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기까지는 얼마나 먼가?”(파스칼, “팡세”, 민음사,367) 오래 전에 읽었던 고전 ‘팡세’에 나오는 명문입니다. 아마도 이 문장은 파스칼이 아주 짧게 외친 글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파스칼의 영성을 전제할 때 그가 얼마나 치열한 영혼의 여정을 겪으면서 토로한 말일까를 생각하면 그 깊이가 이해됩니다. 주일에 교우들에게 전한 설교 영상을 몇 몇 지인들에게 공유하도록 보내드립니다. 후배 목사가 영상 설교를 듣고 나서 제게 이런 피드백을 보냈습니다. “선배님, 살아내자고 말씀하실 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민감하지 못했던 나를 많이 반성했습니다. 목사의 길은 앎이 아니라 삶인데.” 피드백을 받고 곧바로 후배가 이렇게 답 글을 달아주었습니다. “○ 목사, 우리 예수 잘 믿는 목사가 되자.” 웬일인지 지난주일 설교는 들은 분들이 표현을 조금씩 달랐지만 한 주 동안 이런 종류의 반응들을 조금 더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16세기 수도원 운동의 주역이었던 아빌라 테레사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녀는 명상을 정의하며 두 번째의 요소로 ‘능동적 몰입’(active recollection)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인식 자체를 신적인 실재(divine reality)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경청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다.”(제랄드 메이, “영혼의 어두운 방”, 아침 영성지도연구원, 102) 나는 일주일을 살아오면서 능동적 몰입에 승리했나를 깊이 성찰하며 지금 이 글을 씁니다. 코로나 19의 공격이 1년 7개월째로 접어들었습니다. 어떤 이가 이제 코로나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인간의 교만을 꺾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분석하는 이야기도 들어보았습니다. 적확한 통찰이지 않나 싶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온 주자들이 말하고 답변하는 일련의 언어폭력 및 이전투구를 보면서 ‘homo homini lupus’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다.)라고 말한 토머스 홉스의 갈파에 격한 한 표를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역학적인 함수관계를 들춰보면 지옥이 바로 이런 영역이지 않겠나 싶을 정도로 참극의 드라마를 봅니다. 해서 목사인 나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나를 곱씹어 보면 몇 번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주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절절하게 느낍니다. 허나 그 분의 삶을 팔로잉 하고 있는 목사인 ‘나’는 앎에서 삶으로 연결하는 고리가 나약하기가 그지없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없어지는 것 같아 무척이나 주군께 송구스럽습니다. 한국가톨릭교회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랬지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머리에서 심장으로 내려오는 데 50년이 걸렸다.” 그래도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50년이라도 내려온 삶을 살아냈으니 말입니다. 내일 교회 강단에서 또 목사로 살아낸 것을 증언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나를 보며 깜깜해 집니다. 왜 이리 주일을 빨리도 오는지 두렵고 무섭습니다. 목사로 또 말해야하는 주일, 제게는 멍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