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살면서 무례함을 경험했던 것과 대우 받았던 일들을 나누어 보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목마른 자들아 (찬송가 526장) ●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찬송가 570장 )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신앙은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 본문 : 고린도전서 11:17-22 1) 고린도교회의 식탁 공동체로 인하여 야기되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세 가지로 열거해 보자. 2) 위에서 열거한 내용을 참고할 때 식탁공동체 사건을 통해 신자들이 지켰으면 좋았을 뻔 했던 예의는 무엇이었을까? 3) 적용하기 ①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행동과 창세기 8장에 보고 된 노아의 행위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설교 제목을 중심으로 나누어 보자. ② 그리스도인으로서 몸에 겸비해야 할 예의란?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2)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들을 위하여 3)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하여) 4) 한국교회를 위하여 5) 한방 국제 엑스포를 담당하는 변태수 안수집사를 위하여 6) 가을 사역을 위해 7)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가을 사역에 최선을 다해 전심하도록
① 가을 대 심방 준비 ② 소그룹 모임 참여자 중보 ③ 셀 원 중에 나약한 영혼 살피기
2) 예배 참여에 최선을 다할 것 3) 통상적 셀 예배 사역 | 설교요약 (SUMMARY)9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6번째 강해) 제목: 신앙은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1:17-22
‘필란트로피’라는 신조어는 그리스어 philos(사랑)와 anthropos(인간)의 합성어로 인간의 형제애적인 사랑, 즉 인간을 사랑하는 이타적 사랑으로 오늘의 시대에 기부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이것은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파생된 것으로 헬레니즘 문화의 복판이었던 고린도지역에서도 이 개념은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필란트로피의 정신은 고린도지역이라는 상황의 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가치와 윤리를 추구해야 하는 고린도 교회라는 배경이기에,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가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서 보여 지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이런 기대감과는 달랐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고린도 전 지역에 퍼져 있는 성도들의 가정을 돌아다니며 모이던 가족 교회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식탁공동체로 함께 교제를 했습니다. 그들의 예배 시간은 오늘의 교회처럼 주일 오전 11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식탁공동체는 굳이 주일 오전에 예배를 드린 뒤에 나누는 점심 식탁공동체라고 제한할 수 없게 됩니다. 본문에 기록된 식탁공동체는 그 종류가 주일 일몰 이후 시간의 만찬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일 저녁 식탁공동체가 될 수도 있음도 열어둡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식탁공동체가 뭔지는 모르지만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본문 17-20).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칭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도리어 몇 가지의 불편함을 내색합니다. 그는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도리어 해롭기까지 하며, 이것으로 인하여 분쟁까지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식사’ 때문입니다. 즉 만찬을 먹을 수 없는 불편함 때문입니다(본문 20절). 본문 21-22절이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식탁공동체를 비난한 이유입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이 구절을 중심으로 고린도교회의 공동체 식사 문제를 제기한 학자들이 의기투합한 4가지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① 주의 만찬에서 상이한 당파들이 위화감을 조성했다는 점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의 신자들 중에서 부유한 자들의 식탁과 가난한 자들의 식탁을 차별하여 따로 식사 장소를 가졌다는 해석입니다. ② 상이한 식사 시간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예배는 꼭 낮에만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일몰 직전에 드린 경우가 있었다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때 모여야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다양한 직업 분포도로 부자들은 예배 시간에 맞추어서 넉넉하게 여유를 갖고 예배를 드린 뒤에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자영업을 하는 자들은 경우에 따라 마감이 늦어질 수 있었고, 피고용인들은 고용인이 보내주어야 하는 불가피한 불편함이 있었고, 심지어 노예 계급에 있었던 신자들은 주인들이 허락해 주어야 하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했던 것이 고린도교회의 만찬이었습니다. 이런 각 종 상황의 다양성을 갖고 있는 신자들이 저녁 식탁공동체에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예배를 드리고 그 후에 있는 만찬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만찬은 모인 자들만의 잔치로 끝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먹고 살기에 급급한 민중 계층의 신자들은 만찬이 도리어 공동체의 연대를 무너뜨리는, 있는 자들만의 잔치로 변질된 것에 대하여 심각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③ 이기적 그룹의 질 나쁜 행위들입니다. 식탁공동체에 늦게 온 자들은 이미 식탁공동체에 미리 참여한 자들에게 음식을 뺏겨 버렸습니다. 그들은 적은 음식을 갖고 슬픈 음식을 대하게 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식사를 하지 못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나게 된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본문 21절). 이런 불공평함이 형제의 사랑과 주님이 만찬을 통해 가르쳐 주셨던 섬김의 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이기적 일탈로 변질되는 바람에 정말로 음식이 필요한 자들은 굶주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질 나쁜 자들을 향하여 아주 강력한 표현으로 힐난하며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본문 22절). 이런 나쁜 행동을 하려는 자들은 식탁공동체에 나오지 말고 너희들의 집에 가서 너희들끼리 먹으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이기적 행위들을 통하여 가난한 형제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은 교회를 업신여기는 자들이라고 비수를 꽂습니다. 그렇다면 이상의 해석들을 참고하여 볼 때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을 지혜로 배울 수 있습니다.
※ 신앙은 곧 예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 중에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식탁을 구분한 행위에 대하여 질타했고 이것이 바로 당파를 짓게 하는 일이며 해로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힘들게 교회공동체에 참여한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배려해 주지 않는 자들에 대한 과감한 질타를 본문에서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기다림은 예의이고, 참아줌은 신앙의 예의임을 직시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신앙은 배려입니다. 신앙은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불완전성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많은 질책을 받았고 주님을 부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이후 그는 급격히 영적으로 다운되어 주님의 부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옛 모습으로 살아가는 쓰라림을 경험합니다. 그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던 베드로는 바닷가에서 또 다시 부활의 주님을 통해 고기를 많이 잡는 카이로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불현 듯 지금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지 않을까 하는 심증으로 가득 차 있던 순간, 요한으로부터 외마디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고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요한복음 21:7절).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물겨운 반가움에 호수로 뛰어내리면서도 그가 잊지 않고 행했던 액션은 겉옷을 챙겨 입는 예의 갖춤이었습니다. 창세기 8:20절을 보면,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1년 17일 만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우선순위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을 텐데 인간으로 하고 싶었던 일체의 것을 미루고 하나님께 예의를 차립니다. 마태복음 6:3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You give God first place in your life.” (Living Bible역, 너는 너의 삶의 가장 첫 자리에 하나님이 있게 하라.) 수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이 땅에 존재하지만 삶의 가장 한 복판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를 곱씹어 보면 유구무언입니다. 어느 새 나의 삶의 복판에 내가 예배를 드리는 대상은 맘몬이요, 세속적 가치요, 육체적 쾌락이요, 보이는 것들의 실체요, 손에 잡히는 것들의 현학으로 변질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사는 데도 나는 정말로 괜찮은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무감각의 포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무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의를 지키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살고 있었던 많은 나약한 자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공급해 주는 음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젖줄이 고린도교회에서 그런대로 신앙 생활한다는 자들의 이기성 때문에 짓밟혔습니다. 신앙은 직분의 색깔도 아니요, 신앙의 캐리어는 더 더욱 아니며, 계급과 서열은 더 더욱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노아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후 이제 다락방 강화를 통해 섬김의 도를 가르치실 때 주님도 행하신 것이 ‘벗었던 상의를 다시 갖추어 입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요한복음 13:12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 중에 업신여김을 받아야 하는 삼류 인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주님도 제자들을 존중하셔서 예의를 갖추셨습니다. 하물며 그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들이 무례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나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입니다. 신앙은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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