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의 ‘울림’을 읽고 (한겨레출판사, 2014년) 1980년 초, 서평자는 대학 학부를 다닐 때 ‘cynical’ 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피부로 가까이 느낀 시절을 보냈다. 이유는 지성의 요람인 대학에 입학하여 무려 한 학기를 학교에 등교하지 못하게 했던 또 다른 신군부 독재자들의 출현으로 인하여 대학 생활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간절히 소망하던 조국의 민주화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한 1980년의 봄은 정말 추웠다. 그래서 그랬던가? 어찌어찌 내 몸에는 국가에서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아우라가 드리웠고 그러다보니 내 성향이 상당히 냉소적인 마음 밭으로 진화했던 것 같다. 해서 대학 시절의 젊은 초상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싸늘함이 나를 지금도 에워싸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나를 구원한 것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 분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내 인생의 판이 어찌되었을까? 를 상상하면 소름이 끼치는 것은 나와 주군과의 관계에서만 나눌 수 있는 밀어이리라. 총칼을 든 세속의 국가는 이제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고 확신하며 당시 정권에 아주 냉소적이었던 서평자는 일반대학에서의 학문을 포기하고 주군을 위하여 평생을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신학교에 편입하였다. 모교인 서울신학대학의 캠퍼스에 편입학 원서를 접수하기 위해 처음 방문했을 때 얼마나 순진했든지, 나는 마치 베드로가 변화산상에서 주군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겠다고 선언했던 그 가상의 엑스터시를 경험한 둣했다. 눈 내린 캠퍼스의 아름다움과 고즈넉함, 그리고 하나님께서 임재 하여 나를 반기는 듯한 그런 황홀함이 네게 엄습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신학대학을 입학할 때의 영성은 수도원적인 영성(?) 이라고 하지 않는가? 서평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경험했던 황홀했던 영적 엑스터시가 깨지는 것을 경험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들어간 소위 말하는 선지동산(신학교를 자체적으로 그렇게 지칭했음)에서 발산하는 세속적 영역을 넘어서는 코를 찌르는 썩는 냄새로 인해 받은 충격 때문에 학교를 그만둘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아이러니를 경험했으니 말이다. 반추하자면 신학교가 썩은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동종이 언제나 그런 것을 내가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체계화되어 있는 조직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 현장에서 사역을 한 지 어언 2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오늘 나는 또 다른 것 때문에 목말라하고 있다. 그것은 순서가 바뀐 것에 대한 분노와 주체할 수 없는 크리스천 자존감의 무너짐 때문에 엄습한 갈증이다.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살려달라고 외쳐야 하는데 반대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살려달라고 하는 순서의 뒤바뀜, 그리고 그로 인하여 세상으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냉소를 받고 있는 내 조국의 교회를 보면서 끓어오르는 아픔 때문에 잠자리를 설칠 때가 많다. 강아지 똥의 작가인 권정생 선생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전쟁이고, 사탄의 정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전쟁이라고 갖다가 붙인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에서 부시가 바그다드에 쏟아 붓는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죽어갈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며 그날 밤, 열이 40도까지 치솟았다고 토로했는데 도리어 내 조국의 교회는 그런 부시를 초청하여 간증 집회를 하고 있는 현실에 더 이상 무슨 낯을 들어 세상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서평자는 단언하여 말하건대 보수적인 심성의 사람들이 할 말이 없을 때 흔히 말하는 좌향좌를 한 왼쪽 편에 기울어진 이데올로기를 기초한 목사가 아니다. 서평자는 그냥상식적인 것을 말하고 싶은 촌구석에서 목회를 하는 평범한 시골 교회의 목회자이다. 허나 항상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은 주군의 마음이다. 이것에 천착하다보니 가장 힘들고 괴로운 것은 교회가 세속에 대하여 전혀 감동과 감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목사로서의 자괴감이다. 작년 연말에 하던 운동 중에 손가락 골절을 당했다. 태어나 처음 뼈가 부러진 아픔을 경험하면서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고마운 친구가 ‘울림’ 이었다. 개인적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평자는 한겨레신문을 구독하던 독자였다. 허나 젊어서부터 함께 하였던 한겨레신문 구독을 중단했다. 이유는 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임을 미리 밝히지만 또 한편의 편협성을 개인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내 나라의 일간 신문 중에 한겨레신문의 공정성 보도를 최고로 신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신문의 구독을 중단한 이유는 기독교에 관한 분석 기사를 들추어 볼 때마다 어느 시점부터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평자가 전술했듯이 나는 누구보다도 기독교의 내부적인 세속화에 가슴 아파하는 목사이기에 기독교가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비평적 논객이나 네티즌이나 내부적인 자정 능력을 호소하는 지적인 나무람들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허나 반대로 여론의 역할 중에 하나는 그 반대의 급부 역시 공정하게 보도하고 다루어야하는 것이 정론인데 한겨레신문에서는 이것을 포기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조국교회 중에 그런 괄목할만한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가 없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한겨레신문의 종교전문기자인 조헌 기자가 ‘울림’에서 소개한 한국교회의 오늘의 또 다른 영성가들을 지속적으로 발견해 나아가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마치 저자가 ‘울림’에서 책의 전반부에 먼저 기록한 저명한 기독교 인사들에 대한 기록보다 훨씬 더 중요한 책의 말미에 소개한 아주 작은 썩어진 밀알과도 같은 영성가들을 줄곧 추적하여 한국교회가 긍정적 희망의 실타래를 풀 수 있다는 꼭지가 있음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 이 땅에는 아직도 내 삶이 내 유언이라고 말했던 오늘의 규암 김약연 목사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내 삶이 메시지라고 선언했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영성을 갖고 살아가는 한국교회의 숨어 있는 작은 예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조헌 기자가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울림’에서 제일 먼저 소개한 ‘권정생 선생’ 과도 같은 또 다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한국의 산야에서, 어두컴컴한 토굴에서, 또 수많은 기도 동산에서 조국과 이웃과 힘없는 과부와 객들을 위하여 중보하며 무릎을 살며 삶으로 실천하는 자들이 더 많은 것을 서평자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병상에서 조한 기자의 ‘울림’을 읽다가 가슴 저밈으로 울었다. 복에 환장한 한국불교의 사판승들보다 그들의 스승이 가르쳐 주었던 불교적 영성의 실천을 위해 오늘도 작은 암자에서 빈(貧)함을 벗하여 수도하고 있는 이판승들이 더 많기에 오늘의 불교가 굳건한 것처럼 나는 우리 한국교회도 계속해서 저자가 소개한 오늘의 교회를 있게 만든 신앙의 선배들처럼 이판적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기를 두 손 모아보았다. 조헌 기자가 쓴 ‘울림’은 상식의 은혜를 추구하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양서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는 추락한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벤치마킹 할 신앙 선배들의 삶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강추한다. 2015년 12월 2일 22:23분 병원 침상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