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성석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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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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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01-28 22:2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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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투명인간’을 읽고 (창비 간, 2014년) 바로 보는 사람이 바보다. 김영삼 정부 시절, 초대 부총리를 역임한 재야 원로 학자이자 기독교계의 지성인 한완상은 이렇게 갈파했다. “예수따르미들은 예수의 바보스러움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바보스러움 말씀을, 바보 같은 결단과 삶을 새롭게 확인해야 한다.” 왜 기독교계의 원로 학자가 이런 도발적인 발언을 했을까? 그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토양이 기존 한국교회의 상당수 교회가 지지하고 있는 교리적인 색채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그가 줄곧 주장해온 ‘역사적 예수’의 패러다임으로 조망해 볼 때 예수는 기존의 산헤드린 종교 정권의 틀로 해석하면 말 그대로 시대의 흐름을 간과해 버린 바보임에 틀림이 없지만 노학자가 언급한 바보 예수 주장은 가장 시대를 정확하게 통찰하여 관통한 ‘바로 보는 사람’이 예수였기 때문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 박사가 조명한 것 중에 “예수가 자신의 생애 중에 가장 바보스럽게 선택한 선택이 스스로 죽으러 가는 메시아임을 자처한 것”이라고 평가한 점은 잔머리를 굴리는 데에는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는 자들에게는 돈키호테 같은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의 진면목을 성찰하는 자들에게는 의미심장하다. 근래, 서평자가 줄곧 느끼는 소회 중에 하나는 ‘바보’가 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많이 보이지 않는 아쉬움이다. 반면, 너무 약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져 가고 있다는 것 말이다. 예수께서 바보였다면 그를 따르는 자들이 똑똑해서야 되겠는가? 이반과 만수와 예수님을 참 많이 닮았다. 성석제의 투명인간을 읽었다. 저자의 글을 읽고 난 뒤에 나는 제일 먼저 톨스토이의 고전이었던 ‘바보 이반’이 떠올랐다. 성실함을 금권과 정치권력이 이기지 못한다는 톨스토이의 걸작 말이다. 오래 전 대학 학부 때 나는 이 책을 영문판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집중력이 더 필요하다보니 톨스토이가 이반을 등장시켜 독자들에게 주고자 했던 글감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80학번인 서평자는 대학 1학년 때 신군부 세력들의 정권 잡기로 인해 1학기를 거의 집에서 보내는 말 그대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당시 영문독해를 담당했던 교수께서 수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준 book-review 가 나다나엘 호돈의 ‘주홍 글씨’와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이었기에 이 두 권의 책은 군사 독재 권력에 동료들은 스러져 가고 있는 바로 그 때 당시 역사의식이라고는 눈뜨고 찾아볼 수 없었던 서평자는 철없이(?) 좋은 학점을 취득하기 열심히 공부했던 텍스트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로 보면 바보 이반은 나에게 치욕적인 기억의 산물이다. 그랬던 이반을 성석재의 글을 읽으며 다시 건져 올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투명인간’의 주인공 만수에게서 이반을 보았고, 또 예수의 삶이 보였기 때문이다. 투명인간인 만수는 참 바보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 만수에게서 서평자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 참 바로 보는 사람이 보였다. 그래 그랬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1960년 생 김만수는 베이비부머이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의 격동을 직접 경험한 세대라는 말이다. 그는 3남 3녀 중에 넷째로 태어났다. 작가의 글 솜씨이겠지만 3남 3녀 중에 유독이 만수만이 아이큐 100 정도의 평범한 둔재였고 나머지 형, 남동생, 누나, 여동생들은 150을 넘나드는 수재들이라는 특징이 있는 가족 구성원이었기에 항상 그는 주목의 대상에서 열외였다. 거기다가 걸음마도 늦고, 온갖 피부병은 다 갖고 있어서 커서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를 염려하던 걱정거리였다. 그런 만수는 ‘투명인간’의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자리 매김을 한다. 만수의 형 백수는 머리가 비상해서 어려서부터 줄곧 1등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는 터라 개운리라는 깡 촌중의 깡 촌에서 서울로 대학을 들어가는 동네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고향의 넉넉하지 않은 경제 사정으로 인해 소 팔고 땅을 팔아야 등록금을 댈 수 있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자업(自業)을 하면서 공부를 했지만 도저히 그 일을 계속할 수 없어 당시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이었던 월남 파병에 지원하게 된다. 개운리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장남으로서 책임감도 있고, 자상하기까지 한 장남 백수는 그렇게 선택을 하고 월남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근대 한국사의 비극인 월남 전쟁에 참여한 기둥 같은 백수는 고엽제로 인해 개죽음을 당하고 싸늘한 시신으로 귀국하게 된다. 이 시점을 기회로 만수의 집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개운리는 백수의 흔적 때문에 도무지 살 수 있는 장소가 못 되었다. 형의 죽음으로 인해 졸지에 장남이 된 만수는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고 이윽고 베이비부머들의 서울 이주로 벌어지는 각종 빈민층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큰 누나는 살림의 밑천이었지만 그 힘든 생활을 못 이기고 결혼을 하고, 작은 누나는 가스 중독으로 인해 백치가 되고, 남동생 석수는 전형적인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의 전형이었기에 형으로 인정도 하지 않는 백수에게는 치명적인 걸림돌 역할을 하였고, 막내 동생 옥희는 명문대학에 입학하여 잘 나갔지만 역시 만수에게는 학비를 대 주어야 하는 또 다른 부담이었다. 다행히 5년제 공전을 가까스로 졸업한 만수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중견 기업에 취직하여 그의 원만한 성격 덕에 오너들에게는 이용가치가 충분히 있는 쓸 만한 충견이라는 미명하에 그런 대로 잘 나가는 직장생활을 한다. 