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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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포이에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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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02-09 16:3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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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메시지이다.
김진 박사가 쓴 ‘간디와 대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면 이런 간디의 일화가 적혀 있다. 언젠가 간디가 막 기차에 오르려는데 한 기자가 간디를 붙들고 말했다.
“선생님, 인도 국민들을 위하여 메시지를 전해 주십시오!”
그 때 간디가 종이에 무엇인가를 급히 써서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My life is my message.” (내 삶이 곧 메시지입니다.)
한겨레신문의 종교 전문 기자 조헌의 글에도 비슷한 글이 있다.
“내 삶이 유언이다.”
규암 김약연 목사가 임종 직전에 자식들과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더 이상 무슨 부연 설명이 필요한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어낸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렇게 살다가 갔다. 김깃걱 목사가 이들에게 영감을 얻었나?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키워드이다. “내 삶이 곧 메시지다.” 오늘 나의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한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가? 에 대한 대답 때문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 한국교회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삶이 없는 거지.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국 교회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어느 새 ‘저들만의 리그’ 전락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세상은 교회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또 들으려 하지도 않는 추락의 한 복판에 교회가 서 있다. 회자되듯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대이니 더 이상 무슨 변명이 필요한가?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시간, 세간은 국내 유명 신학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독일로 유학을 가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이후, 모교에서 겸임 교수로 일하며 또 부천의 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현장 목사가 딸을 살해한 이후, 1년 동안 집안에 사체를 방치하여 백골 상태로 유기하였다는 발각된 엽기적인 일로 인해 다시 한 번 한국교회를 그로기 상태로 만드는 치욕을 안겨주고 있다. 그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일을 벌인 친구가 서평자가 졸업한 신학교의 7년 후배라는 이야기를 후에 듣고 이루 말 할 수 없는 참담함으로 괴로웠다. 이제 바닥인가? 모름지기 증권 시장에서는 주가가 바닥을 치며 다시 반등의 시기로 여긴다는 공공연한 희망이라도 있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는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무거운 무저갱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몰골이니 어떤 의미로 이렇게 한가롭게 읽은 책 나누기나 하고 있는 내가 너무 호사를 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마저 들 정도이니 그 자괴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산상수훈의 상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디에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을까? 진단 역시 너무 늦은 감이 있어 서늘하다. 하지만 그래도 진단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 잡을 만한 지푸라기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또 하나, 그렇게라도 해야 속죄하는 것 같은 심정이라.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사유하고 또 사유한 결과, 또 다시 스멀거리며 올라온 망령은 주군께서 산에 오르셔서 선포하신 빼어난 교훈을 한국교회가 상실했다는 점이었다. 소위 말해서 ‘산상수훈의 상실’ 말이다. 그렇다. 산상수훈의 교훈을 너와 내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너와 내가 주군께서 선포하시며 당부하셨던 산상수훈의 조목조목을 상기하며 살았다면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이 지경의 동네 샌드백은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가득이다. 이제 발버둥이나 한 번 쳐보자. 혹시 내 사랑하는 교회가 그리고 당신과 서평자가 지금이라도 산상수훈을 살아봄으로 돌아간다면 아직은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살아봄을 말하려니 낯이 많이 간지럽다. 그렇게 말처럼 녹록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의 시작하는 말을 들어보자.
“산상수훈은 예수 정신의 알짬이다.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삶의 강령으로 삼아야 할 가르침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살아낼 엄두를 내지 않는다. 지금 산상수훈은 액자에 걸려 있을 뿐 우리들의 비근한 삶에 녹아 있지 못하고 있다 ”(p,9)
냉철한 현실의 속에서 내 자아를 까발린 것 같은 타협 없는 지적이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의 장탄식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의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서평자만의 객기가 되어서 안 되는데 하는 마음 간절하다. 오래 전, 반전 운동가이자 진보적 성향의 목회자인 로빈 마이어스가 산상수훈에 언급한 글을 아주 의미 있게 읽은 적이 있다.
