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9.03 지역 셀 사역2024-04-23 16:23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본받고 싶은 사람은?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찬송가 455장)
● 신자 되기 원합니다 (찬송가 463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그리스도를 본 받아
● 본문: 고린도전서 11:1
1) 바울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나의 무엇을 모방하라고 권했는가?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 지식이었는가? (로마서 3;10, 3:23, 딤전 1:15 참고)
*본문을 참고하라.
  

2)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말을 유진 피터슨의 번역에 즈음하여 신앙으로 해석해 보자.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 복기: 실질적인 권위는 주 예수로부터 나온다.
*설교 원고 참고하여 복기하기
  

3) 적용하기
① 퍼즐 맞추기 (설교 참고)
② 퍼즐 맞추기의 대전제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 대입)
③ 한 주간 살아내기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기도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2)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들을 위하여
3)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하여)
4) 한국교회를 위하여
5) 한방 국제 엑스포를 담당하는 변태수 안수집사를 위하여
6) 가을 사역을 위해
7)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셀 사역하기

1) 가을 사역에 최선을 다해 전심하도록

① 가을 대 심방 준비
② 소그룹 모임 참여자 중보
③ 셀 원 중에 나약한 영혼 살피기

2) 예배 참여에 최선을 다할 것
3) 통상적 셀 예배 사역  

 
설교요약 (SUMMARY)
9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4번째 강해)
제목: 그리스도를 본받아
본문: 고린도전서 11:1

  오늘 본문 11절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학자들은 이 구절이 11:1절의 위치에 편집되어 있지만 실상은 앞에서 바울이 역설한 8장부터 10장까지의 내용들 즉 바울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하여 행동했던 일체의 일과 반응에 연관해서 읽어야 하기에 10장 마지막 절과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8-10장에 걸쳐 바울이 언급한 우상 제물에 대한 소견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은 그 의미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음식에 대한 섭취는 신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음식으로 인해 실족한다면 단호하게 나에게 주어진 자유 함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이었습니다.
  비울이 이렇게 선언한 8-10장까지의 역설을 마치고 그는 최종 결론으로 때로는 극단적인 표현처럼 보이는 오늘 본문을 선포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 구절에서 ‘본받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미메타이’는 우리나라 단어로 표시할 때 가장 가까운 단어가 ‘모방하다.’입니다. 외래어로 쓰이는 이미테이션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나를 모방하라’는 종용입니다. 
  이 말은 언뜻 바울이 도대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자신하며 과대평가했으면 나를 모방하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바울은 자신의 또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발한 적이 있습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어지는 로마서 3: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에는 바울 역시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본인의 여타 다른 서신에서 여과 없이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7:19-24절은 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어떻게 곤고한 사람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양아들에게 전하는 편지에는 더욱 극단의 자아를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이런 자가 나를 본받으라고 떠벌일 수 있냐는 질문은 타당해 보입니다.
  바울이 서신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면서 내뱉었던 말들을 곱씹다보면 바울이나 우리나 별 다름이 발견되지 않는 평범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아주 선명하게 ‘나를 본받으라.’고 선언합니다. 이 단락만 본다면 우리는 아멘 할 수 없고 도무지 수긍이 안 되지만 바울은 본문에서 주절과 종속절을 나누고 종속절에서 또 다른 문장을 남겨놓았다는 점에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합니다.
  바울이 종속절에 남겨둔 문장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입니다. 바울의 선언에는 대 전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나의 자아와 인격 그리고 개성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취하고 있는 행동을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대전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 바로 이것을 너희들도 본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 박사는 메시지에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는 참 귀한 번역을 남겨놓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기억하고 존중하여,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믿음의 전통들을 지키고 있다니 내 마음이 참 기쁩니다. 모든 실질적인 권위는 그리스로부터 옵니다.”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내 삶의 실제적인 통치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그 분의 통제를 철저하게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21세기라는 작금의 세태에 신앙과 불신앙의 척도를 신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앙이란 주군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행하셨던 삶 그리고 그 분이 언급하셨던 말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서 그 분을 삶과 말을 닮아가고 살아가는 행위입니다. 반면 불신앙이란 주군이신 예수의 삶과 말에 대하여 내 삶과 말과 이원화시켜 철저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는 행위입니다. 이 두 개의 틀은 묘하게도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이며 형태입니다. 신앙이란 주군이신 예수의 삶과 말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며, 불신앙이란 주군이신 예수의 삶과 말을 외면하여 따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면면이 아니라 주님의 삶과 말을 따라가는 내 삶의 진정성을 닮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분에게서 진정한 권위가 유출된다는 것을 믿고 따랐던 그 분의 삶을 본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은 오늘의 신앙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 예수님이 살아내신 삶의 퍼즐 판과 똑같이 에 우리들의 삶의 퍼즐 판도 이미테이션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이렇게 본인의 고린도전서 주석서에서 본문 11절을 석의했습니다.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희생이라는 사랑의 패턴에 따라 우리의 삶을 조각해 나아가는 것이다.” (p,307)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난 부분들을 예수님의 자기희생이라는 실루엣에 맞추어 하나하나를 잘라가며 조각해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라는 퍼즐 판이 성경에 있고, 그 퍼즐 판은 완벽한 롤 모델링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 삶의 퍼즐 판을 맞추어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본받는 삶입니다. 내 삶의 파편들이 조각나 있지만 그 조각의 파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무엇이 주님의 삶과 달랐는가를 엄격하게 판단하고 조금은 더 완벽한 퍼즐을 만드는 삶이야말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에게 시선을 놓지 않을 때만 가능한 게임입니다.
  창세기 12장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작하는 족장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기사가 실려 있는 장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인 아브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사의 시작점을 알려주는 족장 역사의 시작을 보고합니다. 아브람은 의외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우상숭배자의 집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평범하다 못해 일그러진 초상화와 같은 아브람이 열국의 아비가 되고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던 극명힌 이유를 보여주는 한 구절이 창세기 1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한 씨족 공동체에서 부름 받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인생은 여러 가지 모난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심으로 궁극적으로 승리한 주인공이 되게 하신 의도와 또 한 사람은 같이 출발했지만 실패한 인생의 초상으로 그려진 의도를 알게 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인생의 길을 가른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여호와를 따랐고, 롯은 사람인 아브람을 따랐다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주군의 삶의 퍼즐을 본받아 내 삶의 퍼즐을 맞추어가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의 퍼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주군이신 예수의 말씀이라는 퍼즐을 바라보지 않고 경우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람의 퍼즐로 내 삶의 궤도를 조정할 때입니다.

