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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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청림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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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02-02 14: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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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를 읽고 (청림 출판 간, 2007년)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시인 나희덕의 ‘길 위에서’에 나오는 글이다. 언젠가 읽었던 이 시가 아직도 기억에 있는 걸 보면 시의 언저리에서 한참을 배회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도 ‘누군가 지난 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이라는 시구를 오롯이 새기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목사로 살고 있는 내 흔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 일 것이다. 어떤 냄새가 나에게 날까? 이것은 아마도 이 땅에서 내 코끝의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치열하게 나를 옭아매는 구속의 올가미로 작용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부담은 되지만 긍정의 언어로 이 올가미를 받기로 결정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것마저 없다면 나는 나를 도무지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나희덕은 이 시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독백하며 여운을 남겼다.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이고 있다.” 라고. 어찌 시인뿐이랴! 이 독백의 주체들이. 허나 서평자는 또 노래꾼 안치환의 노래를 들으면서 참 많은 위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베드로시안의 글을 노래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말이다. “아무도 걸어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소, 아무도 올라간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소” 그런데 왜 인간은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일까? 베드로시안의 확신을 못 믿어서, 아니면 이미 길에 들어섰는데 잘못된 선택의 길에 들어서서 일까? 전자이든 후자이든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어떤 선택이든 이 서성임은 살아 있는 자에게 주어진 불온함의 과정이기에 말이다. 거기에다가 또 한 가지의 보너스까지 서평자는 줄 수 있어서 이런 자신감이 있나 보다. 그 보너스가 김기석이 쓴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이다. 저자는 이 책을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갈파한다.“의심의 여백이 주어지지 않은 믿음이 독단이 되기 쉬운 것처럼, 일직선으로 달리는 이들이 보여주는 경직선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나무는 흔들림 없이는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고, 줄기도 높이 뻗을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 집을 짓는 까치처럼 우리도 흔들림 위에 있을 때라야 인생이 참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위험이 두려워서 길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저자가 시무하는 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소설가 이명행이 자신이 다니는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인 김기석 목사를 설명하면서 이런 글을 남겨 놓은 것이 보인다. “저 분은 왜 시인이 아니고 문학평론가일까? 한 올 거추장스런 검불 없이 하나님 앞에 서고자 애쓰는 시인인데...” 서평자는 이 평가에 기쁨으로 동의한다. 소위 말해서 나는 저자의 골수팬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저자의 글들이 속속히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독자 중의 한 명이다.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사로 그러면 안 되는 것임을 알지만 참 쉽지 않은 것이 다른 이로부터의 감동 받기이다. 눈이 높아서일까? 아니면 도리어 내 영혼이 메말라 있고 굶주려 있기 때문인가? 냉정히 추적해 보면 이건 분명 후자이다. 그러나 변명 같은 사족을 하나 달자면 심장을 움직이고 공명을 울려주는 글과 메시지를 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헌데 이 기갈과 갈증을 풀어주는 은인 같은 대상이 바로 저자이다. 그는 시인이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다. 그는 박학다식하다. 그는 영혼이 아름답다. 그런데 그는 목사이다. 표현이 조금 편파적이라고 보였다면 이해를 바란다. 워낙 근래 목사의 인기가 바닥이라, 이런 목사가 그리워서인가 보다 하고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기를. 저자는 이런 지, 정, 의의 강한 내공을 기초로 네 가지의 길을 글에서 제시한다. 공동체의 길, 자아의 길, 교회의 길, 세상의 길이 그것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사유하고 고민해야 하는 길임을 김 목사는 직시하고 있기에 이 길들을 제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첫째로, 공동체의 길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무엇보다도 삶의 이야기들이 사라지게 만드는 원흉을 ‘생명 경시’라고 진단하면서 적어도 생명의 고귀함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공동체성의 회복임을 분명히 한다. 자연을 아프게 하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무감각에서 탈피하고, 다시금 싸늘하게 죽어 있는 가슴이 살아나는 삶의 이야기를 회복할 것을 종용한다. 땅이 아파하며 신원하는데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강자의 논리로 유린하는데도, 눈감고 기도하는 종교인들을 향하여 눈뜨고 기도하라고 역설한다. 무시무시한 살상 무기를 허울 좋은 이유로 발사하는 힘 있는 자들에게 마음을 발사하라고 독설한다. 