“예수의 산상 설교(마태복음 5-7장)의 메시지가 실제로 우리를 구원한 순간에 도달했지만, 교회 안에서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교리들의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산상설교에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관하여는 단 한 마디의 말씀도 없고, 오직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들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산상설교는 행동에 관한 선언이지, 교리적 진술들의 선언이 아니다.”
가슴에 담아야할 보물 같은 권고이다. 그의 선언에 가슴이 먹먹해 지는 것은 미국교회나 한국교회의 현실이 너무나 닮은꼴이라는 점 때문이다. 내 조국교회에 산상수훈의 알짜미들을 살고 있는 몸부림은 정말로 있는 것일까? 저자는 글을 통하여 산상수훈을 상실한 교회를 고발한다. 그러나 서평자가 본서를 사랑하는 이유는 저자가 글을 통해 고발로 끝내지 않고 살아냄의 고민들을 알천같이 뿜어내고 있다는 노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회답지 못함에 대한 탄식을 갖고 있는 저자지만 또 한편으로 그 불쌍한 교회를 향한 덕지덕지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이 포기하지 못하시는 사랑의 밀어가 저자의 글 담론 속에 있다. 저자도 이렇게 말하니 갑자기 서평자도 용기가 생겨 한 마디 거들고 싶어졌다. 잃어버리고 망각해 버린 산상수훈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한국교회의 꺼져가는 촛불을 다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사항 말이다.
살아내도록 하는 책이 진짜 책이다.
산상수훈에 대한 해석, 주석, 설교는 지천에 깔려 있다. 상투적인 방법으로 평신도들에게 산상수훈의 내용과 의미 전달을 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 너무 자료가 많아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혼돈스럽기까지 하다. 허나 문제는 산상수훈을 살아내라는 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론하지만 산상수훈에 대한 이론적, 신학적 접근을 시도한 책은 무궁무진하다. 유감스럽게도 살아내려는 그리고 살아내라는 치열함을 알려주는 책이 희미한 오늘, 저자의 ‘삶이 메시지다.’는 앎이 아닌 삶으로 산상수훈을 말하는 수작이다. 조금 더 아부해 보자. 지금까지 서평자가 본 적이 없는 걸작이다. 이런 이유로 ‘삶이 메시지다’는 오늘의 교회를 아파하는 목사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꼭 한 번 섭렵해야 할 귀한 도서이다. 저자는 이렇게 산상수훈의 머리를 장식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자란 스승이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스승인 예수가 하신 일은 현대인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p,17)
저자의 이 설파에 마음이 뜨끔하다. 마음에 와 닿고 찔리기 때문이다. 근래 예수가 참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듯하다. 단 부유층의 사람들과 정치 기득권의 사람들에게 더 더욱 그렇다. 정치의 중요한 이슈가 발생하면 번영 신학에 기초가 든든한 사람들이 벌떼처럼 정부 정책을 위하여 십자가를 져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저들은 예수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헤게모니를 더욱 굳건히 잡는 용병으로 대형교회와 부유층의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한다. 교회가 잘 되게 해준다는 떡고물을 미끼로. 그래서 예수는 기득권자들에게 정책적으로 참 매력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그들에게는 성공한 자이어야 하고, 당연히 그를 붙들면 부가 창출되고, 정권을 연장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권을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왜? 예수는 세속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라 철저히 실패한 인물의 원형처럼 무기력한 존재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래서 정직한 예수를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허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미 그렇지 못하다.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하여 기울어 있다. 믿는 것에서 정체되어 있다. 더 나아가면 부담을 말해야 하고, 또 더 나아가면 부자로 사는 것에 대하여 철저히 실패한 예수를 말해야 하고, 한 발 더 나아가면 만사형통이 얼마나 對(대)신앙인 사기극인지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복음주의자인 아이든 토저의 글에 부분적으로 동의하고 싶은 글을 많이 발견한다. 그의 사자후를 하나 들어보자.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서 나갔으며, 세상은 교회를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이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다. 과거의 교회는 어린양의 아름답고 혈색 좋은 신부였으나, 지금 교회는 쪼글쪼글한 늙은 걸인 같다. 지금 교회는 세상의 거리로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전 한 닢을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한 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면에서 당신들과 똑같습니다.’ 라고 말한다. 오늘날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 혼혈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 명심하라.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 과거의 교회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오니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의 성경적 원리위에 우뚝 서서 세상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올 것이다.”
