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나타난 여럿 후유증들이 있다. 어느 한 가지로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어 외상없는 교통사고가 더 위험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토로하자면 서평자에게 근래 들어 약간의 후유증 현상으로 나타난 것 중에 하나가 이명증(耳鳴症)이다. 물론 아주 미미해서 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글을 읽다가 저자의 심각한 육체의 가시가 삶을 포기할까? 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할 정도의 중증 이명증상이라는 토로를 내내 읽으며 그 고통을 나름 상상해 보니 아찔했다. 해서 약간의 symtom(전조증상)이 있는 서평자는 작가의 심리적, 육체적 아픔을 가히 짐작할 만했다고 말하는 것은 솔직한 고백이다. 도무지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명증의 고통에서 작가는 지금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헌데 그는 그 지옥 같은 살인적 육체적 고통을 나름 극복해 나아가고 있다. 그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단언하여 기독교 신앙이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아, 여기에서 너무 상투적인 이야기로 작가의 고백을 듣지 않기를 서평자는 소망한다. 그의 고백은 소위 말하는 기독적인 고유의 언어인 신앙 간증의 차원으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글을 열면 제일 두드러지게 각인되어 눈을 뜨게 해 준 고백이 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제겐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P.193)
저자는 이 고백을 스스로 이렇게 부연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더 어려웠다는 의미입니다.” (상게 인용 글과 동일 페이지)
서평자는 저자를 알게 된 동기가 다른 독자들도 거의 대동소이하겠지만 그의 걸작인 ‘연탄길’ 때문이었다. 당시 저자에 대해 책을 통하여 접하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느낌은 ‘삶에 대한 진솔함’이었다. 물론 현직 목사로 크리스천인 저자의 이력을 차치하고서 말이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저자의 이 고백은 너무나도 진솔하게 다가오는 고백이었다. 동시에 오늘 서평자도 목회 현장에서 매일 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사역하는 같은 테제이기에 더 더욱 그의 고백이 가슴에 절절하게 남았다.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회, 또 그 가운데 존재하는 소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의 신앙인들 동시에 제대로 된 이성적 신앙을 갖고 있는 자라면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의 두 번째 고민에 도달하면 말 그대로 진솔하게 ‘나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에 대한 긍정적 답을 내리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에 대하여 목사인 나도 별로 자신이 없으니 일반 독자들 역시 도찐개찐일 것이라고 말하면 과유불급인가?
가장 아프고 더 서글픈 것은 오늘의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일련의 멘트와 메시지들이 거부당하고 있는 이유가 실은 자업자득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목사가 목사에게 칼을 겨누고, 현장 목회자가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에게 몰래 카메라를 찍고, 비리와 탈루의 현장에는 영락없이 기독교인이 연루되어 있는 작금의 상태는 작가가 책에서 나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 의 대답이 더욱 힘들다고 고백한 근본의 원인처럼 들려서 서평자는 그의 멘트가 작가 개인의 고백인 아닌 한국교회에 속한 전 크리스천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심히 아프고 또 아팠다.
이런 아픔들을 책을 통해 느끼고 또 느꼈지만 서평자는 그럼에도 이 책을 덮고 나서 책읽기 난 뒤의 사족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따뜻했다. 행복했다. 참 오랜만에 가슴 벅찬 글을 읽어 기뻤다. 지금 같은 하늘에 이런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이 목사로 너무 보람되고 행복했다. 날씨는 4일째 꾸물꾸물하지만 내 마음의 하늘은 청명했다.”
서평자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신선한 신앙고백을 듣고 보면서 작은 위안과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대체로 작가의 고백대로 ‘상처 입은 치료자’ 유명한 헨리 나우웬의 ‘영적 발돋음’에서 힌트를 얻은 ‘잘 믿는 것’에 대한 답을 대리 선포해 준 희망이기도 하다. 진부한 이야기로 들려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다시 전해본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둘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 셋째, 신뢰하는 마음으로 영적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P.200) 작가의 이 접근에 대하여 기독교를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을 법한 말, 천연 기념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말 등등으로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나이브한 고백이 왜 이리도 신선하게 들리는지 서평자는 귀하고 귀하게 들린다. 적어도 현대 의학으로는 아직도 치료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명증상이라는 극한 고통의 터널 속에서도 저자가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용솟음치는 샘물의 맛있음을 독서하는 공급해 주어 그 물을 내내 먹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저자의 심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그의 아름다운 샘물을 서평을 통해 먹으려는 잔머리를 굴리지 말고 꼭 한 번 커피 한 잔 값을 아껴 독자들의 보물들로 구입해 섭취해 보시기를 서평자는 기대해 본다.
사족 하나,
저자는 C.S 루이스의 글을 하나 인용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 (P.146)
서평자는 감히 일설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모두는 본인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사족 둘,
저자는 이런 고백을 남겼다.
“저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지나친 확신은 빨간색 편지지에 쓴 빨간색 색연필처럼 저의 눈을 가릴 때가 많았습니다.” (P.200)
서평자는 자신 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싶어 하는 이들이여, ‘예수 믿으면 행복해질까’의 첫 페이지를 열면 하얀 백지에 선명한 까만 글씨로 기록된 다음의 문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2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