이유 없는 삶이 있을까? 세상은 착한 사람들이 살기에는 너무 오염이 되었나보다. 착하고 착한 만수에게 시련이 밀어닥친다. 그가 경험한 고통은 한국 사회가 근대 산업화 사회에서 현대 서비스 산업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힘없는 자들만 당해야 했던 구조악과 같은 물리적 시련이었다. 만수가 다니던 자동차 부품회사는 급격한 구조조정과 시대적인 다변화의 물결에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회장은 공장을 폐쇄한다. 졸지에 부품 회사가 망하게 된 것을 목도한 만수는 회사 동료들 7명과 구사운동을 하며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만수는 빚쟁이들이 회사를 적절한 시간에 가동하지 못함으로 얻게 된 일련의 모든 피해 보상을 만수에게 떠넘긴 재판에서 패소하여 만수는 본인에게는 천문학적인 돈인 수억 원의 빚만 지게 된다. 정말로 억울한 일이었지만 만수는 신문배달을 비롯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일체의 일들을 택해 하루 20시간 씩 일을 하면서 결국에는 모든 빚을 청산하여 신용불량의 터널에서 벗어난다. 허나 만수에게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늦게 만나 결혼한 아내가 급성신부전으로 인해 투석을 해야 했고. 남동생 석수가 불장난으로 만들어 놓은 조카 태석을 맡아 양아들로 키웠는데 아들이 심리적 불안으로 인해 야스퍼거 증후군, 틱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심각한 왕 따를 당하며 폭행을 당하던 아들 태석이 결국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선택한다. 태석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며 큰엄마에도 패륜적으로 행동하며 막 살았지만 죽기 직전 자신을 키워준 큰엄마에게 자신의 신장을 주어 큰엄마를 살린다. “끝으로 나는 내 신장, 나의 몸 전체를 나를 키워준 여자한테 돌려준다.(P.346)” 태석의 유언장과도 같은 이 글에서 서평자는 울었다. 장면이 바뀌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진다. 이 장면은 소설의 맨 앞부분과 다시 합쳐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만수의 죽음이다. 서평자는 작가는 글의 결말을 갖은 고생을 하며 법이 없어도 살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온 만수의 해피엔딩으로 마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헛헛함으로 결론이 났다. 만수는 한강에서 투신했다. 저자는 만수의 시신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왜 작가는 만수의 시신을 독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했을까? 아마도 소설의 제목이 주는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만수는 투명인간으로 글의 끝말에 다시 나타난다. 이윽고 투명인간이 된 만수는 또 다른 투명인간들과 대화를 한다. 투명인간만이 투명인간을 볼 수 있다. 당신도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 서평자는 작가의 여운을 높이 평가한다. 그 여운을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독자들이 몫이니까. 글을 읽으며 되뇌고 또 되뇌었던 것이 있었다. 오늘 내가 사는 이 땅에는 또 다른 제 2의 만수, 제 3의 만수가 얼마나 많은가? 의 감회 말이다. 오늘 내가 사는 이 땅에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못 받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권력이 없어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짓밟혀야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시대의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청파 교회 김기석 목사가 차정식 교수와 함께 집필한 ‘인생 교과서, 예수’에서 이렇게 갈파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구원받은 삶이란 파편화된 삶의 총체성이 회복된 삶이다.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따로 있지 않고, 여기와 거기, 나와 남이 따로 있지 않다. 영원의 반대말은 시간이 아니라 나뉨이고 흩어짐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순간을 영원에 잇댄 채로 살아간다.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따라서 아무 것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목회를 목사이기에 김 목사처럼 영원을 잇대어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존재 중에는 하찮은 존재가 없다는 그의 말에 100% 동의한다. 헌데 실상이 그런가? 내가 사는 이 땅에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불쌍한 영혼들이 얼마나 허다한가? 지금 우리들 가운데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갑의 갑질에 의하여 을로 어쩔 수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민초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자유주의의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난 기형아가 누구인가? 극단적 양극화라는 괴물이지 않은가? 이 사회적 기현상으로 인해 수많은 투명인간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또 만들어질 것이 자명하다. 세계적인 평론가인 수전 손택이 이렇게 토한 글을 본 적이 있다. “파시스트의 미학은 생명력을 억제하는 것에 기반 한다. 움직임은 절제되고, 경직되고, 억제된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주변 지천에 깔려 있는 투명인간들이 살고 있는 오늘의 시대만큼 더 심각한 파시즘적인 세상이 또 어디에 있으랴! 세속적 이데올로기의 괴물과도 같은 변신, 인문학적 사변의 업신여김 당함, 경쟁구도에서 1등만이 기억되는 세상이 그렇게 만든 투명인간들이 즐비한 시대야 말로 미친 세상임에 틀림이 없다.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교회의 존재 목적이 질문된다. 가장 행복해야 할 인간들이 투명인간들로 살아가도록 일체의 구조들이 요구하고 있는 이 시대, 교회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서평자는 두 가지에 천착하고 싶다. 먼저는 투명인간을 가장 아름다운 영혼으로 인정해주는 교두보가 교회이기에, 다른 하나는 교회는 내가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작금의 현실에서도 이 세상은 정말로 살만한 곳임을 만들어가는 브릿지 역할을 해야 하기에. 서평을 마치려니 내가 좋아하는 노래 구절이 생각이 난다. 소개하면 수구적인 근본주의자들이 이 노래는 뉴에이지 노래이니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노기를 또 발하며 서평자를 사탄 취급하겠지만 그냥 사탄이 되어 보련다.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I'll lay me down/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I'll lay me dow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