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학교 선생님들을 축복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내 짝은 아주 유명했던 개그맨이었습니다. 개구쟁이였던 친구는 끼를 방출하지 못해 아주 가끔 천방지축으로 튀어 오르곤 했습니다. 이제 아득한 추억이 되어 버린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세계사 시간에 친구는 대출을 나에게 부탁하고 소위 말하는 땡땡이(?)를 쳤습니다. 비극은 친구가 생활부 선생님에 걸려 교무실에 붙들려 와 있었다는 사실을 제가 몰랐다는 점입니다.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출석을 부르는 시간에 친구의 이름을 힘차게 대신 대답했습니다. 이윽고 선생님은 저를 호출했고, 당시 마포로 불렸던 마대자루로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38대를 때리셨다고 합니다. 수업이 끝날 때 즈음에 막이 내린 타작 후유증은 제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이었지만 또한 제 잘못을 반성하는 스티그마로 제 뇌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허벅지가 터져서 피가 흘러 교복과 붙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허벅지의 상처가 아무는 거의 한 달 여 기간 동안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정말로 조심조심했던 잔상이 또렷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피투성이가 된 그 날, 거의 기어 교무실에 가서 타작한 선생님께 실망을 끼쳐 드려서 죄송하다고 다시 사죄했습니다. 용서를 비는 제게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강덕이 네가 그렇게 대리 출석을 해서 날 실망시킬 줄 정말로 몰랐다. 더 나쁜 것은 네 한 마디가 친구를 아주 옳지 않은 곳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래서 너무 속상했다. 강덕이 널 믿었었는데.” 2021년 5월 16일, 만약에 교복과 허벅지 살이 피로 엉켜 붙을 정도로 선생이 학생을 때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시퍼런 군사독재 시절이었기에 그런 물리적인 폭력이 가능했겠지만, 또 하나 확실했던 것은 선생님들의 권위가 이유야 어떻든 학생들에게 존중 받던 시대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교육을 가장한 비인간적인 폭력들이 교사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자행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제자들이 교권을 흔들거나 침범하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학생들에 의해 선생님에 대한 고소 고발이 자행되는 오늘, 교사의 교권을 발톱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는 참담한 시대, 내 손자, 손녀들의 교육대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염려하는 것이 꼰대 기질을 갖고 있는 나만의 기우일까요? 한 발 더 나아가 학교교육이라는 제도권 공동체에 있는 교사들의 인권도 짓밟히고 무시되는 오늘인데 하물며 교회학교를 책임지고 있는 선생님의 위상을 말해 무엇 할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는 선생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품으로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들입니다. 파커 파머가 말했다지요. “가르침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 덕분에 결정적인 삶의 전기를 맞이한 수많은 학생들이 느끼고 증거 한다는 것은 축복이다.”(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한문화, p,323)
팁 하나, 대리출석을 부탁한 놈도 지금은 목사, 대리 출석해 주어 피나게 맞은 놈도 목사가 되었으니 하나님은 참 위대하시고 드라마틱한 분이십니다.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