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4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25) 본문: 히브리서 7:1-10 제목: 가장 귀한 분 서론) 우리나라 정서 중에 뼈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은 아마도 유교적 배경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시대에 이런 말을 쓰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만 불과 1세기 안팎에 자주 통용되고 사용된 상용어 중에 ’뼈대가 있는 가문, 뼈대가 있는 족보‘ 등등 익숙한 말들이 회자 된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아내와 결혼 초기에 농담으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여보, 당신은 양반의 집으로 시집왔으니 출세했다.”고. 저의 족보는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의 제8남 익양군 파에 속해 있기에 아주 가끔, 아내에게 농담으로 이렇게 장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심 씨는 대체적으로 조선 시대에는 무수리 출신인데 왕족에게 시집을 왔으니 정말 수지맞은 거라고 놀립니다. 그러면 아내는 세종대왕의 아내가 심 씨인 걸 모르냐고 대듭니다. 결국 심 씨가 없었으면 익양군이 존재할 수 있었겠느냐고 카운터펀치를 날립니다. 생각해 보면 정답이기에 그다음부터 족보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족보, 혹은 근원을 입에 올리는 이유는 내가 꽤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싶은 본능과 마음때문일 것입니다. 약간은 다른 스펙트럼이기는 하지만 성경에도 족보 이야기가 대단히 많이 등장합니다. 창세기는 물론 역대상과 같은 역사서는 족보의 기록이라고 말할 정도로 족보 서술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족보 흔히 ’톨레도트‘라고 명칭하는 계보를 중요시 여기는 이유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구속사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도 이 차원에서 설명이 되고 해석이 되어야 하는 텍스트입니다. 본론) 본문 1-3절을 먼저 소개합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지금 교회에서 수요일 저녁 예배 시간에 나누고 있는 창세기 55번째 강해 시간에 텍스트로 사용했던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에 대하여 이미 교우들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14장과 시편 110편 그리고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에 등장합니다. 성경 66권이라는 엄청난 분량 중에 딱 세 번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그만큼 신비로운 인물이며,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멜기세덱에 대하여 설명한 히브리서 저자의 메시지는 이해보다 오히려 궁금증을 더해주는 내용을 독자인 우리에게 던집니다. 1-3절의 내용은 철저하게 창세기 14:18-20절을 기초로 한 서술입니다. 창세기 14:18-20절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기자의 보고만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요약한다면 멜기세덱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⓵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18절) ⓶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인물 (19절) ⓷ 아브라함이 획득해서 가지고 온 전리품의 1/10을 바친 인물 (20절) 이 세 가지가 창세기 기자의 보고입니다. 이제는 시편에 묘사되어 있는 멜기세덱을 살펴 보십시다. 시편 110:4절입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편 110편은 다윗이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불렀던 노래라고 학자들은 의견을 모읍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곧바로 다윗이 왕으로 즉위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는 노래라고도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을 멜기세덱의 서열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고까지 극찬한데 따름입니다. 멜기세덱의 서열이라는 말이 다소 생소할 터인데 조금 쉽게 풀려면 앞서 말씀드린 창세기 기자의 보고를 참고하면 좋을 듯 싶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중직의 존재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다윗이 이렇게 왕이자 제사장의 역할을 했던 멜기세덱의 그 이중직을 이어 받은 위대한 존재임을 부각시킨 것이 시편 110:4절의 메시지입니다. 결국 시편기자도 멜기세덱을 신비로운 인물로 표현했지만 분명한 정체성만큼은 정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멜기세덱은 왕이자, 제사장의 신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4-10절을 살펴야 합니다.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1/10을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 여러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 자손 가운데 제사장들은 백성으로부터 십일조를 거두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제사장과 백성 모두가 아브람을 한 조상으로 둔 동족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완전히 외부인인데도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받았고,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축복은 아렛 사람이 윗사람에게 받는 법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제사장들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지만, 아브라함은 성경에 ’살아 있다‘고 기록한 제사장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레위는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레위 지파의 제사장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결국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긴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유진 피터슨의 글을 소개한 이유는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4-10절이 주는 의미가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종합하자면 멜기세덱의 위대함과 특수성을 강조한 셈입니다. 4-10절이 주는 메시지 중에 가장 함축적인 요지는 멜기세덱의 위상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윗이 위대한 제사장 및 왕이라는 이중직을 가진 자라고 밝혔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과 비교한 다윗마저도 멜기세덱의 서열에 있는 자 정도이지 멜기세덱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로 이스라엘 타 지파 공동체에게 십일조를 받는 구별된 지파로 은혜를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이 일을 강조한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레위 지파의 조상입니다. 레위 지파는 십일조를 받는 지파지만 그의 선조였던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결국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받는 위치에 있었던 레위 역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셈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대단히 세밀한 이 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 오늘 본문 4-10절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저자는 왜 이토록 멜기세덱의 위상에 천착한 것일까요? 너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비교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멜기세덱은 다윗과도 비교 불가의 존재다. 멜기세덱은 모세(다음 주일 설명)나 여타 다른 제사장과는 비교 불가의 존재다.” 