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고린도전서에 나타난 9가지 은사 중에 나는 어떤 은사를 받았는가? | 경배와 찬양 (WORSHOP)●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송가 79장) ● 성령의 은사를 (찬송가 196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4) ● 본문 : 고린도전서 12:8-11 1) 영 분별함의 은사의 성경적인 이해와 오늘날의 이해를 정확하게 인지해 보자. ⓵ 주후 1세기의 시대적 상황에서의 영분별 은사 이해 (요한일서 4-14절 참고) ⓶ 21세기 영분별의 은사 이해 (설교 테제를 중심으로) ⓷ 예언함의 은사: |
2) 방언의 은사와 통역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①② 번은 방언과 관련하여 그리고 ③ 번은 통역과 관련하여 ⓵ ⓶ ⓷ |
3) 적용하기 ⓵ 영분별의 참된 능력은 십자가 사건의 내재화가 이루어질 때라고 했다. 나는 십자가 사건을 나에게 체화시키고 있는가? ⓶ 성령과 친밀하고 그 분이 나를 통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가? 이것이 방언의 위력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라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서정수, 김경옥, 이종구, 이상순 등등) 2) 시험 성적으로 토대로 수험생들의 진학에 대한 지혜를 위하여 3) 해피 엔딩기도회를 통해 하나님 교회의 기도 사역이 응답받도록 4) 성탄 행사 (축하의 밤, 새벽송, 성탄절 예배) 5) 12월 31일 송구영신 주일 영혼 추수를 위하여 6) 12월 사역을 위하여 7) 제 10회 사무총회를 위하여 (2018년 1월 7일) 8)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 설교요약 (SUMMARY)12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4번째 강해) 제목: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4) 본문: 고린도전서 12:8-11
예배의 대상이 예수가 아닌 예배는 헛수고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주가 아닌 혹은 주가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음에도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1) 영 분별함의 능력 즉 그 은사에 대하여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영 분별함의 이해는 요한일서 4:1절을 토대로 한 해석입니다. 주후 1세기에 소아시아 교회와 심지어는 예루살렘 교회까지도 궁지로 몰아넣으며 괴롭혔던 위험한 이단인 영지주의의 세력은 교회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세력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견고한 율법의 진은 또 다른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을 복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왜곡시키며 거부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주후 1세기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거짓 예언자와 신실한 하나님의 예언자를 그리고 거짓 예언의 정체와 복음을 구별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치열함의 한 복판에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오늘 본문에서 7번째의 은사로 영 분별함의 은사라고 소개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들 분별함을’이라는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선(先) 지식은 ‘프뉴마톤’ 즉 ‘영’ 을 ‘영들’이라고 복수로 피력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주후 1세기 성도들을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하는 영적 대적이나 혹은 그것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시사입니다. 더불어 이 영들에 대한 파악과 분별이 당시 녹록하지 않은 성도들의 싸움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분별함의 은사는 대단히 중요한 시대의 영적 능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0절 중반절에 기록되어 있는 영들 분별함의 은사란 과연 무엇일까? 이 은사의 파악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영들 분별함은 성령의 활동을 가려내는 능력입니다.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을 아주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언어로 성토하였는데 바로 거짓 선지자라고 정의한 점입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이 다른 거짓 영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들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그들을 다른 거짓의 영에 좌우되는 존재들이라고 서슴없이 공격한 까닭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2-4절).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가진 자들에게 임하는 복은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그들과 싸워 이기게 하시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점입니다. 이 복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복의 능력이 주후 1세기 고린도지역에 있는 참 된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여전히 진행되는 복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주후 1세기에 영들 분별함의 은사라는 능력은 영지주의자와 같은 이단적 사설과 적 그리스도적인 일체의 것들에 대하여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짓 예언이나 예언자를 구별해 낼 수 있는 주후 1세기의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인정하면서도 오늘 21세기에 신앙의 여정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영들 분별함의 은사라는 복된 능력은 조금 더 외연을 확장하여 교훈을 삼을 수 있습니다. ※ 영들 분별함의 은사라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나에게 현재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거짓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도 현재화될 때만 가능합니다. 