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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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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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04-07 21:3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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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창비 간, 2014년) 앞서 자식을 보낸 이들 지난 달, 89세의 생을 마감하신 어머님의 유골이 담긴 봉안함을 가지고 장의차에 몸을 싣고 이미 8년 전 모셔져 있는 아버님의 납골함이 있는 이천 호국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는 도중, 치매로 8년 동안이나 고통을 받고 계신 어머님의 수발을 다 들며 고생한 누이 옆에 앉아 훌쩍였다. 지방에서 목회를 한다는 핑계로 당신에게 자식다운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못했던 불효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하여 훌쩍이는 서평자에게 누이가 이렇게 말했다. “막내야, 울지 마라. 어머니처럼 호상이 어디에 있니? 엄마 말이면 껌뻑 죽는 흉내까지 내던 자식들 배웅 받으며 떠나셨고, 말년에 치매로 고생은 하셨지만 앞서 보낸 자식 없이 구십 평생을 사셨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으니 이처럼 복된 죽음이 또 어디에 있겠니?” 누이가 말한 ‘앞선 자식 없이’라는 말이 오늘 서평을 쓰는데 왜 이리 절절할까? 이 땅에 존재하는 정상적인(내가 정상적인 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아주 가끔은 아니 요즈음은 조금 빈번하게 엽기적인 비정상적 부모들이 있기에)부모들의 소원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자식을 앞서 보내지 않는 것이리라. 서평자는 한강이 쓴 본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36년 전 광주라는 대한민국의 영토에서 당신들이 낸 세금으로 입히고 먹이고 재워주었던 이 땅을 지키는 일부 군인들에 의해 영문도 없이 생떼 같은 자식들을 앞서 보내야 했던 부모들이 부지기수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겪었던 너무나도 엄청난 고통을 통절하게 느끼며 이렇게 고개를 숙이며 나는 사족을 남겼다. “1980년 5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생각해보니 무통(無痛)의 죄인으로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인. 한강은 나에게 너무나도 그 부끄러웠던 과거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그래서 그 상처는 식은땀 나게 더 아팠지만 한 가지의 치유를 받았다. 잊지 않겠다는 치유 말이다. 역사가와 역사적 팩트는 오늘도 대화한다. 그래서 역사는 두렵고 떨리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소년이 온다.’는 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차라리 꿈이라면 좋겠네. 소설의 제목이 왜 ‘소년이 온다.’일까? 여러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서평자는 소설의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동호와 정대의 한(限)을 풀어주기 위한 저자의 감정이입이 가장 강했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하고 싶다. 가장 꿈 많은 중학교 시절, 동호는 도무지 무엇인지, 어떤 일인지, 왜 이런 일이 내 고향에서 일어났는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눈으로 보고 있다. 소설은 동호가 학교 친구인 정대가 평온한 자기의 고향 빛 고을에 완전군장을 한 군인들이 내려와 무자비하게 총을 쏘는 총질에 맞아 죽는 것을 보았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너무 엄청난 일이 벌어져 그 자리를 도망한 동호는 이후 정대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몰라 상무관으로 실려 온 또 다른 시신들 중에 친구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일 뿐 정대의 시체를 군인들이 유기되어 불에 태워져 매몰되었음을 가히 짐작한다. 저자는 이렇게 시작한 소설의 주인공들을 적나라하게 소개하는데 그녀의 서술이 소름끼치게 사실적이다. 이게 대한민국이라는 내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맞아! 라고 정말로 고개를 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하지만 1980년 5월, 남도 광주에서는 백주에 자기가 사랑하는 조국을 지켜달라고 세금내고, 위문편지를 받게 해주었던 자들에 의해 거꾸로 죽임을 당하는 살상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80학번인 서평자는 휴교령으로 인해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신세였다. 다만 방송에서 나오는 아나운서 멘트는 광주는 지금 폭도들로 인해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는 말, 폭동 진압을 위해 정부는 군인들을 보냈다는 말, 광주의 이 폭동은 고정간첩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이 저지른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말, 이제 내람에 버금되는 이 폭동을 충성스러운 군인들이 진압하게 될 것이라는 말, 선량한 시민들은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집에서 나오지 말라는 말 등등의 언어로 세뇌되고 있을 때 작가의 말대로 그렇게 정대는 죽었고, 정미도 행방불명되었고, 죄 없는 민초들은 이유 없이 죽어야 했고, 동호는 미친 아이처럼 친구를 찾았고, 생떼 같은 아들, 딸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부모들의 비극의 현장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헤롯에 의해 베들레헴과 주변에 있었던 두 살 아래의 남아들이 떼죽음을 당할 때의 통곡처럼, 빛 고을도 그런 호곡이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들은풍월로 당시 상황에 대한 정부의 보도 내용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광주에서 이 정도의 비극적인 살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설마 했던 그 무통의 무감각 때문에 그 일로 인해 심장으로 부끄러워 울었다. 마치 오바댜의 예언에 나오는 에돔이 남쪽 유다를 향하여 지었던 방관의 죄를 지은 공범자 같아서. 그래서 그랬나! 안치환의 노래 가락이 생각난 것이.
