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나쓰메 소세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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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문예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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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02-24 23:5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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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은 당시 도쿄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신분이었던 첫 번째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를 통해 시작된다. 나는 우연히 가마쿠라 해변 가에서 두 번째 화자가 되는 선생님을 만난다. 이후에도 왠지 모를 선생님에 대한 신비감과 호기심 때문에 도쿄로 돌아와서도 선생님의 집을 집요하게 방문하며 들락날락하는 친밀한 지인이 된다. 그렇게 선생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어느 날, 나는 때마침 아버지가 심각한 신장질환으로 인하여 시한부 선언을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전갈을 받는다. 해서 대학을 졸업하기 전 방학 때는 물론, 졸업 이후에도 직장을 잡기 이전인 탓에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혹시 모를 임종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날이 아버지의 상태가 매우 위중해져서 옆에서 임종을 준비하는 어간, 도쿄로부터 발송된 장문의 편지가 담겨 있는 우편물이 하나 나에게 전달되었다. 선생님의 유서였다. 너무 충격적인 우편물을 보는 순간, 유서의 내용을 읽기도 전이었고, 아버지의 죽음이 분초에 달려 있어 고향 집에서 떠날 수 없는 긴박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에 있는 선생님으로부터 온 소포 한 면에 이 편지를 받을 때 즈음이면 선생님이 죽고 난 뒤라는 암시의 글과 조만간 도쿄에 와서 아내를 건사해 줄 것을 당부하는 긴급한 전갈의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임종을 포기하고 도쿄행 열차를 탄 뒤에 선생님이 보낸 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 유서 안에는 선생님에 대하여 내가 그동안 품고 있었던 모든 호기심과 신비했던 것들의 옹골찬 해답들이 들어 있었다. 유언을 남긴 두 번째 화자이자 ‘나’인 선생님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고향에 있는 아버지의 재산마저도 숙부에게 빼앗긴다. 다만 당시 학생의 신분이었기에 나름 생활할 수 있는 여분의 남은 재산을 지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건진 뒤에 고향을 등지고,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담을 쌓는 계기가 된다. “나는 이미 고향을 떠나 올 때 염세적인 인간으로 변해 있었지. 인간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관념이 그때 이미 뼛속 깊이 사무쳤던 게야. 나는 내가 증오하는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 외의 친척들을 모든 인류의 대리인쯤으로 생각하게 됐네.”(p,207) 이렇게 믿었던 친지에게 당한 배신을 기점으로 아주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었던 선생님은 학교 근처에 있는 고이시카와에 군인의 미망인이 외동딸과 하녀만을 데리고 살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의 이야기는 진행된다. 이사 후, 외동딸 시즈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자라지만 대학 동료 중에 같은 과 클래스메이트인 K를 자기의 하숙집에 들이면서 사랑의 위기를 맞는다. 시즈의 마음이 K에게로 가는 것을 보던 선생님은 극도의 시기심이 발동한다. 설상가상으로 K가 시즈에 대한 사랑 고백에 대한 자문을 선생님께 하게 되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교묘하게 감추고 평상시에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K가 그래서 자신의 미래 지향적인 좌우명과 같이 되뇌며 했던 말을 그에게 되돌려 주면서 한 여자로 인해 자신의 목적을 흐트러뜨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 것을 충고하며 단념하게 한다. 선생님의 이 방법은 변장을 한 것이지만 사실은 K로 하여금 시즈를 단념하도록 충격 요법을 쓴 선생님의 고도의 비겁한 행위였다.
