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원고에 ‘尹’자는 근처도 안 갔습니다. “브라질의 대주교를 역임한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의 유명한 말이 떠오릅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 부른다.” (김기석, “2017년 5월 21일 청파교회 베드로전서 설교 중에서”) 이 땅에 존재하는 단체 중에 교회처럼 다양한 사람, 사상, 색깔이 있을까 싶습니다. 뭐 하나 같은 것이 없는 버라이어티의 끝판이라고 불러도 괜찮은 종합전시장이기에 말입니다. 설교자는 전혀 그렇게 말한 의도가 아닌 데도 느낌상 조금이라도 친여(親與)적인 생각이 들게 하는 멘트가 가미되면 ‘국민의 힘’ 소속으로 있는 신자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합니다. 또 어느 경우, 이것은 아니다 싶어 친야(親野)적인 냄새가 나는 소리를 내면, 진보적인 성향이 두드러진 젊은 층의 지체들이 눈을 부라리고 쳐다봅니다. 해서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은 정치적인 느낌이 드는 발언은 1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목회자의 양심이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구약의 예언서를 들추어보면 포로기 직전,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소위 흉(凶)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공통적으로 주류 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길(吉) 예언자들은 그들에 의해 안락한 삶을 구가했음이 보입니다. 같은 맥락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이런 분위기는 매일반입니다.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는 근본적 수구주의자들은 예언서에 나오는 흉 예언자들을 두둔하는 메시지를 조금이라도 피력하면 그런 설교를 행한 자를 까마라 대주교의 말대로 ‘빨갱이’로 매장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행하고, 폭력을 가하기에 상당수의 범인(凡人)들은 아예 입을 봉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여 그 누구도 위험한 설교나 발언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암묵적 침묵에 동조합니다. 해서 예언의 소리가 교회 안에서 이미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일 때가 허다합니다. 지난주에 윤석열씨가 자진 사퇴했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 원고에 ‘尹’자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혹여 ‘尹’이라는 발음이 나와 윤 씨의 사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발언으로 듣는 자가 생기면 헛기침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올 것이 분명하고, 잘못된 일이라고 듣는 자가 있다면 제게 눈을 더 부라리고 쳐다볼 것이 분명하기에 말입니다. 저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나 봅니다. 몸을 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만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아마샤의 무지함으로 나라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면 교회라도 아모스의 소리를 내야하고, 시드기야의 무감각으로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으면, 교회에서라도 미가야의 소리를 내야 하는데 혹여 아모스가 되면 난도질을 당하고 매장당하는 무서운 시대가 되고 보니 움츠려지는 게 사실입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올바른 예언의 소리는 고사하고 적극적 사고방식과 긍정의 힘만 외쳐대는 길(吉) 예언이 진리로 둔갑하여 난무하고 있으니 쓰리고 쓰릴 뿐입니다. 해서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사순절 셋째 주간, 주군께 더 엎드리는 일말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