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엘리위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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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포이에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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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04-28 20: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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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위젤의 ‘샴고로드의 재판’(포이에마 간)을 읽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작가인 프리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밝힌 소회이다. “아우슈비츠에서의 내 경험은 내가 받았던 종교 교육 중 그 나마 남아 있던 것을 거의 일소해 버리는 것과 같았다. 아우슈비츠가 있다. 그런데 신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이런 딜레마의 해결점은 아직 찾지 못했다. 찾고 있지만 찾지 못했다.” 아우슈비츠는 인류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역사라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특별히 피해 당사자들인 유대인들보다 오히려 기독교신앙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더 무거운 멍에로 남아 있는 골치 아픈 과제 중의 과제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아우슈비츠에서 뭘 하고 계셨는가?, 그곳에서 당신의 선택된 백성들이 ‘최종해결책’(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쓰던 독일들의 용어), 특별처리(가스실 살해)를 당할 때 그 일들을 보고는 계셨는가?, 극단적으로 하나님은 과연 존재나 하시는 것일까? 등등의 비아냥거림에 대답해야 하는 것 말이다. 상투적이지만 아우슈비츠의 망령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마다 어김없이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교리를 총동원해도 녹록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이다. 신정론적인 차원의 교리적인 내용을 운운하더라도 궁색할 때가 많은 것이 오늘 현직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의 솔직한 심정이다. 일반적인 목회자들이라면 악이나 고난 그리고 기독교적인 위기에 즈음하여 기독교적인 성찰에 대한 관심은 비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질문 있습니다.
2년 전, 진도 앞바다에서 꽃다운 우리 아이들 400여 명이 수장되었다. 총체적인 인간 탐욕의 결과였다. 그 안에는 죄 없이 죽어가야 하는 아이들이 수백이었다. 동시에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수장되고 있는 아이들 중에는 살아생전 하나님을 바라보고 티 없이 미래의 꿈을 안고 살아가던 하나님의 자녀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들이 물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절규하며 고통스러워했을 것이 분명한데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묵묵부답하셨다. 도대체 하나님은 계시는 것이나 하는 것일까? 만에 하나, 계시다면 왜 당신의 백성들을 외면하신단 말인가?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학자라고 불리는 CS 루이스가 했던 말을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시는 분은 아니다. 이것은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중략) 상호 모순되는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약한 피조물도 할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도 하실 수 없다.” 서평자는 루이스의 갈파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런 해박한 해석을 내려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다. 만에 하나, 루이스의 말대로 적용한다면 세월호에 무리하게 적재하여 배가 침몰하게 만든 천박한 자본주의의 오너들의 말도 안 되는 일에 하나님이 간섭하실 이유가 없음에 대하여 쌍수를 들고 인정한다. 국가라는 조직이 자국의 국민을 보호하는 데 총체적인 부실로 인해 실패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하나님이 그 일에 간섭하실 이유가 없다는 데에 조금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동의한다. 그러나 서평자 역시 이런 대학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배 안에 있는 아이들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외면하신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명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오히려 에모리 대학 내의 켄들러 신학대학원에서 교수하는 토마스 롱의 답변이 더 솔직해 보인다. “하나님의 원수인 이것(악의 제반적인 해석, 의인의 고난, 기독교적인 위기 등등-서평자 주)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우리의 빛이 어두움을 일부분만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기꺼이 인정해야 하며, 악의 근원에 관해 어느 정도 불가지론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신실하게 사는 자가 당하는 비참한 고난과 악의 극점에 있는 자들의 승승장구라는 이 상반된 모순 앞에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허용하셨는지에 대한 답변으로는 오히려 이것이 더 정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어 롱의 의견에 서평자 또한 기울어졌다. 