성향이 보수적인 복음주의자이기에 토저는 글의 결론을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올 것이다.’라고 맺었다. 교회의 핵심적 가치가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살아내도록 하는 것임을 서평자는 먼저 생각하기에 토저의 발언 중 결과에 대한 도출을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불편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포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갖고 있는 비굴한 태도에 대하여 성토하고 외치고 있는 외침에는 같은 마음이 있음을 표하고 싶다. 산상수훈을 교회가 살아야 예수 따르미들이 탄생된다. 교회가 산상수훈 살아내기에 눈감고 있다면 교회는 물론 예수 따르미도 배출될 리 없다. 그것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공멸을 의미한다. 서평자는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 몹시 힘이 들었다. 왜 내 조국은 힘이 없는 자들이 이렇게 우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 에 목사로서 답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주원규의 장편 소설 ‘망루’를 읽게 되었다. 소설은 중간 중간 중간 ‘벤 야살’이라는 예명으로 한국교회의 이중성을 고발하며 본인이 다니던 교회의 홈페이지에 독설을 뽑아내는 인물의 편지가 소개한다. 소설은 그 편지에서 불의로 도배한 한국교회를 힘으로라도 전복하려는 벤 야살의 기도(企圖)를 사랑의 힘으로 막는 소설가의 작위적인 인물 재림 예수가 등장한다. 이 둘의 긴장감은 정의와 사랑이라는 두 개념의 치열한 공방으로 전개된다. 기실, 힘과 능력이 없어서 당하는 현대인들의 소망이 있다면 부조리, 불합리, 공평하지 못한 자본주의의 천박성, 무전유죄유전무죄의 있는 자들의 그들만의 천국, 갑 질 인생을 즐기는 갑들의 세상 등등 이 모든 것들을 혁명적인 힘이 분연히 일어서 판을 뒤집어 업기를 바라는 벤 야살과도 같은 존재가 탄생하기를 한편으로 그린다. 그러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혁명과 전복이라는 폭력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이라는 행동으로 그 불의와 맞서야 함을 강조하고 살아내는 재림예수와의 묘한 긴장감이 소설을 놓지 못하게 한다. 내 조국교회의 현실이 바로 이렇다. 벤 야살과 재림 예수가 존재한다. 문제는 재림예수를 빌미 삼아 행동하는 교회, 산상수훈을 살아내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때로는 색깔론으로, 때로는 신앙 없는 자로 매도하는 수구적 근본주의자들이 한국교회를 휘감아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수구성에 대하여 도전한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교리화가 아닌 살아내기를 분연히 외친다.
