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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오래된 새 길2024-06-10 17:07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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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기석
ㆍ출판사 포이에마
ㆍ작성일 2016-02-05 11:38:00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를 읽게 된 이유는 법정 때문이었다법정은 인도 라다크 지방에서 참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티베트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소개했다그러나 지구상에서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라다크 유토피아가 개발이라는 문명의 공격으로 인해 처참하게 디스토피아로 바뀌어져 가는 것을 고발한 오래된 미래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연과 공생하며 살아야 하며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는 혜택을 유지하는 것이 된다는 역설의 교훈을 준 감동이 있었다는 법정의 책 보고를 보고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이때가 한 참 4대강 개발에 눈이 벌게 정부가 전 국토에 삽질을 하던 때였기에도리어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과 땅을 보존해야 할 기독교인이자 개신교 목사로서 느낀 무척이나 절망스러웠던 그 감정의 골을 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곱씹으며 재정비한 귀한 기회가 되었음을 기억한다.

종편에서 방영한 응답하라 ○○○○’ 시리즈가 전국을 강타했다원래 종편과는 친하지 않은 서평자이지만 굴복했다이 시리즈에서 과거 우리 공동체가 갖고 있었던 사는 맛을 대리만족으로 다시 찾을 수 있어서 굴복했다그랬다그래도 80-90년대까지는 동네가 있었다이웃이 있었다골목이 있었다그러나 이제는 회색빛으로 만연된 굴뚝 집 같은 것만 도시에 보인다이웃집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었고나의 기쁨이 이웃들의 기쁨이었던 시절이 그 때에는 있었는데 지금여기에는 싸늘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만이 창궐하고 있다호지에 외침대로라면 오래된 미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오래된 새 길이라고 했다들어가는 말에 남긴 저자의 독백이 은은하다.

사람은 누구나 길을 찾는다늘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 해도 어느 순간 그 길이 낯설게 여겨질 때가 오게 마련이다짐짓 외면한 채 살아왔던 본래적 실존이 우리를 소환하는 순간이다.”(p,7)

 

저자의 말대로라면 오래된 길을 직시하지 않는 한 새 길을 찾을 수 없다는 말로 서평자는 들린다이 말은 오래됨의 미학을 소홀히 여기지 말하는 당부이기도 하다. ‘오래됨을 저자는 무엇으로 이 책에서 정의하는가그는 말했다출애굽의 강령인 십계명과 예수 정신의 핵심인 주기도와 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야말로 도를 찾는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천착해야 할 오래된 길을 제시할 이정표임을시인 이성복은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 창작 강좌 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정리한 무한화서(無限花序)’ 에서 이렇게 적시했는데 가만히 음미하다보니 그의 말이 복음 중의 복음처럼 들려 메모했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도 언어를 불신해요불성실한 하인쯤으로 여기는 거지요언어는 우리보다 위대해요언어를 믿어야 언어의 인도를 받을 수 있어요.”

 

그렇다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라간다는 신자들이 그 도를 불신하며그 도를 내 삶의 부속물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예수 그리스도의 도는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기에 그 도를 믿어야 그 도가 나를 인도하지 않을까 싶다그 도의 함축을 저자는 세 개의 지침으로 정한 듯하다.

 

10개나 되나요?

먼저십계명을 추적해 보자저자는 제 1계명을 이렇게 현대적 감각으로 조명한다포스트모던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신이 된다물질적 재화도섹스도인기도 사람들의 혼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신들이다그러나 그 신들 앞에는 반드시 붙여하는 한정사 거짓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말한다신앙인들에게도 이 한정사가 붙어 있는 거짓 신들에게 잡혀 있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속 도시의 저자인 하비 콕스의 일갈로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인간은 그의 삶을 위한 기구와 기술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 방법과 소유를 위한 분배 방법을 바꿀 때 그의 까지도 바꾼다.”(p,19)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날의 현대판 다른 신들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이 길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것이야 말로 제 1계명의 준수라고 선포한 저자는 우상이라는 단어의 폭력성을 먼저 지적한다예수 시대에는 성전이 우상이었다안식일이 우상이었다율법적인 도그마 자체가 우상이었다선민의식이 우상이었다바로 이 우상들 앞에서 예수는 온몸으로 그 우상들을 깨뜨렸다우상을 파괴한 뜨인 돌을 바라보는 일이야 말로 제 2계명을 이루어가는 일이임을 천명한다재독학자 한병철의 글을 읽다가 밑줄을 그었던 대목이 있었다.