궁색한 말 돌림, 어리숙한 궤변으로 루이스의 말대로 인용한다면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섣불리 단정하고 확정짓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지성적이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기력을 비추어 지는 전술한 화두들은 신정론적인 차원에서 계속 고민하고 묻고 또 질문해야 하는 기독교적 지성의 물음이어야 한다. 딴죽 걸기가 아닙니다. 엘리위젤은 바로 이 점에 천착했다. 그는 본인 스스로가 경험했던 아우슈비츠에서의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재에 대하여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저자는 본인이 경험했던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이 희곡을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지방에 한 시골 마을인 샴고로드의 여관에 음유 시인이 세 명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떠돌이들이었는데 이방의 땅에서 음식을 얻을 요량으로 여관 주인에게 공연을 해주겠다고 말하고, 여관주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심판하는 연극을 조건으로 그들의 요청을 수락한다. 연극이 시작되자 여관주인 베리쉬는 하나님을 재판석에 앉혀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죄하는 검사의 역을 맡는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것은 그가 살고 있었던 샴고로드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절기인 부림절 축제 때 경험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비극 때문이다. 하만의 흉계로 인해 떼죽음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었던 바사 땅의 유대 공동체가 에스더의 지략으로 인해 위기를 벗어나 도리어 하만에게 역전승을 거둔 것을 기뻐하는 절기인 부림절에 샴고로드에서는 반대의 비극이 일어났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학살당하고, 베리쉬와 그의 딸 한나 만이 살아남았는데 한나는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윤간을 당했다. 이로 인한 충격으로 그녀는 심각한 정신적 질병을 걸린 상태이다. 그날의 악몽은 무시무시했다. “세 채의 성경 연구소는 허물어지고 약탈당했소. 대회당은 불에 타 전소됐소. 성경은 신성모독을 당했소. 이 잔해들은 사실이 아니오? 잿더미가 사실을 밝히 드러내고 있지 않소? 그리고 그마저도 불구가 되고, 못쓰게 되고, 기쁨과 희망을 빼앗겼소.”(p,145) 검사의 역을 맡은 베리쉬가 기억하고 있는 비극의 언덕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베리쉬는 이 사건을 기화로 하나님을 향한 얼굴을 돌리고 그를 거부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철저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믿었던 하나님에게 쓰라린 배신을 당했지만 그 배신자 하나님에게 이렇게 철저하게 응징할 것을 토로한다. “난 유대인으로 살았고, 죽는 것도 유대인으로서 죽을 거요.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내 마지막 숨을 다해 신에게 큰소리로 시위할 거요. 그리고 끝이 가까웠으니 난 더 크게 외칠 거요. 그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유죄라고 그에게 말할 거요!”(pp,182-183) 위젤이 베리쉬의 이 저항적인 하나님께 대한 독설을 통해 하나님을 응징하는 기법으로 사용한 것은 그가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던 지우려고 해도 결코 지울 수 없는 견고한 트라우마에 기억 언저리에서 도리어 신의 임재를 얼마나 간절하게 요구했는가는 보여주는 기막힌 역설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 희곡의 후기를 쓴 세계적인 영성학 교수인 매튜 폭스는 이렇게 갈파했는데 서평자는 깊이 동감했다. “존재와 저항, 이것들은 신의 현존의 증거이다. 아무리 그 현존이 때로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지리도 말이다. 신은 신의 역사와 피조물이 살아있는 곳까지만 이 땅에 살아계신다. 신은 인간이 존재와 저항을 모두 신의 이름으로 할 때까지만 존재하시고 저항하신다.”(p.212)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폐쇄적인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 상당수의 한국교회가 천박해진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저항, 하나님께 대한 질문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적인 성경 해석을 틀로 무소불휘의 힘을 휘두르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불온한 생각, 질문, 이견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봉쇄수도원이다. 지적인 사유함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또 외면시킨다. 이것은 그들만의 리그로 교회를 추락시키는 결정적이 요인이다. 노틀담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마크 A, 놀은 이렇게 복음주의 교회의 지성적 스캔들을 지적했는데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지성을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인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선한 불온함이다. 이 불온함은 딴죽 걸기가 아니다. 이 불온함은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만드는 지성적 성찰이다. 이 지성적 성찰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를 가볍고 영악하게 만드는 딴죽 걸기이다. 완벽하게 보이는 것을 조심하라.
