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찬송가 272장) ● 다시 일어섭니다. (ccm)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다시 일어섭니다. ● 본문 : 마가복음 5:35-43 1) 믿음의 정의를 베드로가 욕심을 낸 마태복음 16장 기사와 연관하여 설명해 보자. ⓵ 베드로의 욕심: ⓶ 믿음이란 무엇인가? (설교 참고) |
2) 회당장 야이로에게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권면하심 속에 담겨 있는 신학적인 의미는? 3) 적용하기 ⓵ 내 삶의 방향키를 누가 쥐고 있는가? ⓶ 나는 과거의 믿음과 현재의 믿음이 반비례하는가? 정비례하는가? ⓷ 주님이 나의 전적인 믿음을 기초로 주님의 스케줄을 짤 수 있도록 전심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2)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들을 위하여 3)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하여) 4) 한국교회를 위하여 5) 가을 사역을 위해(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별 강좌 및 신앙 강좌)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 설교요약 (SUMMARY)2017년 10월 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다시 일어섭니다. 본문: 마가복음 5:35-43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보면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단 한 마디의 고백으로 천국의 열쇠를 거머쥐는 강복의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 일을 행하신 주님은 곧바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 고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한 뒤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고, 제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 고난 고지를 받은 베드로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습니다. 바로 전에 천국의 열쇠를 획득한 베드로이기에 주님이 죽는다는 것은 곧바로 자신이 거머쥔 축복이 유명무실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선언에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이 구절에서 주목할 단어는 ‘항변하다.’입니다. 영어성경 대부분에서 이 단어를 ‘rebuke’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직역하면 가장 근접하는 단어가 ‘맹비난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런 강력한 항의에 대하여 주님이 다시 반응하신 내용은 서늘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3-24절). 이 구절의 24절을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함께 가려면 내가 가는 길을 따라야 한다. 결정은 내가 한다.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은 불교적 신앙입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의 근간은 내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굳이 정의한다면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이로라는 이름을 가진 한 유대인 회당장의 12살 된 딸이 죽을병에 걸려 거의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예수님이 다시 그 소녀를 살려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야이로는 가버나움의 회당을 관리하는 장이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 지역에서 유대적인 종교의 제반적인 일들을 통괄하는 골수 유대 종교인이었다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관리하던 가버나움의 회당은 상당히 큰 규모였습니다. 그렇다면 회당장 야이로의 위상은 가버나움 지역에서 상당한 종교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실권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문제는 이런 회당장 야이로가 경천벽지의 일을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가 당시 부량아, 노숙자의 리더, 유대의 종교에 반기를 든 불온한 자라고 낙인찍힌 예수를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이런 요청을 합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마가복음 5:22-23절). 믿음이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의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 앞에 야이로의 여러 가지 삶의 정황들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도리어 사회적, 종교적, 지역적, 문화적, 학문적인 정황들은 믿음으로 나아가는데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야이로의 행동에서 주목할 내용은 ‘엎드리어’ 라는 단어입니다. 원어 성경에 이 단어는 ‘상대방의 발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야이로는 주변의 정황들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체신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단지 야이로의 관심은 딸의 치유였습니다. 그러기에 야이로는 당시 상당한 위험인물로 취급되고 있었던 예수께 ‘프로세펩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인 신앙적 행위를 야이로가 보였지만 그가 원하는 바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상황이 녹록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저자의 다분히 의도적인 편집이라고 신약학자들은 진단하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야이로는 숨 가쁜 위기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주님의 지체하심(25-34절의 긴장감)이라는 복병이었습니다. 12년 동안 부인 질환을 앓고 있었던 여인의 방해입니다. 주님이 이 일로 인하여 소녀에게로 가는 것이 지체되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혈루를 앓던 여인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한 야이로 집의 사람들에게서 딸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라는 사람에게 더 이상 부탁하거나 치유를 구걸하지 말라는 비난의 성격이 강한 부정적인 보고를 받게 됩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본문 35절). 이 정도가 되면 야이로의 반응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지체한 예수님을 심하게 원망하든지 아니면 원망은 아니더라도 예수께 치유를 부탁한 것이 이제는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생각하고 물러가는 것입니다. 야이로가 선택할 여지는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당황하고 있는 야이로의 심정을 알아차리신 주님께서 야이로에게 이렇게 적극적인 행위를 요구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본문 36절). 여기에 기록된 ‘믿기만 하라’는 번역은 헬라어 시제 현재 명령법을 표현한 번역입니다. 즉 야이로의 두려움은 아마도 혈루를 앓고 있는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지체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시작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야이로의 두려움이 일찍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바로 이러한 야이로의 두려움을 간파하시고 믿음의 현재성을 강조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과거의 한 시간에 가졌던 순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 때에 가졌던 믿음이라는 행위를 현재까지 여전히 잇는 일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상황은 절망입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야이로에게 지속적인 믿음 유지를 강제한 주님이셨지만 드디어 야이로의 딸이 있는 곳에 도착해 보니 통곡과 비웃음만 가득한 모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불신앙의 징조로 가득 찬 상태였습니다. 이 정도의 정황이라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절망의 나락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막힌 불신앙의 늪에서 주군이신 예수께서 야이로와 그의 아내 그리고 데리고 갔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야이로의 딸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소녀를 다시 살리신 뒤에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장엄한 해피엔딩으로 이 드라마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해를 통해서 믿음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재정리하면, ※ 믿음이란 내 삶의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드림으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일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과거에 일하셨던 주님을 인정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보입니다. 또 반대로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도 보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과거에 나를 위해 일하셨던 주님의 그 일하심을 오늘도 여전히 현재진행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자가 많지 않다는 점은 애석합니다. 이런 신앙의 유리됨, 이런 믿음의 이어짐이 쉽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왠지 믿음이 유치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주님의 선언하심이 과학적 매커니즘의 관점으로 보면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이는 유치함의 극치라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감각의 우상들이 믿음의 연속성을 잇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현대적인 우상들의 괴물들은 내 삶의 결정권을 사수하도록 하지, 주님으로 넘겨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강조하지, 하나님이라고 치부하면 벌떼처럼 공격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고, 믿을만한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유일한 진실은 주군이신 예수께서 선언하신 레마의 말씀입니다. 그 레마의 한 복판에서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함께 가려면 내가 가는 길을 따라야 한다. 결정은 내가 한다.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내 결정의 주도권을 주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내 삶의 방향키를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그 결정권은 결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오늘 지금, 현재의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져 가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쿰’의 은혜는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내 삶의 방향키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믿음으로 인해 하루의 스케줄을 짤 수 있도록 내 삶의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 드립시다. 하나님의 계획이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보다 분명히 더 완벽하다는 것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심을 또한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잘 달려가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함께 감동으로 나누는 세인지체들이 되십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