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보았던 은사 중에 참 보기에 좋았던 은사가 있었는지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찬송가 441장) ●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찬송가 197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유익인가? 유해인가? ● 본문 : 고린도전서 12:4-7 1)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삼중의 선물들이 있다. 무엇인가? (4-6절 참고) ⓵ 성령 하나님: ⓶ 성자 예수님: ⓷ 성부 하나님: |
2) 이 세 가지의 선물들 중에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동시에 반면교사는? 3) 적용하기 ⓵ 내 은사 점검하기 ⓶ 유익의 인자가 있다면 지속해야 하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유해의 인자가 있다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과감히 제거하라 ⓷ 성령이 나타내시는 은사를 내 것으로 삼기 위해 이재철 목사의 갈파를 적용시켜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2)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들을 위하여 3)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하여) 4) 한국교회를 위하여 5) 가을 사역을 위해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10월 1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9번째 강해) 제목: 유익(有益)인가? 유해(有害)인가? 본문: 고린도전서 12:4-7
은사(은혜로울 恩, 선물 줄 賜)란 말 그대로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대전제는 은사는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며, 사람이나 특정한 비인격적 주체에 의해서 남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이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이 구절은 바울 사도가 경험한 삼위일체적인 체험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학자들이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교부신학자였던 터툴리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주후 155년 이후의 사람이기에 바울 사도의 연대기보다 약 1세기 뒤의 사람입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바울은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이미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했다는 증거가 바로 오늘 본문 4-6절입니다. 은사(카리스마타)는 성령이 주셨고, 교회 공동체의 직분(디아코니아)은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으며, 교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역사(에네르게마타)의 주체는 성부이신 하나님으로 인하였음을 놀랍게 보고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주목해야 하는 바른 신학이 있습니다. 은사는 전적인 성령의 선물이며, 교회공동체의 직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선물이며,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역사하심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신학입니다. 오늘 우리가 민감하고 바르게 직시해야 하는 은사론에 대한 신학적 조망은 ※은사는 인간의 인위적 조작품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적 작품이라는 교훈입니다.
본문 7절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 이라는 헬라어 단어 ‘퐈하네로시스’의 번역인 ‘나타내심’이 의미하는 것은 복음주의에 입각한 현대 영어 성경 번역으로 의미 중심과 문자 중심의 균형 하에 번역된 God's Word Translation(GWT) 성경의 번역에 따르면 ‘The evidence of the Spirit’s presence (성령의 임재에 대한 증거)’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신유,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이라는 9가지의 은사들이 성령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바울은 분석한 것입니다. 바울이 성령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은사들을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본문 7절 하반절 때문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먼저는 은사를 받은 개인에게 유익하게 함이고, 둘째는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은사에 대한 무질서와 동시에 은사 받은 자들의 무례함 때문에 이 점에 천착하였습니다. 그들이 무례하고 무질서 했던 면을 듀크 대학교의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즉 자신이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천상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이 자신들의 영적인 권능과 성숙의 궁극적인 사인이라고 믿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 예배 모임은 여러 가지 교인들이 성령의 영감 아래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동시에 하면서 무질서한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아마 방언의 과시 속에 서로 잘하려고 경쟁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만찬의 남용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일에 대해서도 공동체의 균열을 가져오는 행동을 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칭찬할 수 없었다.” (고린도주석, p,384)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주기 위해서 나타내신 은사들을 받은 자들이 도리어 그 은사를 신령한 그 무언가를 받은 권위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서 교회 공동체에 유해를 주는 존재들로 변질되었기에 그 무례함과 무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바울은 오늘 본문 7절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의 현상인 은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교회에 공급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자 오늘 설교의 주제요 핵심적인 레마가 바로 이것입니다.
※ 내 은사가 성령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 선물의 은사인지를 확인하는 결정적인 방법은 “내 은사가 교회 공동체와 성도 간의 유익을 주고 있느냐?”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가 교회의 유익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공급해 주신 선물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 은사로 인해 교회가 무질서해지고 나 자신을 나타내는 도구라면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은사이든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라고 착각의 망상에 빠져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유익하게’로 번역된 ‘쉼페론’ 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짐을 함께 옮긴다.’ 는 뜻입니다. 짐이 무거워 두 사람이 함께 짐을 맞들어 물건을 옮긴다는 참 좋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조금 더 의역해서 ‘조화를 이룬다.’는 뜻의 ‘심포니’ 라는 영어 단어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증거인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유는 조화로운 질서와 조화로운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입니다. 은사가 어떤 집회를 통해 주어진다면 그것은 인위적이고 가공적인 은사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은사는 어떤 집회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필요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날마다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설교에서 강조하는 바는 작금 한국교회의 상당수의 영역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의 증거들인 은사가 성령의 나타나심의 증거가 아닌 목사나 특별한 개인의 능력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으로 둔갑해 버리는 것에 대한 반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가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능력으로 인위적인 둔갑을 할 때 문제 많았던 골치 아픈 교회인 고린도교회처럼 질서가 와해되고 교회공동체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탄이 무너뜨리는 집단으로 변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교회를 통해 이미 보았던 바울은 은사 사용에 대한 신중함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린도전서 14:26-30절). 이재철 목사께서 쓰신 ‘사명자반’에 담긴 그의 갈파입니다.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인격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은사 받은 사람은 독선적일 수 없습니다. 은사 받은 사람은 더 겸손하고 더 이타적이고 더 너그러워져야 합니다.”(p, 334) 또한 데이빗 플라이어는 자신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성령은 신령화’ 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은 몸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분이 내 몸 안에서 일하시는 것은 실제로 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가시적 영광이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pp,266-267.)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그만큼 인격적인 영이십니다. 본문 7절에서 바울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성향에 따라 각자 성령께서 주신 은사들을 유익의 도구로 사용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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