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6.25 지역 셀 사역2024-04-23 16:2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살면서 상대방이 나를 좋아했던 경우가 아닌 내가 참 좋아했던 지인이 있으면 소개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찬송가 312장)
● 내 구주 예수를 (찬송가 314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내가 아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시는 나
● 본문 : 고린도전서 8:1-13
1)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엘리트주의자들의 지식적 교만함의 내용을 고발해 보자.
① 고린도교회의 슬로건
② 우상의 제물과 관련하여
③ 이로 인하여 벌어진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영적 폐해  

2) 바울이 엘리트주의자들을 향하여 쏟아낸 교훈과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⓵ 1절 참고: 지식 (그노시스와 관련하여) 
⓶ 7-9절 참고: 자유함과 관련하여
③ 3절과 관련하여: 설교 테마를 주목하십시오.  

3) 적용하기
① 자유 함이라는 이름으로 방종 하는 신앙적 치명타를 밝혀내 단절하기. 
② 나는 교만한 신앙의 발로에 있는가? 겸손한 발로에 있는가?
③ 나의 올바른 신앙의 입장은 무엇인가?  

 
사역하기 (WORK)
1) 주간 중보 기도제목
1) 비전 트립과 성경학교를 위해
2) 피선교지 섬김을 위하여
3)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의 건강과 치유를 위하여
  (서정수, 최정희, 문혜경, 김문수, 강영자)
4)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자녀들을 위하여
  (서혜린, 이장규, 장종호, 이한빛, 이유정, 김양진)
5)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들을 위하여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하여
7) 1부 반주자를 위하여
8) 월삭예배를 위하여
9) 맥추감사주일을 위해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6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35번째 강해)
제목: 내가 아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시는 나
본문: 고린도전서 8:1-13
  
    교회 안에 존재하는 엘리트주의는 정말로 무서운 암세포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볼 본문에서 바울은 이 암세포와 맞서 싸웁니다. 오늘 본문 8장을 강해한 예일 대학교의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엘리트주의’라는 단어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울 시대에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나중에 영지주의로 싹터 자라날 씨앗들이 발아되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소위 지식의 소유 여부에 따라 교회를 서로 다른 계급군(階級群)으로 분열시킨 엘리트주의였다.” (현대성서주석, 고린도전서, p.242)
  헤이스의 이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본문 8장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 중에는 대단한 지식을 소유한 엘리트들이 있었습니다. 이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던 신자들은 바울이 가르쳤던 교리적인 내용을 거의 이해하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교리적인 내용들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 설명하면,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 즉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본문 4-6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지식층의 사람들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세상에 있는 여타 많은 우상들은 아무런 존재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믿었습니다. 이들은 우상들을 ‘많은 신들’(many gods), ‘많은 주들’(many lords)이라고 이렇게 표현할 정도였습니다(본문 5절). 다시 말해 신과 주를 표현할 때 소문자로, 그리고 복수로 기록했다는 것은 하찮은 존재, 별로 의미를 주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평가절하 한 의도가 있는 표현입니다.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는 자들의 신에 대한 의식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확한 이해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특별히 고기를 먹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바울의 시대 때에 고린도에는 많은 우상 숭배들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의료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아스클레피우스 신전 축제나 아크로고린도 신전에서는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드리는 신전 축제도 성행했고, 남성 신의 심벌인 아폴론 신에게 바치는 제사까지 우상 숭배의 천국과도 같은 지역이 고린도였기에 각 축제에서 벌어진 축제의 잔치 뒤에 이루어진 뒤풀이에서 함께 먹었던 고기들이 당시 지식층에 있었던 고린도교회 엘리트 신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식탐 재료들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들을 먹는 것은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런 행태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본문 7-12절).
  이 본문에서 주목할 단어는 9절에 기록된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우상은 아무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신전 축제에 사용된 뒤에 뒤풀이로 함께 먹는 고기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자기들의 지식(그노시스)를 굽히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바울이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 너희들이 행위를 보고 그 행위들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일이라면 그 행위들을 멈추라는 것이었습니다.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이렇게 주석하였습니다. “약한 자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이교도였다가 회심한 이방인들이었기에 그들은 이전에 ‘우상에 관한 습관’을 가진 자들이었다.”(p.247)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지만 그들의 심리 속에는 항상 그들이 섬겼던 우상들에 대한 흔적과 쓴 뿌리가 있었기에 지식층의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을 봄으로 인해서 다시 그들도 우상제물들을 먹는 그래서 더 믿음을 약해지게 부추기는 너희들의 행태를 중단하라는 바울의 강성 발언이 본문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엘리트의식에 빠져 생각 없이 행하는 우상편의주의를 방관함으로 인해 믿음이 약한 자, 이제 막 고린도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자들이 실족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그노시스)을 아주 교만하게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슬로건으로 내 걸 정도의 자유함이라는 변칙적인 단어로 포장하며 빗질한 고린도교회의 특권 계층의 문제아(問題兒)들을 향한 바울의 비수가 선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절).
  바울이 이렇게 선포한 정금 같은 말씀의 배경은 로마서 7:22-25절이 그 답을 말해 줍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두 마음의 법이 마음에서 대적하는 싸움을 항상 싸웠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일로 인해 곤고했습니다. 죄의 법이 이길 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음을 토로합니다. 어떻게 하든 죄의 법이 이기지 못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을 우회적으로 토설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곤고함과 실족함으로 더 힘들어짐을 느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괴로움과의 투쟁을 연속하는 과정에 대단히 중요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법으로 싸울 때는 도무지 느끼지 못했던 감동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그 정죄함이 사라지는 은혜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내가 그토록 싸워 이기려고 했으나 백전백패하게 했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켜준다는 것을 알았다는 고백이자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부인하는 자는 이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웬만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은혜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인하지는 않지만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점은 심히 유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니까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적인 굴레에서 해방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나아가 방종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그노시스적인 신자들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 했으니까, 그리고 우상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니까 그것들에게 바쳐진 우상의 고깃덩어리들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야!”, “오히려 내가 그 고깃덩어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먹어야 우상들이 별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거야!” 기승전결에 있어서 완벽해 보이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완벽해 보이는 고린도교회의 지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을 같은 지식층에 있었던 바울이 옹호하거나 두둔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질타합니다.
  바울은 엘리트주의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전포고를 합니다(본문 11절).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또한 마지막 13절에서 한 번 더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원문에서 바울이 주어로 번역한 것이 ‘하나님이 아시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목적어로 배치했습니다.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일부 지식을 강조하던 자들이 범하고 있는 치명적인 교만을 바울이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저들의 함정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문에서 주어의 역할로 뒤바꾸어 선포한 내용은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 교만함을 질타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많이 하면 할수록 치유 불가의 교만함이 자리 잡게 됩니다. 다 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교만입니다. 아하면 어하고, 어하면 아 한다는 구제불능의 교만입니다. 올곧은 신앙은, ※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교만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에 대한 감동의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존재하던 일부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자들에 비해 지식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서신들은 신학 작품들같이 지성을 무시하지 않은 학문적, 지성적 걸작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이 갖고 있는 또 다른 힘은 그의 신학적 작품들이 단순히 지성적 성찰로 끝나지 않는 실천신학이라는 점입니다. 그 실천신학의 정점 즉 클라이맥스는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은 안다는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에 대한 감동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교만이 아닌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에 대한 감동에 만족하는 삶을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