그것이 함께 가는 공동체의 몫임을 강조한다. 거기에 주군이신 예수께서 먼저 행하셨던 삶의 이야기가 있다. 더불어 저자는 바로 이 길을 가기 위해 주님이 먼저 걸으셨던 그 길을 기억해 내며 자꾸만 그 길을 잊게 만드는 기형적인 세속적인 아류들의 몰고 감과 또 그것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할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교회 공동체가 무너져 내리며 도리어 그 아류들과 전혀 다르지 않음에 대한 무능력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정신의 크기보다는 교회의 크기가, 인격의 향기보다는 타고 다니는 차의 크기가 그 사람의 존재로 인정되는 오늘의 교회 현실이 암담합니다.” 이 글을 토로하는 저자의 심정만을 담는다면 안타까움으로 감정이입하는 것이 전부일 수이겠지만 서평자를 전율하게 만드는 것은 저자의 그 다음 독백이다. “그러려면 그러라지요. 저는 제 속도를 따라 살겠습니다.” 말이 아닌 삶이라고 했다. 이 오기 때문인지 저자가 운전 면허증이 없는 것을 보면 독종(?)이긴 독종이다. 저자는 공동체가 가야하는 길을 나눈 뒤, 두 번째로 자아의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정신의 독립이요, 합리(合理)와 정리(情理) 사이의 분명힌 긴장감이요, 불의함에 반항하는 정신임을 분명하게 피력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아주 선명한 길을 제시한 저자는 그 기초가 주군이신 예수께서 행하셨던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서 진행되어야 함을 적시했다는 점은 기막힌 통찰이다. 아마도 시대의 우울함은 타협함이라는 악마적인 회색주의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좋은 게 좋은 거야! 꿩 잡는 게 매야! 라는 식의 은밀한 타협함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공동체를 공평하게 하지 않고, 불의가 지배해도 그것을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공범의 역할을 하고 또 그로 인하여 궁극적으로는 스스로가 독약을 먹은 일이 됨에도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불편한 것을 못 견딘다는 이유로 이 악한 일들을 심정적으로 추인하며 살아간다. 저자는 이와 같은 잘못된 판을 뒤집기를 역설하고 있다. 이런 삶의 한판 뒤집기를 위해서 반드시 비판적 성찰이 전제됨을 강조한다. 아마도 김수영이 말한 젊음의 특권은 그래서 불온함이라고 말한 대목을 저자가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다. 비판적 성찰은 ‘조작하기 좋은 대중됨’을 거부하는 작업이다. 사유함이 없는 천박함을 거부하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괴물 중의 괴물인 소비문화의 길들여짐을 단호하게 뿌리치는 멋있음이다. 힘이 정의가 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삶이다. 저자는 글에서 참 좋아하는 단어를 하나 제시하며 소개한다. 바로 수졸(守拙)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깊이 새겨야 할 기막힌 단어이다. 적어도 똑바른 정신을 가진 자라면, 바른 생각의 틀을 가지려 한다면, 갑 질을 부러워하지 않는 자존감과 영악해지지 않겠다는 오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이 정신이야 말로 바로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정신의 독립군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지 않겠는가! 이제 저자는 본업(?)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본업으로 돌아갔으면 가장 자신감이 있고 신바람이 나야 하는데 왠지 저자의 기상도는 저기압 한 복판이다. 왜냐 하면 세 번째 꼭지가 교회의 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가야할 길, 그런데 교회가 가지 못하고 있는 길에 대한 아픔의 표출이리라. 저자는 제일 먼저 교회가 잃어버린 길을 거룩한 분노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지적한다. 세상이라는 괴물이 작금에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가? 에 대하여 이렇게 저자는 대화체로 직설한다.“세상은 권력과 이윤과 쾌락이라는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다.” 이 기막힌 현 상황에 대하여 교회는 마땅히 분노해야 함에도 그 분노를 잃어버렸다고 비판한다. 교회는 마땅히 예수께서 행하셨던 대로 고발과 위로라는 예언자적인 선포를 버성기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달려가야 하는데 이것을 이미 한국교회가 상실했음을 비탄해 한다. 왜 잃어버렸는가? 예수의 정신을 교회가 버렸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본(本)이신 예수 대신 말(末)인 교회 성장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경계의 대상이어야 하며 투쟁의 대상이어야 하는 천민 자본주의의 행태를 도리어 교회가 본받고 있는 아연실색함을 보여주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비아냥 당함과 매도를 당하는 것은 마땅한 일임을 저자는 일갈한다. 교회가 자본주의의 공세 앞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음으로 예수 정신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33세의 청년 핏자국이 아로새겨진 십자가 위에는 화려한 장미꽃이 뒤덮여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암담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저자의 영적 기상도가 우울한 것은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 서평자의 마음도 우울하다. 또 하나 불문곡직하고 또렷이 교회가 보아야 할 틀이 있다. 이 시대가 천박함을 부축이고 그것을 응원하는 세태에서 그래도 교회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 할 목표를 저자가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될 교훈이다. 그것은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투쟁성이다. 비겁하고 영악하게 파괴와 고통의 현장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들의 아픔을 직시하여 그 고통을 대신 지려는 고통의 감내함을 교회가 감당해야 함을 강하게 저자는 역설한다. “무통분만의 시대에는 생명을 낳지 못하고 아픔이 없으니 창조도 없다.” 라는 저자의 혜안은 놀라우리만큼 빛난다.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 교회가 왜 지금 오늘 이 자리의 현장에서 이 모양으로 쓰러지고 있고 또 쓰러져 가고 있는가? 