 

모든 명령 체계모든 지배의 기술은 피지배자들을 예속시키기 위해 고유한 성물(Devotionalie)을 만들어 낸다성물은 지배 관계의 물질화로서 지배 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성물을 곧 예속됨을 의미하는 것이다스마트 폰은 일종의 디지털 성물이다아니디지털의 성물이 곧 스마트폰이다스마트폰은 묵주처럼 예속의 도구로 기능한다스마트 폰과 묵주는 모두 자기 검열과 자기 통제에 사용된다지배는 감시 업무를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서 효율성을 제고한다. ‘좋아요는 디지털의 아멘이다우리는 좋아요.’ 를 클릭하는 순간 스스로 지배에 예속되는 것이다스마트폰은 효과적인 감시 도구일 뿐 아니라모바일 고해실이기도 하다페이스북은 디지털 교회글로벌한 디지털 시나고그이다.”

 

오늘의 우상은 최첨단의 극단으로 외연이 확장되었다한 교수의 지적대로 현대인들을 옥좨는 우상들은 단순한 모드가 아니라 이제는 가상의 세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그렇다면 오늘의 우상을 내 앞에 두지 말라는 제 2계명의 실천은 만들어진 우상은 물론 시대에 뒤처지게 만든다고 일체의 생각까지 척결해야하는 무거움이 더해진 작금이기에 더욱 심란하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부정하셨다자기 이름을 이름이라는 명목으로 가두어두기를 허락하지 않으셨다하나님에게 있어서 는 였다어떤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만 피조물이 경험함으로만 알 수 있는 이름의 존재가 하나님이셨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부르는 자는 그 분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임을 선포한 3계명의 해석은 명쾌하다연대 교수를 역임한 박준서 교수는 제 3계명의 신학적 의미를 이렇게 분석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는 하나님의 이름이 예배와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익을 구하는 데에 사용되는 일체의 행위들을 말한다.”

 

그의 지적에 동의하는 것은 저자가 말한 대로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약아 빠진 이 시대에 경솔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용하고 빙자한 일체의 일들에 대하여 더욱 경종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의 계명으로 제 3계명은 분연히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안식일에 대한 신선한 스펙트럼의 해석을 서평자가 주었다그의 지론은 안식해야 할 대상의 보편성을 지지한 것이었다그의 논거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신명기 5:12-14절의 안식일 계명에 대한 현대적인 의미로의 해석인데 눈에 띤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명기 5:12-14)

 

그의 신명기 5:14절 해석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 명령의 핵심이 애굽의 바로 정치와 폭력에 저항하라는 영적 의미가 더 크다고 본 점이 신선했다애굽에서 종살이하던 430년 동안 히브리 민족은 애굽의 독재 권력과 기득권 권력의 정점이었던 파라오의 무소불휘의 폭력에 의해 철저하게 인권이 짓밟혔다그들에게 부과된 것은 숨이 없는 노동이었고착취였다이로 인하여 히브리 민족에게 ’ 이라는 것은 꿈의 이야기였다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곳에서 탈출하게 하셨다그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셨고앞으로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예견하시면서 명령어로 적극적 순종을 유도하신 것이 제 4계명이다여기에서 주목할 명령의 요지는 이것이다안식일에 쉬는 대상은 너와 네 아들이나 딸들만이 아니라 네 남종네 여종네 소네 나귀네 모든 가축네 문 안에 거하는 객까지 너와 똑같이 쉬게 하라는 명령이다혁명적 선언이 보인다새로운 세계에서의 안식의 신학적 교훈은 평등한 안식이라는 점이 말이다.

 

안식일에 강요가 만들어내는 그런 차등을 깨부순다안식일에 하지 않아도 된다이 한날이 강요가 지배하는 패턴을 부수기 때문에 모든 이가 너와 같으며 평등하게 된다모든 이가 평등한 가치평등한 값평등한 접근권평등한 쉼을 누린다.”

 

다시 말해서 누구도 안식의 필드에서 피해를 당하거나 차별함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그렇다면 안식일 계명의 참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었고사람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월터 브루그만과 소통했나 싶을 정도로 저자는 바로 이 점에 천착했다그는 안식일을 특정화하는 그 때부터 참 쉼이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안식일은 우리의 일상을 골고루 적용하여 영원에 비끄러매는 날로 정의했다하늘의 서기(瑞氣)에 몸을 맡기는 날이 되어야 함을 분명히 규정함으로서 안식의 신학적 조명을 통해 4계명을 견고히 했다.

