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말씀읽기와 적용 (WORD)사역하기 (WORK)설교요약 (SUMMARY)8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2번째 강해) 제목: 섞지 말라 본문: 고린도전서 10:14-22
나의 주군이신 하나님과 내가 만든 신의 위상을 같은 레벨로 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말하는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버렸다고 미리 단정해 버리는 착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돌로 만든 부처상에 절을 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행위라고 정의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통상적 이해이지만 정말로 두려운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대체되어 있는 일체의 만들어진 신이 대등한 레벨로 평가하여 겸상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는 만족하지 못함으로 그 만족하지 못하는 2%를 다른 것으로 대치하겠다는 발상 말이야 말로 진정으로 두려운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에게 만족을 주는, 나를 만족시켜주는 우상도 함께 섬기는 것이 오늘 현대인들이 버젓이 행하고 있는 우상의 본질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주류층을 이루고 있었던 엘리트 신자들이 갖고 있었던 교만한 믿음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제물을 금기시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자유하다’는 것이 그들의 선언이었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제물 역시 아무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먹는 행위를 가지고 설레발치지 말라는 그들의 단호함에 대하여 바울은 우상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견고함이 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제물에 대하여 단호하게 단절하겠다는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바울의 신앙적 결단이었습니다(고린도전서 8:9-13절).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4절에서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우상숭배를 피하라’고 선언합니다. 우상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피함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선언한 바울은 본문에서 세 가지의 식탁공동체를 예로 제시하는 강수를 둡니다. ① 16-17절(주의 만찬) ② 18절(희생 제사와 관련이 있는 유대인들의 식탁) ③ 19-21절(우상 신전 식사) 이 세 가지는 다른 종류의 식사이지만 이 식사에 참여한 대상자와 식탁의 종류에 따른 신과의 영적인 교제라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바울은 제일 먼저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에 대하여 언급합니다(본문 16-17절).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에 참여하여 공동체가 함께 떡을 나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이기에 떡을 함께 받아먹는 순간은 우리는 그 분과 하나 되는 영적인 신비로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이미 이 놀라운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한복음 6:54-58절). 그런데 이렇게 성찬에 참여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는 영적 코이노니아는 단지 성찬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울의 날카로운 신학적 성찰입니다. 18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참여했던 제사의 제물을 먹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육신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물을 먹는 사람들이 제단에 참여하지 않습니까?”(본문 18절, 톰 라이트 역) 이러한 식탁공동체를 통한 영적인 교제를 바울이 우상숭배의 과정에서 진행된 식탁공동체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9-21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바친 것입니다.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스스로를 여러분보다 못한 것으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둘 다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 날은 주님과 잔치를 벌이고, 이튿날은 마귀와 잔치를 벌일 수 없습니다.”(유진 피터슨 역). 바울의 이상의 선언을 통해 오늘 우리가 얻을 중요한 두 가지의 교훈은, 오늘날 내가 만든 우상과 어울린다는 현대적 의미가 그 첫 번째의 교훈이요, 그런 우상과의 어울림을 허락하지 않는 방법이 그 두 번째의 교훈입니다.
1) 우상을 이용하고 있는 흑암의 세력에 대한 관대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상이라는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우상이 아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우상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바른 생활을 거침없이 방해하는 흑암의 영적 세력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관대함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치명적인 세력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박국 예언자는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하박국 2:18-19절)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섬기는 우상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돌, 나무였습니다. 그 돌과 나무는 금으로 입혀졌고, 스승이라고 불렸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나무와 돌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하나님은 예언자 하박국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무 것도 아닌 돌과 나무에게 깨어나라고 말하는 바벨론의 어처구니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아무 것도 아닌 나무와 돌에게 일어나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무지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단언하셨습니다. 생기가 없는 돌과 나무에게는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고 그것들에게 깨어나라고 말하는, 일어나라고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임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우상처럼 떠받들어진 돌과 나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나무와 돌을 신격화해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던 존재가 있었다는 배후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다이모니온’ 즉 ‘귀신’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귀신’이라는 단어를 한국적 용어의 개념으로 치부하여 평가 절하하는 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박국 예언자가 말하는 돌과 나무에게 깨어나라고 말하라고 외치게 한 뒤 배경의 세력, 오늘 본문에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쫒지 말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맘대로 먹으라고 종용했던 세력 즉 귀신은 우리들이 한국적 감각으로 생각하는 그런 귀신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엄청난 흑암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일인칭 주격의식’이라는 귀신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엄위하게 선포하신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애굽기 20:4) 말씀의 강조점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와 ‘형상도 만들지 말라’가 아니라 ‘너를 위하여’입니다. 우리들을 쓰러뜨리는 흑암의 세력은 ‘너를 위하여’를 부추기는 존재의 일체입니다. 미가 3:11절은 당시 영적 상태의 절정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렇게 엉망인 삶을 살던 종교인,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부유층에 있었던 자들은 자신들의 일탈들을 보상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꼬박꼬박 성전에 나와 제사를 드리고 제물도 드렸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미가 6:6절). 이 구절은 가증한 자들의 독백입니다. 이 독백을 드린 자들을 향하여 예언자가 선포한 것이 미가 6: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나에 대하여만 너그러운 것을 용인하지 마십시다. 오늘, 우리가 스스로 각성하고 긴장하고 고삐를 죄는 것은 나에 대한 관대함입니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영적 세력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공격받고 있는데도 긴장하지 않는 것, 철저한 오늘의 우상숭배입니다.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이야, 나는 이 정도는 영적인 수용성이 있는 참 괜찮은 존재야! 라고 해석하는 자만감, 철저한 오늘의 우상입니다.
2) 이 우상을 허용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오늘의 우상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다. 우상과의 긴장관계에서 내가 그 우상에게 넘어지지 않는 방법은 바울이 14절에서 말한 피하는 것입니다. ‘피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휴고’를 유진 피터슨은 ‘빠져 나오라’고 번역했고, 톰 라이튼 교수는 ‘멀리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그 자리를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그 장소를 떠나는 것입니다. 우상을 돋보이게 하는 자리에서 머물러 있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권고했던 말세에 일어날 일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의 그 돌아섬이 우상 숭배의 자리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본문에서 경고합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본문 21절). 관대하라고 종용하는 악한 시대입니다. 귀신의 식탁에 대하여 문을 열라고 압박하는 시대입니다. 오늘 내가 섬기는 현대적인 우상들에 대하여 관대한 내 신앙의 자리를 피하십시오. 우리가 닮고 따르고 달려가는 것은 신앙의 순결함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