  한자 숙어 중에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일에 실패한 뒤 힘을 길러 다시 그 일을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라흐마니노프가 심각한 정신적인 병마와 싸울 때 그를 한 지인이 당대 최고의 문호인 톨스토이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톨스토이가 이렇게 라흐마니노프에게 고언 해 주었습니다. “인생이 순조롭다고만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의 삶 속에는 누구나 어렵고 곤란한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개를 들고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을 위해 나아가세요.” (심정흠 저, “음반 골라주는 한문 선생님의 매치 수업”, 홍문각간, 2017년, p.132)
  대 문호의 이 정도의 충고라면 이겨야 하는데 라흐마니노프는 호전되지 않았다고 저자는 밝힙니다. 해서 그를 이번에는 모스크바 최고의 정신과 전문의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의뢰했고 그가 치료한 치료법이 정신치료와 최면 요법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한 끝에 라흐마니노프는 권토중래하며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을 작곡하게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제일 먼저 충고를 해 준 사람은 거장 레오 톨스토이입니다. 그의 권면이라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차로 만난 사람이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의 치료법은 최면치료였습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지만 그의 최후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에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러시아를 그리워하다가 향수병에 걸려 미국인들의 부의 상징인 로스앤젤레스 비벌리힐스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결국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신적인 질병은 미완성의 상태로 무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인간의 완성은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 않습니다. 김기석 목사의 갈파처럼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 앞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사람은 사람다워집니다.”(끙끙 앓는 하나님, p,343) 사람이 주장하고 올곧게 서야 할 자리는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