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8.06 말씀 요약지2024-04-23 16:2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2017. 8. 31까지 지역 셀 방학 기간입니다.  

 
경배와 찬양 (WORSHOP)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사역하기 (WORK)
설교요약 (SUMMARY)
8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0번째 강해)
제목: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0:1-12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영적인 의지를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지성적으로, 또 얼마나 성서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글들이 본문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0장을 기록하면서 구약 성경의 한 흐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는 헬라적인 문화에 익숙한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분이었고 압도적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린도교회의 주류는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렇게 수신자가 이방적그리스도인들이 대다수인 그들에게 본문 1절이 주는 바울의 호칭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호칭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본문 1절). ‘형제들아’라고 호칭한 헬라어 단어는 ‘아델포스’입니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한 어머니의 자궁(델퓌스)에서 태어난 형제를 의미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그 정도의 친밀함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붙이는 호칭이라는 말입니다. 헌데 각종 바울 서신에서 바울이 사용한 이 단어의 용법은 아주 특별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엮어진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로 외연을 확장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방의 땅에 세워진 교회로 그 안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적인 크리스천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헬라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에게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하다고 간직하고 있는 구약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에게 어떤 면에서는 관심 밖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해야하는 가르침 중에는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상당수 많은 부분이 삽입되어 있었기에 이 구약의 의미를 통한 교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헬라적인 문화와 배경을 갖고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주류들에게 영적인 연대감을 주어야 하는 필수적인 단계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유 때문에 아주 의도적으로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을 호칭하는 단어로 ‘아델포스’ (형제들) 라는 단어로 사용함으로 구약 성경의 이해를 도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피로 인하여 구원 받은 교회 공동체의 멤버들은 구약의 전통이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또한 고린도인들로 대변되는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나의 이야기도 된다는 사실을 고지하기 위한 바울의 포석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바울은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인 출애굽 사건을 끄집어냈습니다. 하나님이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모세라는 지도자를 들어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바로 이때의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사건임을 발췌하면서 더불어 홍해를 가른 사건과 광야에서의 삶까지 함께 소개한 것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본문 1-3절).
  바울이 역설한 것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우리’ 조상들이 그곳을 나오면서 구름 아래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표현법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또한 바다 가운데를 지났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렇게 구름과 바다 아래에 있었던 우리 조상들은 모세에게 속하였다고 바울은 진술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신령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음을 분명히 술회하고 있습니다.
  1-3절 기록을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톰 라이트는 고린도주석에서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구름과 바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성령과 물세례를 말한다.” (p,165). 홍해를 가르고 그 길을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경험하게 하신 성령 세례와 물세례로 대입시켰다고 주석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아마도 이어진 4절 때문일 것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백성들(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은 그러므로 그 분이 주시는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물을 먹었던 것과 동일하다는 유비의 표현으로 본문을 바울은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바울은 직설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①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②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③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④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본문 7-10절).
  이상의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뒤에 살았던 40년 광야 생활동안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범죄 했던 대표적인 네 가지의 사건을 상기시킨 내용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아주 상세하게 이스라엘의 죄를 열거하며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의 아픈 역사를 복기한 이유가 본문 5-6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바울의 의도는 고린도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선조들의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임이 분명합니다.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조상들의 아픔을 들추어 낸 것입니다. 악을 즐겨한 우리 조상들의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거울삼기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열조의 우상 숭배와 범죄 함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기에 그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5-6절을 강조하기 위한 점층법적인 표현을 본문 11-12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상의 신학적, 성서적 근거들을 통한 주석적 작업을 통해 오늘 바울이 말한 본문이 주는 영적 교훈은,
★ 선배들이 잘못한 일들을 또 다시 범하지 않도록 긴장하라는 교훈입니다.

  즉 “성경에 언급된 잘못된 길을 갔던 신앙적 선배들을 반면교사 삼고, 올바른 삶을 살아갔던 신앙의 선배들은 진면교사 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중에는 자유함을 무기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자가 즐비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자유 한 데 그 까짓 아무 것도 아닌 우상에게 드린 음식을 먹는 것 즈음이야 어떠냐는 식으로 본인들의 우상 음식 섭취를 정당화시켰던 자들이 고린도교회를 유린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만에 하나,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 중에 새 신자들을 비롯하여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 먹기를 금기시하던 자들이 자유 함을 외치는 자들로 인하여 실족하게 된다면 마땅히 그 음식 섭취를 중단하는 것이 옳다는 바울의 권고도 우리는 이미 지난 강해를 통해 접했습니다.
  8장에서 이미 나누었던 우상 제물에 관한 신학적 담론을 바울이 10장에서 다시 들추어내어 재론하는 까닭은, 고린도교회의 엘리트주의자들이 빠져 있었던 잘못된 신앙인 편리주의적인 신앙의 행태를 부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추구하고 싶었던 것은 편리주의적인 습관화된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열조들의 이런 기막힌 편리주의에 맛 들린 습관적인 행위들에 대하여 맹렬히 질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조의 습관적인 행위가 곧 고린도교회에 존재하던 자유함을 빙자한 엘리트주의자들의 종교적 행태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역설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이스라엘 열조(조상들)들의 신앙적 패착 요인들을 반면교사 삼아 그렇게 실패하는 신앙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진면교사의 다짐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한 대안으로 어떻게 하여야 편리주의적인 습관화된 종교 생활을 벗어 던질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면, *긴장하는 신앙의 틀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상용화하는 것입니다. 영어 단어들 중에 빈도부사라는 형태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빈도부사란 어떤 상황에서 행해지는 횟수를 의미하는 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100%의 참여 횟수를 의미하는 언제나 항상 늘(ALWAYS)가 있습니다. 90% 정도를 의미하는 ‘대체로’(USUALLY)가 있습니다. 80-70% 정도를 의미하는 ‘종종’(OFTEN)도 있습니다. 반타작을 말하는 50%의 의미인 ‘가끔’(SOMETIMES)도 있습니다. 20% 정도를 나타내는 ‘좀처럼’(SELDOM)과, 10% 정도를 의미하는 ‘드물게’ (RARELY)가 있습니다. 0%를 말하는 ‘절대로’(NEVER)로가 빈도부사의 방점을 찍습니다.
  편리주의라는 신앙생활의 최대의 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영적 긴장의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내가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선택은 하나님의 생각을 내 생각에 ALWAYS 즉 항상 언제 늘 접목시켜야 합니다. 이 접목함의 틀에 ‘대체로’가 끼어들면 안 되고 ‘종종’, ‘가끔’, ‘좀처럼’, ‘드물게’, ‘절대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이런 빈도부사가 내 신앙의 여정 안에 끼어들 때 나도 모르게 영적으로 와해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자는 영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날마다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 삼아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그래서 선 줄로 생각하지 말고 넘어질까 항상 조심하는 자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