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밤 서재에서
주일을 숨 가쁘게 달렸다. 근래 지적 우월주의와 맞서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가 무식하니까 그렇다고 또 벌떼 같이 달려들겠지만 기실, 그렇다. 지적 우월주의와 맞서 싸우려는 두 가지를 갖추려고 나름 노력한다. 첫째 지적 우월주의자들을 해석하려는 실력 갖추기다. 이제 환갑을 맞은 나이라 책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가능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들에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나 싶어 오늘도 종이책의 페이지를 수없이 여전히 넘긴다. 둘째, 영적 스키조프레니아 환자들과의 맞서고 있다. 기독교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이기에 이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지더라도 이들과 맞붙는 이유는 그래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목사로서의 최소한의 존재적 성찰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자는 대체적으로 이들은 철저한 무신론적 님비주의자들이다. 이들과의 맞섬의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라는 종교에 함몰되어 있는 나를 여지없이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그 종교적인 도그마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민감해지려고 분투한다. 해서 외로운 싸움이지만 소름끼치는 치열함으로 나를 쳐서 복종하려고 한다. 지적,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며, 살아내는 것은 엎드리고 공부하는 것 말고는 없다. 기독교 공격의 최일선에 섰던 니체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기독교를 맹폭하지만, 그는 적어도 영웅(남은 자)들에 대해서는 말을 조심하며 행동하는 지성적 예의를 갖추었다. 허나 근래 제 2,3의 니체들은 예의가 아닌 무례가 선인 양 무자비하다. 악하다. 어제 새벽예배를 인도하는 데 주군께서 누가복음 22:51절을 레마로 주셨다.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이것까지 참으라’ 내 주군이신 하나님은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애증의 주군이시다. 그래도 이 글을 쓰는 주일 밤은 일주일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