보수도 진보도 아우르는 성서 지평
주지하다시피 저자는 주류 한국교회의 틀에서 볼 때 반골(?)적 기질의 라인에 서 있어 보이는 인물이다. 말 표현이 조금은 과격하지만 말이다. 맘에 걸려 조금 더 점잖게 말하자면 개혁적 성향의 인물이라는 말이다. 서평자는 이런 성향을 표현할 때 가장 상식적인 도를 추구하는 지성적 맨털리티의 소유자라고 표현하지만, 또 다른 우회전 주류의 입장에서 평가하자면 저자는 심하게 좌회전한 자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소양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책의 시작에서 예수라는 주군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제반적인 인식이 역사적 예수와 따르미들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 사실이다. 헌데 서평자가 인식한 산상수훈의 시작을 알리는 저자의 ‘제자론’ 이해는 전통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놀랍고 또 고무적이다. 물론 해석의 다양성은 열어 놓지만. 왜 이 관점을 제기하고 있는지 아는가? 부정적인 코멘트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서평자는 저자의 해석에 동의함을 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르는 따르미들을 진보적인 개념으로 접근할 때,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진보성이 예수를 따르는 ‘무리’로 전락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지적인 접근만으로 신앙은 논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보적, 개혁적 성향이 강하여 발전적인 토대를 향하여 나아감으로 인해 서평자도 저들의 일들에 대한 상당수 많은 부분 박수를 칠 때가 있지만 항상 결정적으로 그들의 길에 온전히 부합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2%의 극단이 보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시작이 너무 좋았다.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는 저자의 발군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어지는 8가지의 복을 극히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철저한 자기 비움과 그 비움의 공간을 하나님으로 채움으로 인해 비로소 얻게 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가 진정 복되게 사는 자임을 밝히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박명(薄明)으로 애통함을 말하고, 아무런 물리적, 정신적 강제도 없이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고 그의 존재를 고양시키는 힘을 온유라고 해석하는 저자의 통찰은 귀하게 보인다. 어디 이뿐이랴! 의에 주림은 행복이며, 자비는 늘 아파하는 사람의 능력이며 그 사람이 예수를 닮은 사람이라는 말은 선명한 해석으로 눈에 띈다. 눈물로 마음을 닦는 자가 진정으로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이며, 평화는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저자의 힘주어 말하기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이런 차원에서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라는 현자의 말에 대한 저자의 재인용은 의미가 있다. 이것이 북한 핵에 대하여 사드라는 힘으로의 대응하는 이 정부의 밀어 붙임에 왠지 서평자도 아픈 이유이다. 끝까지 예수 사랑의 힘으로 박해를 받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그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소금이야 그리고 빛이야 넌!
성경을 읽다가 가끔 소스라치게 놀라는 단순한 은혜가 발견되면 전율한다. 빛과 소금의 이야기가 그렇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다. “너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는 세상의 빛이다.” 다시 말하면 너와 소금, 너와 빛은 동격이라는 말이다, 우리들이 흔히 착각하는 함정이 있다. ‘빛이 되라. 소금이 되라.’의 진행형을 빌미로 빛 되지 못하고 소금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변명하는 자기합리화의 머리 굴림이다. 되라고 하셨기에 아직은 불완전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하나님도 하신다는 잔머리 굴림 말이다. 허나 주군은 이 점에 대하여 빈틈을 주시지 않았다. 서평자는 소금인 나. 빛인 나라는 절대 명제 앞에서 긴장한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거기에 복종하기보다는 세속적 성공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중략) 해서 교회는 이제 세상을 많이 닮았다. 교회가 먼저 변했고, 세상이 교회를 닮았다.”, “불의한 세상을 향하여 분노를 회복하라. 소금의 맛을 회복하는 관문이다. 세상의 빛이 되고 싶다면 스스로 사랑이 되라”(p,120)
저자의 외침이 귓가를 세차게 때린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경솔히 여겼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주군의 경고하심을 해석한 저자의 일갈이 눈에 띈다.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삶을 하늘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로 증명되고 삶으로 증명되는 것이어야 한다. 말일뿐인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랬나?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의 몸이 필요하다. 여러분의 손과 발을, 시간과 정성을 주님께 봉헌하여, 말씀이 여러분의 존재와 삶을 통해 세상에 말해도록 하라”(p,142)
