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07.30 말씀 요약지2024-04-23 16:2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2017. 8. 31까지 지역 셀 방학 기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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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약 (SUMMARY)
7월 3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39번째 강해)
제목: 몸싸움
본문: 고린도전서 9:24-27

  우리는 바울을 통하여 그의 범접할 수 없는 영성의 흔적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누명과 헐뜯음 당함과 비아냥거림을 당함 속에서도 일체의 것들을 참으며 오직 복음의 장애를 받지 않게 하겠다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감수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삶이 바로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 9장 텍스트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본문입니다. 바울은 아주 계산적이고 잇속에 바싹한 고린도교회의 이기적인 신자들을 향하여 아덴에서 열리는 올림피아 경기처럼 당시 고린도에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스미안 경기를 빗대어 그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본문 24-25절).
  바울이 말하고 있는 메타포(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이스미안 경기에 나서는 자들의 목적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상 받기 위한 것, 즉 면류관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부인할 자가 없지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이기는 자가 받는 상은 언젠가는 썩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며 치열한 복음의 전선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을 얻는다고 역설합니다.
  다니엘 2:31-35절을 보면,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 대한 해몽을 해준 다니엘의 설명 구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본 우상의 모습은 거대한 신상이었습니다. 머리는 정금으로 만들어졌고, 가슴과 팔은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배와 넓적다리는 놋으로, 종아리는 철로, 발은 철과 진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복음주의권의 학자들은 이 신상의 해석을 정금 머리는 바벨론제국, 은으로 된 배와 가슴과 팔은 메대와 바사제국,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제국, 그리고 쇠로 된 종아리는 로마 제국울 상징하는 것으로 일견 동의합니다. 또한 이 거대한 우상을 무너뜨리는 도구로 돌덩이가 등장합니다. 이 돌덩이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이상의 해석은 거의 모든 복음주의적인 학자들이 동의하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의견일치를 보는데 어렵지 않은 다니엘의 꿈 해몽 내러티브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나름의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돌의 상태입니다. ‘손을 대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시사입니다. 인간이 터치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것은 변질되지 않습니다. 썩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적확한 진리입니다. 신 바벨론 제국인 세속적인 가치는 반드시 썩습니다. 메대, 바사, 헬라, 로마 그리고 이 땅에 존재하는 세속의 모든 나라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따라가는 자들의 나라와 삶의 가치는 절대로 썩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 24-25절은 정답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 가지에 더 집중한다면 바울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경기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자들, 즉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해서 사는 자들은 이것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무 조항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여기에 기록된 ‘절제하다’의 번역인 ‘엥크라크레타이’를 유진 피터슨은 “되는 대로 사는 것은 나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절제하는 삶이란 막 사는 삶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삶입니다. “거인욕 존천리(去人欲 存天理)” 와 상반되는 또 다른 삶인 “거인욕 폐천리(居人欲 廢天理)” 라는 말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사람이 욕심을 떠나면 진리와 함께 동거할 수 있지만, 사람이 욕심과 함께 동거하면 진리가 떠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엥크라크레타이’ 즉 절제하는 삶의 모본입니다. 이 삶을 바울은 본문 26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향방 없는 자처럼 허공을 치는 달려감이 아닌 분명한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는 달려감을 바울은 걸어갑니다.
  시카고 대학의 신학과 기독교 윤리학 교수인 랭던 킬키는 그의 수작 ‘산둥 수용소’에서 라인홀드 니버의 촌철살인을 소개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동적으로 해소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은혜가 충돌하는 전투지이다. 따라서 인간의 교만이 이기면 종교는 인간 죄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전투 속에서 인간 자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자신의 이익이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종교는 모든 인간이 갖는 이기심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P,360)
  나의 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이기고 있는가?, 세인교회는 인간의 이기심이 보란 듯이 이기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나의 자아가 하나님을 만나 철저하게 부서지는 승리의 공동체인가? 자문해 봅시다. 이제 우리 세인교회가 잡아야하는 향방이 보여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세속의 거대한 공격이 우리들을 짓누르는 압박이 있어도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합니다. 바울처럼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기 위해 절제하는 길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절제하는 진정성이 있는 방법이 오늘 설교의 테제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본문 27절).

★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절제란 내 몸을 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쳐’ 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 단어를 ‘휘포피아조’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은 ‘눈 아래를 때리다.’입니다. 즉 관자놀이를 치는 것입니다. 권투 경기에서 상대방의 눈 아래(관자놀이)를 가격한다는 것은 적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공격법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내 몸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것입니다. 나를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불구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내 몸을 하나님의 선한 도구이자 무기로 만들려면 육적인 정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치명상을 입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거인욕 존천리(去人欲 存天理) 요 거인욕 폐천리(居人欲 廢天理)”를 믿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내 몸을 친다는 말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방심하다가 허를 찔리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방심하는 삶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은 거창한 데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 영혼이 방심할 때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 자신과 치열한 몸싸움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방심하게 돼 허를 찔리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본문 27절 하반절에 있는 것처럼 나는 물론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불복종 운동을 창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그의 역작인 ‘월든’에서 아주 인상적인 금언을 하나 소개합니다. 그는 이집트의 관광 명물로 유명한 피라미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독설을 남깁니다. “피라미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 인생을 어떤 야심만만한 자의 무덤을 만들도록 강요한 흉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일을 시킨 자의 시신은 차라리 나일 강물에 처박아 죽인 후, 그 시체를 개들에게 주어 먹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당당한 일이었을 것이다.”(p,84)  썩어질 것에 대하여 미련을 둔 자에 대한 강력한 독설입니다.
  썩어질 것을 위해 몸단장하지 마십시다. 도리어 썩어질 것은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면서 제자로 산다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내 것, 그것이 몸이든, 물질이든, 내가 만든 일체의 우상들을 쳐서 복종시킬 때만이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설 수 있음을 명심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본문 2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