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경험한 삶의 흔적에서 차별을 당한 아픔이 있는지 말해보자. | 경배와 찬양 (WORSHOP)● 구원으로 인도하는 (찬송가 521장) ● 어둔 죄악 길에서 (찬송가 523장 )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차별과 구별 ● 본문 : 고린도전서 11:2-16 1) 바울이 본문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무언가(베일)를 쓰라고 한 이유를 ‘키렉’은 무엇이라고 진단했나? 2) 11-12절까지의 본문에서 바울이 여성 차별의 발언이 아님을 에둘러 표현한 내용들은 무엇인가? 더불어 16절에서 서둘러 논쟁을 마감한 결론은 무엇인가? ① 11절 참고: ② 12절 참고: ③ 16절의 상황: |
3) 적용하기 ① 교회 안에서의 차별 고르기 ② 그리스도인들이 도리어 견지해야 할 구별됨이란 어떤 것들이 있나? ③ 구별된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 결단하고 기도하기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2)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들을 위하여 3)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하여) 4) 한국교회를 위하여 5) 한방국제 엑스포를 담당하는 변태수 안수집사를 위하여 6) 가을 사역을 위해 7)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가을 사역에 최선을 다해 전심하도록
① 가을 대 심방 준비 ② 소그룹 모임 참여자 중보 ③ 셀 원 중에 나약한 영혼 살피기
2) 예배 참여에 최선을 다할 것 3) 지역 셀 예배 사역 | 설교요약 (SUMMARY)9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5번째 강해) 제목: 차별과 구별 본문: 고린도전서 11:2-16
차별이라는 기막힌 범죄행위를 행하는 자들의 공통분모는 내가 너보다 훨씬 낳은 존재라는 되먹지 못한 교만성과 야만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차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천박한 야만성과 무례함입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라는 무거운 짐을 선택하시고 피를 흘려 돌아가신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들이 내가 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차별을 앞서 실천하는 자가 된다면 그는 세상의 차별주의자보다 가중 처벌 대상자가 되는 중 범죄자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내용 중에 치열한 논쟁거리는 3-9절입니다. 이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선언을 들여다보면 바울은 아주 보수적인 남성우월주의자라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했고, 남자가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기도를 하거나 예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무언가를 반드시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할 것을 압박했고 더불어 머리에 무언가를 쓰지 않으려면 차라리 머리를 미는 것이 낫다고 강제합니다. 또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이며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라는 발언은 극언으로 들릴 정도입니다. 더 더군다나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에게 편지하는 글에서 천명한 내용은 이미 말한 선언에 비해 자기모순적인 발언이고, 자가당착의 패착인 발언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7-28절).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 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남자나 여자나 개의치 않고 하나라고 했던 자가 바울입니다. 하나라는 말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이렇게 말한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는 갑자기 여성 폄훼주의자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인지 본문을 해석한 학자들의 내용들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지성적, 학문적인 접근을 전제로 살펴봅시다. 미국 에즈베리 신학교 신약학 교수인 크렉 S, 키너 박사의 고린도전서 11:3-9절의 해석은 남성우월주의적인 바울의 선언을 나름 균형 잡힌 모습으로 항변한 해석입니다. 본문 3-9절에서 제일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머리에 무언가를 쓰라고 강제한 내용입니다. 키너 교수는 바울의 이 강제적인 내용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① 주후 1세기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 중에 여성의 은둔이라는 배경을 근거했다는 해석입니다. 그 근거로 이집트의 유명한 역사 사상가인 필로의 글을 인용합니다. “여성에게 가장 좋은 것은 집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가사 일과 관련 없는 일을 피하는 것이며, 격리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크렉 S, 키너, “바울과 여성”,p,52) ② 고린도 지역에서 여성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창녀들과 이교의 신을 섬기는 여 사제들이었기에 그들과 같은 그룹으로 보이지 않도록 강제했다는 해석입니다. 여성 신학자 피오렌자는 고린도교회의 여성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고대 이교였던 이시스 제의와 연결하여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시스를 섬기던 여 사제들은 보통 이마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모발이 흩어지게 하는 긴 머리를 가졌다는 것을 고고학적 기반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고린도 지역의 창녀들 역시 머리를 풀어 헤쳐 남성들을 유혹하였는데 이런 일이 하나의 사회적인 틀이 되어버렸기에 일반 여성들은 머리를 가리는 것이 통례가 된 것입니다. ③ 같은 맥락에서 주후 1세기 여성들의 머리는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였기에 이것을 근원적으로 막는 행위로 바울이 본문을 기록했다는 이해입니다. 키너 교수가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주후 1세기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여성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이런 일을 행하는 여자는 결혼 계약서에 명시된 위자료도 받지 못하고 강제 이혼을 당하게 되고, 더 심하게는 간통한 여자들에게는 반드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니도록 함으로 치욕의 상징이 되게 했다는 보고입니다. 