저자의 10가지 계명 이해는 참 은혜롭다.(?) 서평자가 말하는 은혜는 보폭이 넓다부모의 봉양과 뜻 받듦은 부모를 넘어서는 성장이라는 5계명의 진정한 의미의 접근이 그렇게 했고어떤 형태이든 반 자연반생 태에서 서지 말 것과 생명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반생명의 자리에 있지 말 것을 권한 것은 그것이 바로 살인하지 않는 6계명의 실천도 그렇게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탐닉과 집착이라는 죄의 올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7계를 준수하는 방법이고, 8계의 가장 중요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 도둑질을 하지 않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의 중요성을 한시라고 잃지 않아야 한다는 조명도 그랬다근래 표절과 글 베끼기가 양심이 마비될 정도로 무분별하게 도용되는 시대에 말이나 글에서 편법을 사용하지 않는 일은 신앙인이 지켜야할 9계라는 해석은 탁월했다그리고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는 욕망이 허구렁을 빠지지 않도록 탐욕을 버리는 일이야 말로 10계명을 지켜 나아가는 것임을 지적한 저자의 혜안은 무척이나 현대적이기도 하지만 반면 고루한 엄숙성을 동시에 전달해 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여 서평자는 만족스러웠다.

 

mysterium tremendum 과 mysterium fascinans

이제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들어가 보자워싱턴 한인 연합 교회를 시무하는 김영봉 목사는 기도의 교과서와 같은 사귐의 기도를 썼다책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고백한 기도의 일탈을 소개하고 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와 고백인 기도가 노예를 부리는 명령으로 변질될 때가 너무나 많다.”

 

섬뜩한 찔림이 있다기도는 어딘가 저위에 높이 계신 하나님께 뭔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내면 깊이 숨어 계시며 온 누리에 계신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며부산히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다리는 것임이 기도인데 오히려 사생결단을 내리는 듯 한 엄포와 협박성 멘트로 하나님을 겁박하는 짓을 기도로 착각하고 있는 이 땅의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목회를 하는 목사로 매번 고민스러울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이런 점을 염려하여서였을까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의미 있게 알려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이다저자는 말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하나 되기 위해 나를 조율하는 것이 기도이다.”(p,83)

 

저자는 이렇게 에벨링의 말을 인용하며 역설한다.

하늘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늘이다.”(p,92)

 

에벨링의 말을 통해 하늘은 누구에게도 독점되지 않는 곳이기에 아버지 하나님은 역시 누구에게나 독점되지 않으시는 모두의 아버지이심을 주기도문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에서부터 주님은 역설하셨다그 아버지는 누구에게나 아버지이시지만 그의 이름은 조직신학자인 루돌프 오토의 말대로 두려움을 일으킬 신비의 이름이자매혹적인 신비인 거룩한 이름이다그러기에 그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하나님의 나라도 이 거룩한 곳에 임해야한다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임하는 나라이다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마음에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전한다해서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한 방법을 묻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단다.

 

당신이 삶의 자리에서 천국에 가면 이것은 없을 것 같다는 것은 제거하며 살며 천국에 있었으면 하는 것은 삶에서 구현하며 사세요.”(p,106)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는 아픔의 자리에서 세상이 바로 보인다는 가난한 자의 인식론적 시각처럼 하나님의 뜻도 아픔의 자리에서 내 신을 벗고 볼 때 보이는 것임을 인지하고 아픔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임을 지적하는 저자는 참으로 시의적절하다하늘을 품고 사는 자는 일상에서 사제가 된다는 말은 그래서 옳다친구가 있다인천에서 도시빈민들을 위해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이 사역을 감당해 온 친구이다그냥 일상의 전통적 교회에서 그럭저럭 평범하게(?) 목회를 해 온 서평자는 감히 생각도 못하는 거친 목양이다노동자와 노숙자들과 함께 평생의 삶을 함께 해 온 친구를 보면 멋있는 샹들리에로 치장되고여름에 시원한 에어컨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고잘 준비된 오케스트라와 어마어마한 합창단으로 구성된 완벽한 곡을 소화시키는 성가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열악하고 척박한 월세 건물에서 흐르는 땀과 친구하며 살지만 서평자는 친구를 보면 도를 추구하는 진정한 사제의 모습을 본다단 한 번도 그 친구의 삶에 대하여 감히 라가라고 비난할 수 없는 거룩을 본다그리고 더불어 항상 난 그 친구 앞에서 작아진다왜 일까아마도 주일 예배에 세련된 넥타이를 매고 성도들 앞에서 거룩함을 폼 잡는 서평자의 외형이 너무나도 초라하기 때문이리라친구를 보면서 저자가 말한 대로 하늘을 품고 사는 자는 일상의 사제가 된다.’는 그 말뜻의 고리를 가장 지근하게 맺고 있는 친구의 거룩함에 도무지 나는 따라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전술했듯이 친구에게 ‘mysterium tremendum’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신비)과 ‘mysterium fascinans’ (매혹적인 신비)를 삶으로 보기 때문이다.

