구원해 주심의 감격을 등한히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의 절기에 본문 해석을 통해 곱씹으며 감사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일하심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가장 큰 감사의 조건이자 은혜의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가 받은 구원의 사건은 내 인생 최고의 은혜임을 잊지 마십시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