이런 근거와 이유로 인해 바울은 어쩔 수없이 교회질서와 여성들로 인한 공동체의 와해를 방지하기 위해 본문의 룰(rule)을 정하여 선언했다는 해석이 키너의 지론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0-16절까지의 본문 해석은 여성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로 또 하나 해결해야 하는 해석이 ‘천사들’ 때문이라는 10절의 난제에 봉착합니다. 왜 천사들 때문에 여자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것인지 이 난해 구절의 해석은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인 김판임 교수의 해석을 살펴봅시다. 본문 10절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를 김 교수는 호색꾼 천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호색꾼 천사란 창세기 6:1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들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들을 해석하는 가장 전통적인 해석이 ‘천사’로의 해석입니다. 김 교수는 이 해석을 지지하면서 호색꾼으로의 천사들에게 성적인 타켓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예배 공동체에 나와 예배하는 머리를 풀어헤친 여성들이라고 본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그의 고린도주석에서 이에 걸 맞는 자료로 사해사본을 제시합니다. 사해 사본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며 예배할 때 천사들이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설파하고 있음을 제시한 것입니다. 김판임 교수는 이 천사들 중에 호색꾼으로서의 천사들이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바울은 이윽고 앞 3-9절에서 말한 남성우월적인 표현으로 상기되어 있을 여성들을 위한 배려의 모습으로 본문 11-12절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바울의 입장에서는 앞에 있는 3-9절의 표현에 비해 상당히 많이 뒤로 물러선 느낌을 주는 표현으로 이 단락의 후반부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신통한 영적인 영향력을 여성들에게 주는 것을 실패한 것을 직감한 바울은 16절을 씀으로 아주 어정쩡하게 본문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본문 16절). 이 구절을 톰 라이트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에 대해 논쟁하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 (톰 라이트. “고린도전서 주석”,p,185) 바울이 이 논쟁에 대하여 서둘러 마무리하려고 한 것은 고린도교회의의 영적 정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여성 신자들이 바울의 권고에 대한 권위보다 본인들이 여성의 미를 나름 자랑하고 싶었던 세속의 가치를 포기하기를 주저했거나 아니면 거부했던 분위기가 더욱 팽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상의 본문 이해를 통해 치열했던 여성들의 예배 모습에 대한 담론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은, ※ 교회 공동체는 차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별하는 공동체라는 교훈입니다. 재론하지만 바울 사도는 본문의 전반부에서 고린도교회의 여성들이 갖추어야 하는 모양새에 대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아주 단호하게 세속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예배에 나오지 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마치 고린도에 있는 창녀들처럼, 혹은 이시스 여 사제들처럼, 혹은 자신의 머릿결을 뽐냄으로 예배하는 남성들과 심지어는 예배를 돕는 부정적인 천사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근신하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런 단호함이 엿 보인 바울의 전반부 메시지와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가 여성 차별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 부분에 대하여 논쟁하지 말자고 권고한 뒤에 본문 메시지를 종결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그렇게 한 의도는 아마도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복잡한 태생적 구조를 알고 있었기에 예배를 통한 승리라는 본질이 희석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서신을 통해 나누려고 했던 본인의 의도가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 상황의 궁색함을 헤쳐 나가기위해 고육지책으로 본문 16절을 쓰고 마감한 상황에서 분명하게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여성 차별, 절대로 인정되어서는 안 되는 악습입니다. 여성 목사 안수, 여성 장로 장립은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상식입니다. 이것을 반대하는 일체의 것에 대하여 거부합니다. 차별이 본문의 담론인 여성 차별에 대한 것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차별, 그리고 교회 밖에서 자행되는 일체의 차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우고 척결해 나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정의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별은 존재해야 합니다. 구별함은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구별함은 교회공동체의 질서입니다. 구별됨은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6일의 창조사역을 가장 질서 있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의 피로 세우신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차별은 근절해야 하지만 구별은 교회가 사수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가는 길과 정체성에는 구별됨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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