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세상 모두 사랑 없어 (찬송가 503장) ● 너 성결키 위해 (찬송가 420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여호와의 말씀이 그랬습니다. ● 본문 : 요엘 2:12-14 1)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요구하신 관계 회복의 전제 조건 7가지를 말해보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관계회복의 증표를 오늘의 언어로 설명해 보자. ⓵ 12절의 5가지 ⓶ 13절의 2가지 ⓷ 관계회복의 증표 |
2)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는 메시지는 오늘의 언어로 무엇을 말하는가? ⓵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과 연계하여 중요한 구절을 담아보자. ⓶ 내가 삶의 밑줄을 긋는 신앙생활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와 관련하여 설명해 보자. |
3) 적용하기 ⓵ 성경에 밑줄 긋는 삶과 삶의 밑줄 긋는 삶을 1인칭 객관화하여 적용하자. ⓶ 세인 교회 공동체가 삶의 밑줄 긋는 행위에 대하여 적용해 보자. 우리 교회는 기형도 시인이 살던 교회인가? 아닌가?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2) 대학 진학을 앞 둔 수험생들을 위하여 3) 가을 전 사역을 위해 4)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하여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셀 사역하기
1) 가을 사역에 지체들을 독려하여 최선을 다해 참석하도록 독려하기 (스케줄 조정) 2) 식탁공동체 기쁨으로 감당하도록 최선을 다하기 3) 차량 연보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하도록 권면하기 (11월 첫 주와 둘째 주에 진행) 4) 우리 교회 추수감사주일은 11월 26일 주일에 드려짐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10월 18일 수요 기도회 설교 제목: 여호와의 말씀이 그랬습니다. 본문: 요엘 2:12-14
요엘은 주전 4세기 즉 500년-400년 사이에 활동한 예언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요엘이 활동했던 주전 4세기 남쪽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스룹바벨 성전을 기대를 걸고 재건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나라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기에(주권상실, 경제피폐), 남 유다의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과 불신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업신여기기 일쑤의 시대적 정황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무거운 영적 정황 앞에서 요엘이 꺼낸 든 카드가 종말론적인 심판의 신탁이었습니다. 1장부터 요엘은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선언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이 구절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요엘서 전체에 포진되어 있는 우리말 ‘날’로 번역된 히브리어 ‘욤’입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는 것이 요엘의 신탁이었다는 말입니다. 요엘이 선언했던 여호와의 날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기 몸무게의 3배를 먹어치우며 지나간 자리를 초토화시키는 메뚜기 떼의 재앙으로 상징화 한 것은 적절합니다. 주전 5세기 후반과 4세기에 남 유다에 만연되어 있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을 잠재우기 위한 여호와의 날에 대한 임박한 종말론은 그래서 당시 유다의 상황으로는 시의적절한 메시지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해져 있고 그 심판을 피할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예언자를 통한 긴박한 종말의 선언이라는 긴장감 안에서도 여지를 열어놓으셨고 빈틈을 보여주신 아이러니의 영역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본문 12절과 13절에는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신 7개의 동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에 금식하다, 울다, 애통하다, 마음을 다하다, 돌아오라 13절에 옷을 찢지 말라, 마음을 찢으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이 이 7가지의 행동을 유다 백성들에게 촉구하신 이유를 본문 13절 하반절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이 계획하신 심판의 포기와 유예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성품의 주군이시며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사랑)가 크신 분입니다. 앞선 7가지의 행동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은 이런 성품의 소유자이시기에 심판을 다시 생각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예언자는 갖게 합니다. 그러면서 예언자 요엘은 대단히 중요한 결론을 본문 14절에서 맺습니다.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이 구절이 주는 영적 시사점은 ※ 무너진 관계의 회복입니다.
누가복음 10;38-42절을 보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기사가 등장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10:40) 마르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는 ‘에이페’입니다. 우리 성경에 ‘명하사’라고 번역된 동사입니다. 2인칭 명령법 동사입니다. 자세히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당신이 명령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관계가 깨지면 하나님께 요청하거나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명령하는 불경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께 명령하는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입장에 서지 않고 자기의 입장에 서게 된다는 점입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본문에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간음한 여자를 잡아온 유대인들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5) 이 질문은 질의가 아니라 강제적인 명령이라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너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대라는 명령입니다. 관계가 깨지면 정확한 너의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식에 맞는 내 답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이유는 주권의 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이런 주권적인 주체로서의 분명한 의지를 지니신 주님께서 단 한 가지의 경우를 열어놓고 계시다는 것은 정말로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너희들의 죄로 인하여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단절된 예배, 그래서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예배를 다시 드리게 해주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행하신 이 은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대 전제가 필요합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을 상고할 때 한 가지로 교훈을 삼을 수 있습니다. ● 삶의 밑줄을 긋는 신앙적 삶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조금 부연한다면 형식주의적인 신앙의 타파입니다. 반대로 삶으로 나타내는 신앙생활의 실천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옷을 찢는 행위는 많을뿐더러 따라 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밑줄을 긋는 실천적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0:25-37절의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친숙한 말씀입니다. 당시의 율법에 의하면 종교 지도자였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지나치게 된 동기는 그들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제사를 앞두고 시체를 만지면 안 된다는 율법적인 조항 때문에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에 더 큰 무게를 둡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소개했습니다. 누가복음 10:33-35절은 이렇게 보고됩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이렇게 그의 선행을 소개한 주님이 곧바로 질문을 제기한 자들을 향해 비수를 날리신 촌철살인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0:36-37절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Go and do likewise." 기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타인을 위해서입니다. 삶에 밑줄을 긋기 위해서입니다. 기형도 시인의 시 ‘우리 동네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생활에 밑줄을 긋는 목사나 성도가 살아가기가 참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밑줄 긋는 것으로 자기를 합리화하지 말고 삶으로 살아내는 생활의 밑줄을 그으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랬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