내 안에 예수께서 나를 인격적으로 구원해 주시기 위해 행해주셨던 십자가의 그 은혜가 현재 접목되고 있는가는 내가 거짓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인가를 구분해 주는 시금석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현재적으로 육화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내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내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 그 분만이 내 안에 예수께서 살아서 역사하시는가를 분별해 주는 능력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영들 분별함의 은사에 대한 현대적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함부로 정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나의 영적 상태를 알게 해 주시는 성령의 인격적인 도우심이지 남의 영적 상태를 파악하게 하는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되어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영 분별함의 은사는 이념일 수 없습니다. 영 분별함의 은사는 철학일 수도 없습니다. 영 분별함의 은사는 개인의 소신을 주관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아집도 아닙니다. 영 분별함의 은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나에게 현재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사를 받은 진짜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영이 내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부여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있어야 합니다. 언어도 예수를 닮아 있습니다. 삶의 내용도 예수를 닮아 있습니다. 인격도 예수를 닮아 있습니다. 이것이 영 분별함의 은사를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2) 8, 9번째 은사는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에 대한 공동번역은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공동번역에서 방언을 이상한 언어라고 번역한 것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임을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께서는 이렇게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이라는 은사를 성도들에게 허락하셨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⓵ 성령 하나님의 친밀성을 나타내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1절에서 ‘그의 뜻대로’ 라는 말은 성령님이 허락하시는 방언은 참 좋은 것이라는 대전제를 말합니다. 주의 뜻으로 주어지는 은사 중에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천되는 것은 성경에 의하면 대체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함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방언 역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한 분명히 좋은 의지의 실천이라는 마중물로 성도들에게 주신 선물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재철 목사는 ‘성숙자반’ 에서 방언의 유익을 말하면서 제일 두드러진 것으로 성령께서 나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방언의 대 전제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이기에 수긍하게 됩니다. 방언기도는 내 의지를 전제로 내 감성을 두들겨서 내 입술로 기도하는 일반기도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내 지정의를 지배하여 내 입술을 열어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기도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전적인 성령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23장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이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저주가 아닌 축복의 기도를 하도록 발람의 입을 제어하십니다(민수기 23:16절). 하나님이 발람의 입술을 주장하셔서 선포한 민수기 23:18-24절은 축복의 메시지였습니다. 발람은 비록 하나님이 보시기에 형편없는 예언자였지만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때 그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은혜의 순간을 경험하였습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하며 그에게 기도하게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⓶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을 비롯한 일체의 은사는 성령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임을 11절이 증언합니다. 특별히 방언은 그 공급함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는 외적 은사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 2:6-8절). 이어지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1절 후반절).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의 역사에 따른 방언의 말함을 보았던 모여 있던 자들의 평가입니다. 방언의 공급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선명한 증거입니다. ⓷ 방언 통역의 은사는 이런 하나님의 친밀하심, 그리고 일하심을 공동체에 알게 하는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통역’ 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르메네이아’는 원래의 의미가 ‘해석하다’입니다. 9번째 은사는 하나님이 하게 하신 기도가 알아듣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기에 그것을 교회 공동체가 알 수 있도록 해석해 주는 은사입니다. 다시 말해 방언이라는 은사의 절정은 하나님이 이 기도를 하게 하신 궁극적인 뜻을 공동체에 알려주게 하는 해석(통역)의 은사입니다. 나만의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의 저변 확대 은사가 통역의 은사입니다. 그렇다면 통역의 은사는 공동체의 질서와 유익을 위함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라고 해도 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영적인 친밀감과 일하심과 공급하심과 알게 하심이라는 은사를 발휘하게 할 때 그 공동체에 큰 영적 감동이 임합니다.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들 각자에게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내 신앙의 인격 안에서 가장 가깝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9가지 은사의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이 좋은 은사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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