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 마가복음 4:35절 앞에서 오늘 성서묵상은 교회력 묵상을 하루 미루고 새벽예배 묵상을 나누어 보려고 한다. 지난 사무총회에서 나누었던 개회사에 인용된 텍스트가 오늘 새벽 묵상의 성서일과였다. 거라사에 살고 있었던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감동을 우리는 안다. 오늘 새벽 묵상에서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온 구절은 마가복음 4:35절이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편으로 건너가자’가 울컥하게 한다. 기득권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장소였기에 머물면 꽤 괜찮았을 그곳을 떠나자는 주님, 나는 이런 주님이 너무 좋다. 주님이시기에 이렇게 하실 수 있었다. 가장 얍삽한 자들이 살아가기 쉬운 현장이 오늘이다. 계산하면 할수록 유익과 이익이 보장되기에 그렇게 살기를 결심한 자들이 오늘 이 시대에 지천이다. 서글픈 것은 교회라는 공동체 현장도 세속적 현장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니, 더할 수도 있다는 데에서 절망을 느끼곤 한다. 이런 공식으로 계산하면 주님은 결격사유가 너무 많은 이였다. 결국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 빵점이라는 말이다. 시대착오적이고, 시대와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없는 반편이 주군이다. 이런 반푼이셨기에 주님은 저편 데가볼리 거라사로 가셨다. 제자들이야 적극적이었겠는가! 마지못해 따라갔음이 분명하다. 그땅은 금기시되는 땅이었기에 그렇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시면서 거라사로 행한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신 거다. 오늘 나는 세인 교회 공동체가 주님이 건너가자고 하신 ‘저 편’ 지향성이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내가 ‘저 편’ 지향성을 갖고 있다면 이건 최고의 복이다. 왜? 다른 이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에 그렇다. ‘저 편’을 향하자. 주님이 먼저 앞서신 저 편을. 질문해 본다. 내 신앙의 방향성이 이편(디베랴)인가, 저편인가(거라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