“정신적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차갑게 말했다.” (p,294) K가 말한 ‘정신적으로 발전을 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 말 속에 금욕의 의지도 포함되어 있다고 선생님은 믿었기에 그 말을 되돌려주면 K는 시즈를 포기하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자신이 두려워하는 시즈에 대한 K의 사랑의 물꼬도 막아낼 수 있는 좋은 작전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선생님의 이 계략은 효과를 보았다. K가 갈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다 K에게 말 그대로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일을 선생님이 진행하였다. 그것은 친구에게 고백을 받은 후였지만 자신은 사모님에게 은밀하게 딸 시즈를 아내로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사모님은 객관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선생님의 요청을 받고 스펙이 괜찮은 그에게 시즈를 주기로 허락을 한다. 이윽고 얼마 후, 사모님은 K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이 일을 안 선생님은 순간 양심의 아픔을 느껴 다음 날 K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려고 새벽에 K의 방에 가보았더니 그는 경동맥을 그어서 자살한 상태였다. 선생님은 너무 놀라서 당황하다가 K의 책상에 있던 유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자신이 지은 죄가 있어 혹시 자신과 K사이에 있었던 일이 나올까 두려워하며 유서를 읽었다. 허나 유서에는 시즈에 대한 일체의 이야기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고 다만 얼마 전 선생님이 보기 좋게 돌려주었던 발전하려는 의지가 없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절망 때문에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결국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 K와 그 K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이 선생님의 전 인생을 옭아맸다. 선생님은 그렇게 하여 시즈를 아내로 얻었지만 이후 아내와는 심리적인 거리를 두며 살았고, 조우시가야에 K를 묻은 후 죄책으로 그곳을 방문하여 묘지를 참배하는 것이 선생님의 일상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이어왔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은 더 이상 자신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인해 불행해진 두 사람, K와 아내에 대해서 버틸 힘이 없었던 것 같다. ‘나’에게 유서를 쓰면서 자신의 과거의 흔적들을 가감 없이 고백하고 대신 아내에게는 끝까지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한 뒤, 선생님 역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질긴 자신의 삶의 그림자를 지우며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나쓰메 소세키를 알게 된 것은 3년 전,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을 읽으면서였다. 강 교수의 롤 모델이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라는 일침을 그의 책에서 만나면서 무라야마 하루키에게만 열광하는 내 자아를 많이 경책하고 나쓰메 소세키에게로 방향을 선회했던 기억이 있다. ‘도련님’ 과 더불어 병행하여 시작한 ‘마음’ 독서는 글을 읽는 내내 잔잔한 쓰나미(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가 밀려왔다. 다른 독자들은 또 다른 평가를 내리겠지만 서평자는 목사라는 신분을 갖고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직업의식 때문에 ‘마음’을 읽고 난 뒤 밀려온 잔잔한 쓰나미에 대한 신학적인 담론들을 끄집어 낼 수밖에 없었다. 질긴 죄책이 혹시 에고이즘? 본 소설을 번역한 오유리는 책의 에필로그를 대신하는 작품 해설에서 이렇게 밝혔다.
“마음은 당시 에고이즘에 대한 추구와 비판이 매우 철저히 묘사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p.343) 역자가 이렇게 평가한 것은 아마도 본 소설의 두 번째 ‘나’로 등장하는 선생님의 삶이 살아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까지도 철저한 에고이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선생님은 재산을 숙부에게 빼앗긴 이래로 사람을 믿지 않는 상처 후유증을 갖고 살았다. 이런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과 같은 상처의 후유증은 선생님은 자기중심적 삶을 사는 것으로 세상으로부터 방어막을 쌓았다. 숙부에게서 당한 배신 이후, 첫 번째로 만난 대상자가 바로 사랑하는 여인으로 떠오른 시즈이다. 원만라고 순탄할 것만 같았던 시즈와의 사랑은 K로 인해 위기에 직면한다. 선생님은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기 방어를 다시 시작했다. 그것은 사랑의 라이벌인 K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방법은 표면적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사랑을 지켰다. 허나 그 사랑을 지키는 데에 들어간 대가는 참혹했다. K가 믿고 말한 친구인 선생님에 의해 쓰라리게 당한 배신의 충격으로 K가 경동맥을 끊은 것이다. K의 자살은 이 소설의 압권이다. 선생님은 자신의 배신으로 인해 싸늘한 시신이 된 친구 앞에서도 자신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위가 탄로 나는 것을 두려워해 끝까지 자기중심적인 모드를 견지하여 친구 죽음의 원인에 대하여 함구한다. 이후, 선생님은 그토록 원했던 시즈와 결혼을 하고 생활을 시작하지만 죄책으로 인하여 원만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K를 묻은 조우시가야의 묘를 평생 돌보며 살지만 그것도 자기 죄에 대한 도의적인 의무였다. 첫 번째 화자인 ‘나’에게 두 번째 화자인 선생님 ‘나’는 자신의 모든 과거를 담은 유서를 남긴 채로 친구가 했던 것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길고 긴 죄책을 끊는 것으로 저자는 소설을 마친다. 죄책의 종결을 자살로 마무리한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응분의 벌을 받겠다는 의지 천명인가? 아니면 이것마저도 지독한 에고이즘이라는 결과적 미인가? 서평자는 불온한 마음이 든다. 왠지 후자 쪽으로 마음이 쏠려서 말이다. 저자는 아마도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미학적으로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의 현대적 건조한 세속의 판에 그래도 스스로 자신이 자행한 죄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을 지려는 선생님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죽음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비겁한 에고이스트적인 삶을 청산하겠다는 의지는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만에 하나 작가의 의도가 그렇다면 상당히 불온하다. 불온함이 상식과 어울린다면 모순일까?