“차라리, 꿈이라면 꿈이라면 좋겠네!”(안치환의 Still I Believe 중에 실린 ‘악몽98’에서) 현재진행형이라는 아픔이 더 쓰리다. 저자 한강은 참 잔인하다. 어쩌면 이토록 시리고 아픈 이야기를 포장 없이 그릴 수 있었지. 숨기고 싶지 않았을까! 광주 전 시민의 인구가 40만 명인데 계엄군 공수부대원들에게 80만 발의 실탄을 지급한 저 짐승보다 못한 이들의 편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한 자들의 아픔이 너무 커서 말이다. 예상은 빗나갔다. 작가는 용감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 아픔을 소년의 참담한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과감 없이 발가벗기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들의 몸에 달라붙어 썩어가던 피 묻은 옷들이 가장 먼저 타서 재가 되었어. 다음으로 머리카락과 잔털들이, 살갗들이, 근육이, 내장이 타들어갔어. 숲을 집어 삼킬 듯 불길이 치솟았어. 대낮같이 공터가 밝아졌어. 그 때 알았어. 우리들을 여기 머물게 했던 게 바로 저 살갗과 머리털과 근육과 내장이었다는 것을. 몸들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인력이 빠르게 허약해지기 시작했어. 덤불숲 사이사이로 물러나 서로의 그림자를 스치고 기대며 우리들은, 우리들의 몸에서 뭉클뭉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를 타고 단숨에 허공으로 솟아올랐어.” (pp.61-62) 총에 맞아 죽은 동호의 시신과 함께 뭉쳐 있는 또 다른 시신들이 불태워지는 장면을 여과 없이 서술하고 있는 한강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솔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경찰서로 끌려가 사상적인 불온함을 미끼로 김은숙이 맞은 7대의 뺨이 고발될 때, 나는 광대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체감했다. 더불어 1980년대 신군부 시대의 폭력이 그녀의 뺨을 한 대씩 때릴 때마다 오롯이 무감각했던 나의 혈관이 터져 핏덩이가 솟아오르는 대리적 고통을 느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잔인한 물리적 힘과 공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에 의해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 여성으로서의 사형선고를 받고 선주, 영화 ‘남영동 1985’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현란한 고문 기술자들의 잔치에 끌려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나왔지만 결국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망신창이의 삶을 살다가 자신의 굴곡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진수 등등의 출연진들은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지만, 서글픈 것은 지금도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그 잔인하고 화려한 외출을 사인한 자들이 버젓이 살아 숨을 쉬고 있고, 그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제 2의 동호, 정대, 정미, 선주, 진수는 현재진행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해야 하는가? 역사란 무엇인가? 의 저자 E.H 카가 이렇게 갈파하지 않았는가?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과거이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은 만일 역사가가 그것의 배후에 있었던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역사가에는 죽은 것 즉 의미 없는 것이다.” 나는 카의 통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과거의 역사 중에 죽은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역사를 죽이려는 불온한 기득권 세력들이 있을 뿐이지. 소년들을 잠들게 하자.
36년 전, 빛 고을에서 일어난 이 기막힌 한국현대사의 핏빛 일들이 역사가들에 의해서 재조명되고 또 재조명되는 일들이 사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지성인들의 최소한의 양심이요. 일인 듯하다. 만에 하나 그 때의 일들이 왠지 지금의 정권처럼 자꾸만 희석시키려는 의도들이 있을 때마다 그 권력의 의도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지성적 성찰을 양보한다는 뜻이며, 지금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무시해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 행위의 변화는 그의 개인적 통찰력의 결과”라고 한 오스트리아 신학자 이반 일리히의 말은 36년 전에 이 땅에 남녘에서 인간백정들이 벌인 가공할만한 비인간적 행위의 극치를 잊어서는 안 되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지성적 근거이다. 한강은 이 일에 앞장섰다. 작가는 2009년 용산의 한 망루에 올라가 있었던 사람들을 다시 불타는 것을 보면서 소설에 기록한 일들을 다시 한 번 보는 것 같아 이렇게 자탄했다. “저건 광주잖아!”
아직도 이 땅에는 소년들이 수없이 오고 있다. 그들이 오는 모습은 섬뜩하다. 이유는 왜 소년들이 자꾸만 오게 하는지를 오늘 나에게 묻는 것 같아서. 더 두려운 것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의 작품 ‘채식주의자’로 근래에 세계 3대 문학상 중에 하나인 멘부커상 후보자가 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다. 만에 하나 저자가 이 상을 탄다면 그 상을 혹시 망월동에 있는 제 2,3,4의 정대 묘비에 앞에 올리지 않을까 싶다. 두 번 읽고 싶지 않은 책, 그러나 여유가 있으면 다시 촉촉한 눈으로 읽게 되는 ‘소년이 온다.’를 80년, 광주에 파견되어 총질한 그들과 그들의 총질을 당당하게 사인한 이 땅에 호흡이 있어 숨 쉬고 있는 자들이 꼭 한 번 읽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읽는 독자들은 꼭 한 번 질문해 보시라. 소년들을 잠들게 하는 날이 과연 올까를. 유감스러운 것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보면 당분간 소년들이 계속 잠들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