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목요일 성서 일과 묵상
내 창자가 들끓으니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148편, 예레미야 31:15-20, 마태복음 2:13-18
꽃물 (말씀 새기기)
예레미야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하나님이 선언하신 에브라임의 회복은 충격이다. 유다를 향한 절절함을 표하신 것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에브라임에 대해 성서일과와 같은 메시지를 선언하셨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이런 생각이 들까? 세뇌 때문이다. 구약성경안에 들어 있는 두 개의 역사서 기자들은 공히 유다 중심적 사관을 기록했고, 유다 중심적인 독식구조로 역사의 서술들을 기록했기에 상대적으로 에브라임이 폄훼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팩트다. 결국 주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국운을 다하게 되었던 에브라임은 이후도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고,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주후 1세기의 정황 안에서도 사마리아는 버려진 땅,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잡족 정도로 인지되던 땅으로 여전히 전락되었다.
아마도 철저한 승자독식구조로 해석한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도도한 흐름 안에서 에브라임은 그렇게 존재했고 또 존재하게 만들었던 아픔의 땅이다.
하지만 예언자의 소리는 신선하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들려진 신탁은 왠지 모를 감동을 선사한다. 흔하고 흔한 유다가 아닌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구애가 보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도 하나님을 행한 돌이킴을 결단했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렘 31:18)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라고 스스로 정의하는 에브라임,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 것이 너무 합당하다고 인정한 에브라임의 진솔함에 하나님은 마음이 녹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감동을 받은 하나님께서는 직접 당신의 언어로 예언자에게 신탁을 넘기셨다. 나는 오늘 성서 일과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의 소리에 울컥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20)
에브라임을 책망할 때마다 깊이 생각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토해내심이 가슴을 절절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생각하심의 결과물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이게 하나님의 본 마음이다. 하나님은 유다의 하나님이시지만 하지만, 동시에 에브라임의 하나님이시다. 기울어 있지 않다. 기울게 한 것은 인간이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남한을 향해 “상종하지 못할 대한민국 것들”이라는 거친 표현을 쓰며 악다구니를 퍼붓고 있다. 이에 질세라 남한은 북한을 향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험한 국가”라는 표현을 쓰며 드디어 공식 이별을 선언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을까? 참담하기 그지 없다. 핵을 쓰면 핵으로 공격하겠다는 으름장이 서로 간의 슬로건이 되었다. 갈마들며 엄포를 놓고, 相殘의 쓴 잔을 서로 마시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자들은 그 자들에게 혹여나 샴페인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줄기차게 삼페인 병을 공급하고 있다. 그런 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대한민국을 보면서 울고 싶다.
교회가 할 일이 있다. 서로 기름을 들고 불속으로 들어가려는 공멸을 주저하지 않는 남과 북이 분노를 풀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철저히 엎드려야 한다. 월남전에 직접 참전했던 바오 닌은 자신의 자전적 소설인 『전쟁의 슬픔』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좋은 전쟁도 가장 나쁜 평화보다 나을 수 없다.”
전쟁이라는 시나리오는 미적 감각으로 표현해서 안 되는 유일한 작품이다. 전쟁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사악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승자가 없다. 둘 다 철저한 패배자가 된다.
오늘 내게 에브라임을 향하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고 토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크게 공명되어 들렸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 나를 치명적으로 타격한 성서일과다.
두레박 (질문)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체휼하고 있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나부터 주께서 돌아서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주께로 돌아서자. 에브라임이 그랬던 것처럼.
하늘바라기 (중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