불온함에 대하여 저항하던 작가를 이야기하라면 서평자는 두 사람의 글을 기억해 낸다. 하나는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엘리 위젤의 ‘샴고로드의 재판’이다. 전자의 책을 서평자가 처음 만났을 때 책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루이스의 사상을 보면서 그를 천재적인 기독교 변증론자라고 평가하는 것에 대한 기분 좋음으로 동의했던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서평자가 나름 치열하게 고민하고 씨름했던 부분을 통쾌하게 대리적으로 해결해준 담론은 ‘역사적 예수’ 에 대한 그의 논거였다. “일단 예수를 단순한 스승으로 만들어버린 후, 그의 가르침과 다른 모든 위대한 도덕적 스승들의 가르침이 실질적으로는 아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슬쩍 은폐해 버리는 거야. (중략) 이런 역사적 예수들을 구성함으로서 헌신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현장에서 목회를 하면서 스스로 치열하게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와의 균형이다. 구렁이가 담 넘어가는 식의 무감각이 아니라 목회라는 현장에서 21세기의 신자와 성도 사이에서 천국과 지옥을 수백 번 건너다니는 형극에서 이 첨예한 두 가지의 예수를 절묘하게 균형 잡는 것은 말 그대로 예술(?)의 경지와도 같다. ‘신앙적 그리스도’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그룹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형편없는 예수이다. 반대로 ‘역사적 예수’에 열광하는 그룹들에게 있어서 ‘신앙적 그리스도’는 기독교 순응주의에 협착된 그래서 삶의 자리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비상식의 예수이다. 설상가상으로 현장 목회자는 싫든 좋든 이 두 예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 압박으로 다가온다. 이런 차제에 루이스의 갈파는 물론 신앙적 그리스도의 맥을 잇는 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손들어줌이 수구적 근본주의자들처럼 무자비하고 천박하지 않고 도리어 지성적 예의를 갖추고 있었기에 서평자도 격하게 공감을 표했던 것 같다. 엘리위젤의 대표적인 희곡인 ‘샴고 로드의 재판’에도 이와 같은 불온에 대한 지성적 반전이 있다. 하나님을 피고인석에 앉혀 재판하는 법정에서 하나님을 도적적, 윤리적, 종교적인 최고의 언어로 변호함에 있어서 완벽했던 샘(희곡 중에 사탄의 분)이 자기의 정체를 발하는 순간, 공개적으로 비웃던 그 소름끼치게 함은 역시 불온했다. “그래, 날 성자, 의인으로 착각했나? 나를? 어떻게 그렇게 아둔할 수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나? 알기만 했더라면, 너희들이 알기만 했더라면.” 하나님을 하나님의 측면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그래서 결코 누군가에 의해 통제받지 않으시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으로 재단하고 변호하고 방어하려는 일체의 시도가 사탄적임을 고발하는 그 고발의 변이 참 불온했다. 그러나 서평자가 이런 불온함이 대중과 독자들에게 있어서 파격적인 흥분과 매력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불온함의 한계는 제한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상념에 서평자는 젖을 때가 빈번하다. 더 더욱 작금의 미쳐가는 시대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왜? 불온함에 열광하고 긍정적인 매력을 느끼는 시대이지만 그 불온함이 상식을 폄훼하는 파격으로 변질되지 않고 도리어 상식의 선 안에서 도전해 봄이 어떨는지. 아름다운 자살?