엘리 위젤의 천재성을 드러낸 이 희곡의 또 다른 압권은 샘의 등장이다. 샘은 하나님 재판정의 변호사이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 전체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전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캐릭터를 갖고 등장한다. 그런 반면, 유일하게 하나님에 대한 자칭하여 변호를 하겠다고 나선 셈은 무서우리만큼 냉정한 이성으로 하나님을 변호하는 탁월한 인물이다. 여관의 여 종업원인 마리아가 이미 애정을 갖고 있었던 사람, 그러나 철저하게 그에게 버림을 받았던 경험이 있었던 마리아는 그가 하나님에 대한 변호를 맡는다고 할 때 그는 사람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소리를 쳤지만 이어 활약하는 샘의 변호는 괄목할만하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완벽한 논리로 하나님을 변호한다. 베리쉬는 하나님이 샴고로드에서의 학살을 보고만 있었던 것은 인간의 정의를 말살한 것이라고 공격하자, 샘은 베리쉬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라고 독설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존재가 아님으로 그를 끌어내리지 말라고 변호한다. “신의 정의를 당신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싶다는 겁니까? 당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p,145) 검사 베리쉬는 샴고로드에서 일어났단 일에 대하여 다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을 학대 죄, 무관심의 죄로 고발하자, 샘은 증거를 대라고 말한다. 이에 발끈한 베리쉬는 샴고로드의 모든 마을 주민들이 학살을 당하고 우리(베리쉬와 그의 딸 한나)만 살아남은 것 그것이 그 확실한 증거라고 대든다. 이 장면에서 변호인의 변호는 서평자도 속을 뻔했던 기막힌 변론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오, 전 그 사건들에 대하여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그것들이 우리 앞의 사건들과 매우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피가 흐르고 삶이 짓밟힌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책임일까요? 결국 제게는 이 상황이 찬 단순해 보입니다.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집단학살을 당한 거지요. 그들의 신(하늘 아버지)을 왜 끌어들이고 연루시키는 겁니까? (중략) 인간이 서로를 죽일 때, 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그 분을 살인자 사이에서 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을 희생자들 사이에서 찾습니다.” (pp,146-147) 서평자가 속을 뻔했던 이 장면은 아마도 이 희곡에서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왜?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교묘하게 추락시키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샘의 발언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인되고 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나약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샘이 유도한다. 그의 논리를 빈틈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난도질하고 있다. 희곡의 전반에서 샘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변호한다. 그에게 있어서 재판석에 앉아 있는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시고, 그 분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존재로 부각된다. 이것이 위젤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샘은 이런 완벽한 논리의 하나님 변호를 맡았지만 희곡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정체를 드러내는 반전을 보여준다. “날 성자, 의인으로 착각했나? 나를? 어떻게 그렇게 아둔할 수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나? 알기만 했더라면. 너희들이 알기만 했더라면….”(p,188) 위젤은 이렇게 지문을 통해 이 희곡의 막을 내린다. “사탄이 웃고 있다. 그가 신호를 주듯이 팔을 치켜든다. 바로 그 순간 마지막 촛불이 꺼지고 문이 열린다. 동시에 귀가 터질 듯한 살기등등한 함성이 몰려든다.”(p,188) 청파교회를 시무하는 김기석 목사가 쓴 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구절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守拙(수졸)이란 단어를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拙(졸)한 것은 교묘한 것의 반대이니 수졸이라는 것은 조촐함을 지켜가는 것이겠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완벽하다는 확신이다.” 읽은 글 내용의 출처가 분명하지 않아 각주를 소개하지 못하지만 이런 류의 가르침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완벽한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말은 그래서 항상 가슴에 담겨 있다. 보폭을 넓히면 하나님의 임재는 더 황홀하다. 위젤의 작품을 더듬다가 현직 목사로 사역하는 서평자의 천박함을 보았다.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참 많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어느새 길들여져 있는 도그마틱한 내 모습 말이다. 해서 항상 이분법적으로 혹은 흑백논리로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서게 만드는 일들을 현장에서 많이 저지르는 서투름이 너무나 많다. 졸한 것은 비난하고 화려한 것은 따라가는 그런 류의 천박성 말이다. 목회의 연륜이 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영악하지 않게 하옵소서! 인데 더 영악해지는 내 모습이 참담하기까지 하다. 위젤의 호소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이 당신들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왜 침묵하고 있었는가? 에 대한 고소였는가? 일반적인 견해들은 이쪽으로 기울고 있겠지만 서평자는 전혀 다른 모습을 제기하고 싶다. 하나님께 대한 불온함이 더 정직하고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 불온한 생각 말이다. 너무 수구적으로 무조건 아멘하게 한 죄가 서평자를 비롯한 상당수의 가르치는 자들에게 있다. 신학교 시절, 조직신학 시간으로 기억된다. 삼위일체를 열강하시는 교수님의 진정성과는 상관이 없이 서평자는 삼위는 이해가 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삼위가 일체가 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았다. 해서 교수님께 무례를 무릅쓰고 질문했다. 믿어지지 않음을, 돌아온 것은 참변이었다. 믿음이 없는 신학도, 심지어는 서평자의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무서운 말도 들었다. 그래도 양심 고백한다. 삼위일체는 지금도 이론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음을. 다만 신앙의 고백이라고 하니까 물러선 것뿐이지. 서평자는 어줍지 않은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저자의 속내를 한 번 들추어 보고 싶은 객기를 느꼈다. 엘리 위젤이 왜 천재적 작가로 각광을 받을까? 하나님의 임재를 상투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는 보폭을 넓혔다. 저항과 불온함과 질문함으로. 그리고 그는 나름 이렇게 본인의 사고를 남겨놓은 듯하다. “중립으로 남지 말고 보폭을 넓혀라”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체휼하게 됨을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