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누군가로부터 받은 배려 때문에 전율하는 감동을 느껴보았던 적이 있습니까? | 경배와 찬양 (WORSHOP)● 주의 사랑 비칠 때에 (찬송가 293장) ●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찬송가 312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성찰(省察) ● 본문 : 고린도전서 11:23-34 1) 바울이 만찬을 주님의 성찬으로 연결하여 설명한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 ‘기다리라’는 단어에 숨겨져 있는 바울 신학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자기를 살피라: 2) 자기를 살피는 성찰의 결과, 알게 되는 신앙의 정의: |
3) 적용하기 오늘, 우리들이 진정으로 성찰해야 하는 21세기의 신앙적 성찰은? ⓵ 고 옥한흠 목사의 어록 참고: ⓶ 토마스 아켐피스의 갈파 참고: ⓷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지적 참고: ※ 이런 교회와 성도 되도록 전심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2)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들을 위하여 3)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하여) 4) 한국교회를 위하여 5) 한방 국제 엑스포를 담당하는 변태수 안수집사를 위하여 6) 가을 사역을 위해 7)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가을 사역에 최선을 다해 전심하도록
① 가을 대 심방 준비 ② 소그룹 모임 참여자 중보 ③ 셀 원 중에 나약한 영혼 살피기
2) 예배 참여에 최선을 다할 것 3) 통상적 셀 예배 사역 4) 10월 사역 중보 | 설교요약 (SUMMARY)9월 2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7번째 강해) 제목: 성찰(省察) 본문: 고린도전서 11:23-34
성찰은 자기를 살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교회사에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영적 성찰을 철저히 개인화시키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삶으로 되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본문 27-29절). 이 구절은 바울 사도가 주의 만찬이 진행되었을 때 구전으로 증언되던 예수님이 전해주셨던 내용을 그도 듣고 그대로 전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바울은 주님이 인도하시던 만찬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마치 그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갈라디아서 1:12절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했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12사도로 대변되던 제자들보다 그 권위에 있어서 항상 사도직에 있어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위치에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율법주의로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이 즐비했던 갈라디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은 그래서 매일 도마 위에 오를 정도로 그에게는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사도의 권위를 변호하는 글들이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문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문구입니다. 바울은 이 권위를 동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역설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본문 23-26절). 바울이 이 구절에서 선포한 메시지는 바울의 독창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는 만찬에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그 권위가 사도들의 가르침보다 덜 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본문 23-26절의 메시지가 본인이 직접 다락방에서 경험한 내용처럼 현실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다락방에서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메시지에 대한 바울의 성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찬을 베푸시면서 중요한 영적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그것은 언약이라는 신학적 메시지였습니다. 주께서는 내 몸을 먹는 것과 내 피를 마시는 것을 단순히 몸과 피를 먹는 상징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이 성찬이 나를 기념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이 선언하신 성찬의 신학적 교훈을 서슴없이 선포하였기에 이렇게 경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본문 30-34절). 고린도교회는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또한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열거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이유는 공동체가 이기적인 생각으로 이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31절에서 ‘살폈으면’이라는 조건문의 동사로 이 단어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살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성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에 거주하고 있던 바울은 이 아쉬움을 고린도교회의 일부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부유한 지식층의 신자들에게 전하면서 내가 다시 고린도로 돌아가서 이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을 때 돌이키고 행동으로 반응해 줄 것을 종용합니다. 그 내용은 만찬이 시작되었을 때 그것이 끼니였던 가난한 자, 만찬에 아직 일 때문에 도착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기다려주라는 권고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을 기다려주지 못하겠거든 너희들의 집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하라고 강력하게 명합니다. 다시 말해 어려운 자들의 끼니를 빼앗지 말라는 압박이었습니다. 그들의 끼니를 빼앗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판단을 받은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바울은 본문에서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성을 갖고 영적인 성찰을 행할 때 받게 되는 결과는 “신앙은 타인을 향한 배려임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33절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단어는 ‘기다리라’입니다. 이 단어를 톰 라이트 교수는 ‘서로를 존귀한 손님으로 받아들이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예의를 갖추어 서로 정중히 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타인을 향한 배려입니다.
열왕기하 4장은 수넴에 살고 있었던 한 여인이 엘리사를 위해 잘 섬겼다는 기사입니다.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청하건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열왕기하 4:9-10절). 수넴 여인이 남편에게 청한 이 내용은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농후했던 유대적인 정서로 볼 때 상당히 위험천만한 발언일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한 가정의 여인이 다른 남자에 대하여 배려하자는 청은 단순히 신앙적인 내용으로 남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다행인 것은 남편 역시 아내의 청에 동의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과 남편은 엘리사가 쉴 수 있는 공간을 준비했고 그 공간을 엘리사에게 제공한 것이 열왕기하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환대와 호의를 수넴에 갈 때마다 받은 엘리사는 그 부부에게 그 호의에 감사하는 대가를 영적인 기적으로 다시 돌려주는 따뜻한 교제가 4장에서 이어집니다. 아들을 낳을 것에 대한 예언, 그리고 낳은 아들이 갑자가 사망하자 그 아들을 다시 살리는 기적까지 엘리사가 수넴 여인 부부에게 되돌려 주었던 감동의 스토리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받은 호의에 대하여 무 반응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응하였음을 열왕기하 역사가가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그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열왕기하 4:13절). 여기에 기록된 ‘배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라드’는 더 깊은 의미로 ‘전율하게 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소름을 끼치게 하는 감동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누군가가 타인으로부터 전율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감동적이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배려는 타인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감동을 주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가능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행하기 위해서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타인들이 내가 이렇게 함으로 마주쳐야하는 것이 무언지를 심사숙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자기 성찰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마련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의 유고집인 ‘문득 당신이 그리워질 때’를 보면 그의 회고 어록 중에 이런 글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낚싯대를 갖다 주어도 들고 일어설 힘조차 없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도움과 기도입니다. 이것이 구제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가 마땅히 떠맡아야 하는 부담이 아니라, 복의 통로입니다. 가난한 자로 인해서 교회가 교회답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복까지 누리게 됩니다.”(pp,175-176.) 중세 거대한 영성가인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건강하다면 마주치는 것 마다 살아 있는 거울이 될 것이며 거룩한 잠언이 될 것이다. 겉보기에 보잘 것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피조물은 없다.”(토마스 아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p,73.)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이 장엄한 선언은 철저한 자기 성찰의 결과로 주어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이타적 신앙의 노래입니다. 왜 배려하지 않는가? 왜 기다려주지 않는가? 타인 중심성에서 자기중심성으로 자아의 정체성들이 갈아타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자기중심성이라는 담을 허무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타인중심성으로 옮겨 타는 작업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한나의 아이’에서 자기중심성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난제가 우리가 말하는 바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교회와 세상을 전혀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p,293.)고 경종을 울렸습니다. 신앙은 이타성을 갖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타성을 갖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와 성도는 다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보루라고 세상이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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