 

왜 주기도를 드리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의례적인 기도가 아니라 생존의 기도이기에 중요하며 동시에 이 기도를 드리는 자는 양식의 소중함을 느끼며 밥을 나눌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새기며 나누어야 한다양식에 대하여 잉여의 욕심을 갖는 자는 이 기도를 드릴 수 없는 자라는 저자의 에두름도 가슴에 남는다죄 용서의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의 단말마적인 기도는 사람의 욕망이 이중적인 것을 꿰뚫고 있기에 주님이 행하라고 하신 기도이며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에게 있기를 소망하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마지막 기도의 압권은 세상 나라의 권세는 힘과 권력의지의 터전 위에 서 있지만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지배와 조정을 통한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과 사랑을 통한 자유의 확대를 지향한다해서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세속적 가치로 바라보면 항상 무기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는 항상 지는 것 같지만 이긴다저자의 주기도문 해석이라는 오래된 새 길의 조명 중에 서평자에게 눈에 띄는 감동이 있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의 옛 삶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새 삶의 출발점이다우리가 이 기도를 진심으로 드린다면 아멘 이전의 삶과 아멘 이후의 삶이 같을 수 없다.”(p,144)

 

오늘 치열한 목회의 현장에 있는 현직 목사로서 조국교회가 무너져 내리는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최고의 아픔이다어떻게 이렇게 되었지아니정말로 촛대가 옮겨지는 것이란 말인가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이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란 말인가기실 자괴감은 어마무시하다그러다가 저자가 오래된 미래’ 에 오롯이 담아 놓은 글감들을 통해 지금 서평자가 고민하고 있는 무너짐에 대한 대안이 혹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에 침잠해 본다서평자의 교회에는 세 가지의 교우 강령이 있다.

① 축도 이후에 더 집중하는 교회 ② 월요일부터 더 승리하는 교회 ③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이어가는 교회가 바로 그것이다가야 하지 않겠는가힘들다고 포기해서야 되겠는가이것이 주기도문에 담김 뜻임을 서평자 또한 알기에 말이다주여한국교회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외쳤던 고 옥한흠 목사의 기도를 나 또한 다시 드려본다.

 

()인가()와 같은 것인가?

 

마지막으로 저자가 언급한 사도신경을 노크해 보자저자의 사도신경을 풀어 보자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부둥켜안고 계신 그래서 그 누구도 구원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임을 고지한다우리를 위해 끙끙 앓고 계신 하나님가부장적인 권위라는 것을 찾아보지 못하고 고샅길 돌고 돌아오는 못난 아들을 곰살 맞게 반겨주시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 것이다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 주와 같은 일체의 것들을 배격한다는 것을 전제한다주와 같은 것들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는 것이 아들이신 주를 믿는 것이다동정녀 탄생을 믿는 것은 생물학적 차원의 이성을 들이대지 않고 예수의 근원이 그 이성을 초월하는 하늘의 주도권에 의한 탄생에 맞닿아 있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믿는 것은 ’ 라는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헐떡이고 있는 나를 사랑하시는 현재 진행형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사흘 만에 다시 사신 것을 믿는 것은 주님께서 새 생명의 회임(懷妊)을 하시고죽어야 하는 나의 죽음을 제대로 다시 살게 해 주신 혁명적인 은혜를 믿는 것이며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을 믿는 것은 예수께서 신적 위엄 가운데 역사에 대한 전권자로 등극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무덤에 거하셨던 존재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까지 승화한 이 놀라운 반전은 하나님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심판하러 오심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길 위에 서 있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으로의 재 초대를 위한 약속이기에 기실 두려움의 오심이라기보다는이 땅위에서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독려하시는 또 다른 사랑의 확증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령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사람들이 만든 유사품 성령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령이 임한 곳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화된다는 그래서 무기력한 생명이 다시금 움돋는 시금석이 성령임을 믿는 것이라는 저자의 갈파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공회를 왜 믿어야 하는가참담한 현실로 보면 박차고 나오고 싶은 곳이 교회인데왜 공회를 믿어야 하는가교회는 소명이기 때문이다나의 온전하지 못한 자아를 서로 채워주는 곳나의 군더더기를 진리의 숫돌로 깎아주는 곳구원의 말씀의 담지자와 선포자로서의 동료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죄 사함을 믿는 것은 그 분의 용서하심을 믿는 것이며다시 사는 것을 믿는 것은 다음의 이것을 믿는 것이다저자의 이 서술을 읽으며 서평자는 울었다.

