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는데 웬 말인가 하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지난 주간에 저희 집안에서 경사가 있었습니다. 큰형님의 아들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해서 조카며느리를 본 것이지요. 31년 만에 본 외부 인사인 셈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적지 않게 아쉽기는 했지만 장성한 조카가 집안의 첫 외부 인사를 영입한 것에 대하여 축하하고 또 축하했습니다. 큰형님의 결혼이 늦어져서 늦게 본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어서 그런지 결혼식 내내 웃음꽃이 피어 있는 형님 내외를 보니 막내 동생 입장에서 지난 세월 동안, 최선을 다해 달려와 준 큰 형님과 특히 형수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카와 조카며느리에게 폐백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31년 만에 드리는 것이 아닌 받는 폐백에 참여했는데 순간, 여럿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31년 전, 내가 폐백을 부모님께 드리던 그 때 일이 아스라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에 31년이 이렇게 빠르게 지났나, 나도 그 때가 있었지, 모든 게 서툴렀는데 이제 폐백을 받는 나이가 되었네, 등등의 소회가 밀려왔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또 한 번 새겨 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재독학자 한병철이 말했다지요. “좋은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비워낸 정신이다.” 주께서 제게 얼마나 이 땅에서의 시간을 주실지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들을 좋은 시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그러니 전적인 제 몫이 아닌가 싶습니다. 31년 전, 제 결혼식에 주례를 통해 주셨던 말씀이 시편 128편이었지요.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시 128:3-4) 뒤돌아보면 약속하신 대로 결실한 포도나무 같은 아내를 주신 것도, 감람나무 같은 아들을 주신 것도 지극히 큰 감사요, 은혜인데 단지 주군 앞에 당신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데에는 온전하지 못했던 죄스러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하나님께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31년이었음을 조카며느리를 보는 날 반추했습니다. 그날 조카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아들과 한 살이 적은 둘째 형님 아들이 축의금을 받는 자리에 앉아 일을 도왔습니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저녁 늦은 시간, 큰형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이 목사, 요한이가 아주 똑 부러지게 일을 너무 잘해주었다. 고맙다고 전해 주고 칭찬해 줘라.” 전화를 끊고 나서 아들을 보는데 칭찬은 고사하고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아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아들, 아버지는 조카며느리가 아니라 며느리가 보고 싶다고.” 며느리가 들어오면 딸처럼 잘 해주렵니다. 순간, 교회 노 권사님들의 실소를 머금은 지청구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목사님, 꿈 깨세요. 며느리는 며느리지 딸이 아니거든요!” (ㅎㅎ) 그러든지 말든지 되풀이 합니다. 잘 해 줄 거야! 그러니 아들, 며느리 좀 보자. 며느리. 아빠가 이제 환갑이다. 환갑. 조카와 조카며느리가 행복하기를 화살기도 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