두 번째 솟구쳐 오른 것은 자살은 윤리적인 결단인가? 의 문제 제기이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극 중 중요 인물인 선생님과 K는 시간적인 갭이 있기는 하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을 선택했다. 작가는 둘 다의 자살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가 서평자의 뇌리를 계속해서 때렸다. K는 발전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으로 자살을 선택했던 것일까? 아니면 친구의 교활한 배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을 자살로 보인 것일까? 또한 선생님의 자살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긍정인가? 부정인가? 답은 독자들의 몫이다. 다만 서평자가 이것을 신학적 담론으로 끄집어 올린 것은 현장 목회자로 사는 자로서의 가슴 아픔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가 자살에 대한 현대인들의 극단을 막을 만한 흔쾌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었다. 주인공 계나는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2등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괴로워 호주로 이민을 떠난다. 계나가 호주로 떠나며 ‘한국이 싫다고’ 한 이유는 ‘여기에선 못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여기에선 못 살겠다는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선택하는 것은 계나처럼 이민만이 아니다. 또 다른 떠남 즉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세 모녀 사건이 그렇고, 고독사가 그렇고, 잊을 만하면 때때마다 들려오는 극빈층 사람들의 자살이 그렇고, 학교에서 왕따, 학습 스트레스로 인해 꽃다운 생을 마감하는 아이들이 그렇다. 온라인상에는 자살 동우회가 생기고 함께 자살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삶으로 떠나고 있는데도 교회는 단지 자살하면 지옥을 간다는 천박한 교리로 자살자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협박하는 수준이니 아연실색할 정도이다. 나쓰메가 ‘마음’에서 다분히 시사하고 있는 자살이라는 극단을 선한 것, 혹은 악한 것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다만 가치중립적인 차원에서 자살도 하나의 방법으로 인정하고 있는 느낌은 목회자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서평자는 동의하지만 다만 자살이라는 방법이 아닌 인간이 인간스럽게 되는 또 다른 방법을 교회가 제시해 줄 수 있다면 가끔은 세속적인 측면에서 자살을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학적인 공격에도 떳떳하게 방어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을 주지 못하는 현장 목회자로서의 자괴감이 너무 힘이 든다. 나 지금 떨고 있니? 세 번째로 서평자가 ‘마음’을 통해 제시하고 싶은 신학적 담론은 무감각에 대한 경종이다. 저자가 소설의 가장 많은 분량에서 제시한 화두는 K를 자살하게 만든 동기를 부여한 자가 바로 자기였다는 선생님의 가책이었다. 가장 선량하고 바른 인품의 윤리적 태도를 지닌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였고 심지어는 같이 살고 있는 아내에게까지 끝까지 그렇게 보이기를 원해 죽기까지 아내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었던 K에 관한 일들은 결국은 선생님의 평생의 멍에였다. 그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다 가졌지만 K를 양심적으로 확인 사살했다는 자책으로 평생 칩거하는 삶을 살면서 양심과 싸운 것이다. 서평자는 자살이라는 극단을 선택한 선생님이었지만 그를 통해 진면교사를 삼은 것은 끝까지 무뎌지지 않은 양심의 가책이었다. 딸을 폭행한 뒤, 거의 1년을 넘게 집 안에 사체를 방치하여 백골 상태로 유기한 엽기적 범죄자기 신학대학교 교수이고, 발로 차 조카를 죽인 이모는 형부와의 불륜을 통해 낳은 자기 아들이었다는 경악의 세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목회자로 고민스럽다. 서평자가 어렸을 때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힌 것처럼 들썩였다. 그 때는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 때가 살만한 때였던 것 같다. 사람 한 명이 죽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떤가? 적어도 엽기성이 없으면 신문에 기사 거리가 되지 않는 시대를 보면서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헷갈릴 정도이다. 아주 오래 전, 방송된 명 드라마의 명대사가 언뜻 떠오른다. ‘나 지금 떨고 있니?’ 나도 얼마든지 그 사람일 수 있다. 목사 되기 이전, 영문학을 공부할 때 학점을 따기 위해 원서로 읽었던 나다나엘 호돈의 ‘주홍 글씨’는 목사가 된 이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고마운 고전이 되었다. 서평자는 이 책을 독서하면서 무감각과 양심의 대일전(對一戰)을 보았다.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자존감을 지나는 요소는 깨어 있는 양심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목사가 된 이후 목사라는 존재로서 현장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사투해야 할 본질인지를 이 책을 상기할 때마다 나름 경책할 수 있었다. 일본 전후 소설의 명장인 엔도 슈사쿠도 이 점에 있어서 동일했다. 그의 걸작인 ‘바다와 독약’에서 2차 세계 대전 때, 생체 실험을 위해 미군의 간을 산 채로 떼어 들고도 아무렇지 않은 자신의 무감각에 몸서리치던 큐슈 대학 병원의 담당의인 스구로를 보면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징벌이 양심 마비임을 고발한 것을 보면. 목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어떤 사람이 묻는다면 사람을 많이 회심시켜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수준은 이제 서평자도 넘어섰다. 반면 아주 준엄하게 내 개인의 양심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목회의 정의를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목회란 교회라는 현장과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정황’ (Sitz im Leben)에서 무감각하게 살지 않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기도해 본다. “주여, 민감한 죄책을 유지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