저자의 ‘삶의 메시지다.’의 압권은 아마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향하여 그 길을 막고 있는 싸움을 멈추라는 명령일 것 같다. 하늘을 잃어버렸기에 전쟁과 싸움과 힘이 정의가 되어버린 비루함에 맞서기를 종용한다. 다만 저자는 이 또한 힘에는 힘, 이에는 이의 논리가 아니었다. 저자의 논리는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에서 벗어나 ‘그도 내 편’이라고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에 항복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인정하는 자는 폭력을 멈추게 될 것이며, 타인의 삶을 긍휼(COMPASSION)로 접근하게 될 것이며, 차별하지 않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역설한다. 인용한 성 프랜시스의 말이 고풍스럽게 여겨진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리라면 지우개를 들고 계신 하나님을 모습을 그리게 될 것이다.”(p,195)
이제 저자는 경건의 틀까지 그린다. 경건은 오늘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그리고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이 다하기까지 달려갈 목표라고도 했다. 그러려면 허영을 버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배분해 주신 삶의 몫을 충실히 살라고 권한다.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부딪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기도할 때는 깊이 사귀고,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라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섬을 행하는 것이 경건의 실체이며, 고통을 받는 이들과 끝까지 연대하며, 조금 덜 쓰고 조금 더 불편하게 살기로 결단하며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경건의 핵심임을 저자는 비장하게 말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종말의 현실이 눈앞에 있다. 하지만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주님의 꿈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p,235)
맞장 뜨라
마지막 저자의 메시지는 맘몬과의 맞섬이다. 물러서지 않음이다. 물질 성공 시대의 패대기이다. 마침내 맘몬에게 함몰되어 있는 미친 시대의 순서를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순서의 제대로 만들기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하여 보여줄 삶의 메시지이다. 저자는 긴 여행을 마치며 신영복 선생의 글을 하나 인용한다. 감옥에서 만난 목수 할아버지가 집을 그리는데 순서가 지붕부터가 아니라 땅바닥부터 그렸다고. 그런데 이 기막힌 충격을 글로 읽은 저자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신앙생활이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고백은 활동 속에서만 진실성이 드러난다. 희떠운 말의 성찬 속에서는 우리는 더욱 배고프다. (중략) 인간성이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 서서 손으로 그 잔해를 걷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한다. 믿음으로 바닥을 다지고, 수직의 중심을 잡아 삶의 재료들을 쌓아올리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 어깨를 겯고, 높이 오를 일이다. 기도의 골방과 사귐의 사랑방을 만들고, 사랑과 심김으로 창문을 내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지붕을 삼아야 한다. 너무 늦은 때가 가장 이른 때라는 말을 지팡이 삼아 볼 일이다. 우리가 일단 내달으며 그분이 안아서 날라주실 것이니.”(p,301)
저자의 마지막 에필로그의 글을 읽는 데 눈물이 핑 돈다. 왜 그럴까? 감성이 아직은 살아 움직여서 일까? 아니다. 도리어 그의 말이 이성으로 가슴 벅차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올곧게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는 참으로 무식하게 믿는 배짱이 하나 있다. ‘밑의 힘’ 즉 한국교회가 ‘저력’(底力) 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의 골방으로 흘린 눈물로 지금의 교회가 세워졌음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의 삶은 저력이라는 힘을 비축하는 근원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는다.
1986년은 신학교 졸업을 1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국가적으로도 한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기였기에 앞으로 현장에 나가 목회자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인가? 놓고 치열하게 내 자아와 싸움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서평자는 폴 쉴링의 ‘무신론 시대의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마틴 부버의 한 문장이 벼락처럼 다가왔던 것을 기억한다. 서평자에게 목회자로서의 영적 회심을 불러일으킨 말씀이었다.
“자기의 창문을 통해서 응시하는 무신론자가 자기가 만든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힌 신앙인보다 하나님에게 더 접근해 있다.”
목회자가 된 이후 26년 동안 단 한 번도 부버의 이 일침을 잊은 적이 없었다. 서평자인 나도, 그리고 내가 위탁받아 섬기는 양들이 적어도 자기가 만든 하나님 상에 빠져 살아가는 불신앙인보다 못한 신자들로 살아가게 하는 일체의 것들과 맞장 뜨라고 선포했고 나 스스로도 그 일념으로 달려가려고 몸부림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목회 연한도 마찬가지로 계속 맞장 뜰 생각이다. 이번에 만난 저자의 책은 나에게 산상수훈을 살아내는 것을 방해하는 일체의 세속적 이기성과 맞장을 뜰 수 있도록 다시 달리는 말에 채찍을 때려준 선생님이었다. 부담을 준 저자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내 삶이 메시지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