 

우리는 신이 아픈 어느 날곧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는 그 날태어났다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신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삶이다.”(p,237)

 

그래서 이런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죽음의 그늘에서 살지만죽음을 믿지 않는다그는 육의 부활을 믿는다는 저자의 갈무리가 아름답다마지막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시간을 무한히 연장하여 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든 죽든 하나님의 품에서 떠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임을 저자는 고백한다.

 

내 만족인가하나님의 아픔 인지인가?

 

현장에서 목회를 하면서 제일 많이 내 개인은 물론 교우들과 씨름하는 것이 있다면 주와 같은 것을 믿는 종교적인 행위에서 주를 믿는 신앙적 행위로의 전환이다이 싸움을 하면서 거의 목회의 모든 정력을 쏟은 것 같다하나 더 불행한 예감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오래 전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고 있는 절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음표를 질문한 적이 있었다서평자가 질문한 것은 금송아지 제조 사건에 관련된 질문이었다모세가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간 뒤, 40일 동안 두문불출하자 성질 급한 산 아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무리들은 아론에게 모세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음을 고지하고 애굽에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을 만들 것을 종용하고 압박한다그들의 세력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론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여인들의 금귀고리들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이것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지칭한 뒤금송아지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음을 출애굽기 기자가 보고한다아로 인하여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결국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들고 있던 돌 판으로 금송아지를 부서뜨리는 강제적 파괴를 시행한다이 기사에 담긴 핵심적 요체에 대하여 서평자가 친구에게 질문한 것은 상투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질문한 것이 아니다사건 기사의 정황을 놓고 볼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든 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라는 점은 웬만한 목회자들이라면 쉽게 동의하기에 말이다요는 금송아지의 형상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행한 행위가 번제요화목제였고물론 형상은 송아지의 형상이었지만 그 형상은 상징은 이상한 종류의 잡신이 아니라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분명한 인식을 가졌다는 점이었다그런데도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 형상을 파괴한 것에 대한 상투적인 답이 아닌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설득력이 있는 이유에 대하여 듣고 싶어 질문한 것이었다친구의 답은 싱겁게도 서평자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나름 알짬이었다핵심은 뛰놀더라의 단어에 있었다.(각주 참고서평자는 친구의 답변을 통하여 중요한 사실을 직시했다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욕망의 만족을 위하여 세워놓은 그리고 만들어놓은 헛된 것들에게서 하나님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삶으로의 돌이킴임을저자는 자신의 또 다른 저서에서 바로 이 대목에서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섬기는 종교를 아론의 종교라고 정의하면서 적어도 예수의 삶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론을 종교를 뛰어넘는 영적 혜안이 절실하다고 요청했다오늘 내가 섬기고 는 교회와 그리고 서평자인 내가 아론의 종교에 함몰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감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소름 돋도록 경성해 본다.

 

저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저자의 오래된 새 길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보았다면 큰 과장일까그래도 할 수 없다이 정도의 영적 가치관수준 높은 기독교인의 삶의 길그리고 실천하는 동사형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만 있다면 그 꼭짓점에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스터키가 있지 않을까 싶다서평자는 저자의 글 중에 인용한 엘리 위젤의 팔티엘의 비망록 서문을 섬기는 교우들과 나누며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존감으로 공유하자고 선언했다곱씹고 또 곱씹어도 요즈음 아이들 말대로 심쿵 하게 하는 전율함을 준다.

 

예언자 한 사람이 있었다그는 성문 앞에 서서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음란함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그래도 그는 날마다 외쳤다그 모습이 딱해 보였던지 순진한 꼬마가 다가와 아무도 듣지 않는데 왜 헛수고를 하느냐고 물었다그러자 예언자가 대답했다. ‘저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저자인 김기석 목사의 건강을 빌어 본다그래야 계속해서 타다 남은 검게 그을린 마른 장작나무 같은 나 같은 못난 사람이 계속 빌어먹기 위해서 말이다참 이기적이다나란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