이 점을 히브리서 저자는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멜기세덱은 비교 불가의 위대한 존재입니다. 여기까지 강조한 저는 이제 오늘 설교의 진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위대한 존재, 멜기세덱이지만 멜기세덱도 예수 그리스도와는 비교될 수 없음을 본문이 제시합니다. 본문 3절을 다시 봅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닮아서‘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아포모이오메노스‘입니다. 이 단어를 조재천 교수가 이렇게 주석했는데 놀랍습니다. “그는(멜기세덱) 하나님의 아들과 유사하다. 히브리서를 처음부터 읽어온 독자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즁요한 점은 상태동사 비슷하다(닮다.)로 번역된 ’아포모이호메노스‘의 주술관계다. 하나님의 아들이 멜기세덱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므로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본질적이고 우월한 지위에 있다. 두 존재가 영원하다고 해서 그 둘의 지위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조재천, “히브리서”, 홍성사, p,132.) 조 교수의 이 갈파를 읽다가 짜릿하는 감정이 들 정도로 기뻤습니다. 일반적인 목회자들이 그 동안 보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을 동일시하는 경향의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히브리서를 만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에 관한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불편함이 있었던 제게는 이 해석이 단물과도 같은 해석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7:11절 이하를 나누게 될 다음 주일 설교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멜기세덱은 제사장의 모형이지만 예수님은 제사장의 원형임을 히브리서 저자가 밝힙니다. 이런 것을 인지한 양용의 교수도 그의 저작에서 이렇게 갈무리합니다. “모형(멜기세덱)이 원형(예수 그리스도)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이 모형을 규정해 준다. 곧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모형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모습으로 규정된다.” (양용의, “히브리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p,178,)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멜기세덱과는 차원이 다른 위상임을 분명히 한 셈입니다. 지금까지의 본문 주해를 통해 우리 교우들이 오늘 주일에 받아야 하는 은혜를 이렇게 교훈하겠습니다. ※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8:39절 말씀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영어성경 NLT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No power in the sky above or in the earth below? indeed, nothing in all creation will ever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revealed in Christ Jesus our Lord.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힘이 있습니까? 정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 중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역한 이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크게 들어오는 교훈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보다 큰 존재, 귀한 존재는 없다는 감동입니다. 마가복음 10:46-52절을 보면 여리고 성에 살고 있었던 디매오의 아들 시각장애인 바디매오를 만납니다.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메시지이자 기사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께서 자기 동네에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군중들이 모여든 장소로 나아갔습니다. 앞을 보지 못해 예수께서 어디 즈음에 오셨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무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청각으로 들을 수 있었던 바디매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크게 부른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두 번에 걸쳐 외쳤습니다. 두 번째 소리를 들은 주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을 받은 바디매오의 답을 주목하십시다. 마가복음 10:51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가 답한 이 구절의 감동이 무엇입니까? 개역개정판에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되어 있는 이 번역을 한 신학자가 이렇게 주석했는데 큰 감동으로 임했습니다. 주님,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 (LORD, I WANT TO SEE YOU.) 왜 이 주석에 감동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분, 가장 소중한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해석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변증학자인 C.S 루이스는 대단히 의미 있는 가르침을 그의 책에서 줍니다. “그리스도 없이 선한 삶에 도달한다는 생각에는 두 가지의 오류가 깔려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선한 삶을 우리의 최종 목표로 설정하면 우리 존재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C.S 루이스, “피고석의 하나님”, 홍성사,p,139.) 이 글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진보적인 사상을 엿 보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교회가 이웃을 향한 손 내밈에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에 젖어 있을 때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이타적인 방향성으로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느낄 때였습니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루이스의 갈파는 저를 여지 없이 타격하기에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이타적인 삶은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왜 존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자재로 역사하시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보다 위대한 가치는 없습니다. 예수 보다 더 존중받아야 할 이 땅에 존재하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교황 이노센트 4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바티칸의 부와 영화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교황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걷지 못하는 거지의 이야기를 언급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교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능력도 없습니다.”(존 오트버그, “예수는 누구인가”, 두란노, p,136.)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세인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절대로 상실되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인 공동체는 바울이 했던 이 고백을 공히 드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의 전부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모든것 나의 생명까지 다 주님앞에 드립니다 주 임재 안에서 이제 내 영혼 자유해 내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며 예배하리 어린양 찬양하리 내 평생 그 하나로 충분해요 어린양 찬양하리 내가 주의 임재 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