자문한다면 여러 가지로 답을 할 수 있겠지만 서평자는 이렇게 갈무리하고 싶다. “세상을 거스르지 않고 편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과 함께 편승하고 가고 있으니, 사유할 이유가 없고 사유할 이유가 없어지니 성찰은 성가신 것이 되고 사유와 성찰이 없으니 교회 공동체의 말들과 글들이 마땅히 세속의 가치처럼 천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주군은 돈을 맘몬이라고 했다는 저자의 글감에 동의하는 이유는 그의 부연 설명이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게 하는 촌철살인이었기 때문이다.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부름을 받은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강고한 자본주의의 세상에 균열을 내라는 것은 아닐까? 딱딱한 얼음을 깨는 데는 망치보다 바늘이 더 유용하듯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맘몬으로부터 독립한 인격적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이제 저자의 마지막 고언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다. 그것은 세상의 길을 가는 지혜이다. 서평자는 저자의 마지막 꼭지를 읽으면서 분명 세상의 정황들을 적시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교회가 세상이라는 영역에 대하여 갖추어야 할 예의로 핵심적 키워드를 읽었다면 나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크게 눈에 들어왔음에 어쩔 수 없다. 저자의 말대로 “종교는 나누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을 없앰으로써 궁극적인 ‘하나’에 도달하도록 하는데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아마도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이분법적인 논리로 선과 악의 경계로 나누려는 짓(?)을 그만두어야 함을 저자는 강조한다. 그 예로 재앙을 해석할 때 교회가 가지고 있는 폭력적인 해석을 집어치우라고 노기를 발하고 있는 저자의 비수는 말 그대로 비장하기까지 하다. 서남아시아의 일부 나라에 밀어닥친 해일이 하나님의 심판이며,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일어난 자연적 재해가 기독교를 핍박하는 이슬람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고, 타종교가 창궐한 태국이나 인도 같은 곳에 지진이나 해일이 임한 것 역시 동일한 관점으로 해석하는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해석은 소름끼치는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무지한 해석이라는 진단에서 그 절정을 본다. 개인적으로 서평자는 교회의 권력화나 게토화에 대해 거부한다. 특별히 기득권 정치에 교회가 기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한 알러지 반응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근거로 한 여러 가지 해석학적인 근거를 기초로 하고 있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에 비해 개인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교회의 천박함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주체적인 예언적 권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여론에서 회자되듯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대상이 된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주체적인 예언자적인 체데크와 미슈파트의 실현적 공동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싶다. 교회가 교회 권력의 비대를 위해 정치권력과 기생하기 위해 각종 친정부적인 집회를 개최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도리어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심지어는 종교적인 님비의 극치를 보여주는 기독정당의 출범까지 공표하는 작금의 세태를 보며 암담하다 못해 참담함을 느끼는 것은 개인적 취향이라고 몰아붙여도 어쩔 수 없는 서평자의 고집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서평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스펙트럼을 대변하는 것 같아 위안이 된다. 교회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세상에 대한 관점은 선교적 대상이라는 차원 앞에 주군이신 예수께서 보셨던 사람에 대한 사랑이 먼저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옳다. 교회가 있어야 할 삶의 정황은 세상의 아픔이 있는 곳이다. 아픔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눈뜨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교회이고, 권정생 선생처럼 도무지 이유도 모른 채로 죄도 없는 이라크의 어린아이들이 미국의 미사일 공격에 싸늘하게 죽어갈 때 열이 40도가 넘었다는 그 아픔을 가져야할 곳이 교회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해야 할 일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저자의 역설이 가슴에 와 닿는다. 책의 말미는 참 귀하다. 가끔 목사로 잊고 살아가는 것을 고즈넉하게 포개어 놓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철학자가 ‘느린 삶’에 대하여 강의해 달라는 방송국의 강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가 느림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 바빠지는 것이 싫어서였다.” 나는 이 글을 접하다가 왜 이리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나는 목사로 산다. 세상 사람들 중 저들만의 리그에 속했다고 비아냥거리는 개독교 먹사로 살고 있다. 허나 이 철학자의 성스러운 고집을 목사인 나도 갖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저들의 공격이 뭐 그리 대수롭겠는가 싶다. 아니, 정말로 전술한 철학자의 정신과 왕고집을 갖고만 살 수 있다면 어찌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이 비극의 사태가 초래될 수 있겠는가? 책을 읽고 나니 대리만족도 물론이지만 큰 산을 함께 저자와 넘은 것 같은 희열이 넘쳐 행복하다. 김기석 목사는 서평자와 그리 큰 연륜의 차이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큰 위로를 주는 선배요, 큰 산과 같은 존재이다. 부족한 사람이 일주일에 꼭 들려 설교를 듣는 세 사람 중에 하나인 이유를 다시 한 번 이 책을 통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확신했다. 촌스럽고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은 못난 후배 목사를 위해 선배의 건강을 중보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