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말씀이 내 것입니까?2024-03-07 16:22
작성자 Level 10

2022년 4월 3일 주일 설교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설교)

 

제목말씀이 내 것입니까?

본문사사기 1:1-3

 

서론)

 

질문하는 자는 항상 이긴다이제 패배를 무릅쓰고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141.)

 

코로나 확진으로 인해 심한 육체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던 지난 주간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 있었던 제게 서재에서 들었던 희망의 천둥소리였습니다.

가공할만한 바이러스의 공포가 제 몸에 침투하여 생리학적인 신체 구조를 파괴하여 일상의 신체적인 체계를 무너뜨린 상황이었지만 그보다 더 불편함과 무거움으로 다가온 것은 내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가 포스트 코로나 이후에 닥칠 영적 무기력이라는 절망과 골리앗과 맞서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을 하고 싶은 자가 현실적으로 존재할까?

단언하건대 없습니다.

내 삶을 살아내기도 벅찬데 골치 아픈 존재인 골리앗과 왜 싸워야 하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오늘 우리 공동체의 정직한 자화상입니다.

그러다보니 조금도 질문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 개인통장에 현금이 입금되지 않는 고민과 성찰은 사양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전혀 예외이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글이 오늘 내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되는 현실과 마주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펜데믹 2년 3개월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미래를 상상하지 마라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15, 179)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즈음파시즘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제 수용소에서 노예보다 못한 수용 생활을 감당했던 이탈리아계 유태인이었던 프리모 레비가 남긴 치욕스러웠던 소회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다루던 수용소에서 받았던 이 고통을 고발했지만 그 역시 자유의 몸이 된 지 오랜 후에 토리노 자택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수용소에 경험했던 가장 잔인했던 인간 말살의 트라우마가 그를 옥죄었을 것이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결국 그는 이 고통의 흔적을 지워내지 못했기에 그런 비극의 삶으로 자기의 삶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물론 미화는 아니지만 레비를 옹호한다면 식물인간처럼 살아가도록 만들었던 비인간성에 대한 치료되지 않는 마음의 적과의 싸움을 마치기 위해 레비는 자신의 죽음으로 처절하게 저항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코로나에게 2년 3개월을 지배당했습니다.

지배자에게 속절없이 당했던 수모의 극치는 목사로 살고 있는 저로 하여금 생각하거나 질문하지 말라는 강요였습니다.

그냥 이대로 생각하지 말고 살라는 무기력의 종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간이런 무기력한 상태로 살라는 공격을 받으면서 정신이 번쩍 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영적 저항에서 물러서지 말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크리스티아노스인데 무기력해서야 되겠는가하는 비장한 성찰이었습니다.

아둘람 굴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었지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인격적 간섭을 믿었던 다윗처럼 그 다윗의 하나님을 믿는 목사가 저이기에 결코 무기력해서는 안 되겠다는 영적 각성이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20세기의 예언자라고 지칭되는 아이든 토저가 이렇게 전언했습니다.

 

신자가 적응해야 할 곳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아이든 토저, “철저한 십자가”, 이용복역규장, 2018, 184.)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할 영적 민감함이 있습니다.

신천지 집단으로부터 시작하여 전 아무개 목사라는 자의 선동 정치질을 극점으로 펜데믹 상황 하에서 교회의 위상은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더 더욱 핏대를 세우며 교회를 이렇게 난도질했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세상에게 해준 유익이 무엇인가?

도리어 고개를 젓게 하는 골칫덩이가 교회이지 않은가라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해댄 지난 2년 3개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무너진 위상을 다시 세워보기 위한 안간힘들이 대다수의 상식적인 교회에서 일어났고교회는 어떻게 하든 대 사회적인 위상 재건을 위해 눈물겨운 몸부림을 치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이 과정을 교회가 다시 이루어가야 한다는 데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대단히 민감하게 경책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객전도입니다.

본말전도입니다.

아이든 토저의 말이 정답입니다.

신자가 주목하고 적응해야 할 제 일의 포트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어야 한다는 지적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사람의 생각과 뜻으로 보았을 때 도덕적으로 맞는 일이기에윤리적으로 이것이 올바른 일이기에 결정하는 것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발상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상식이 통하는 곳이 세상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상식을 거스르지는 않지만 그것이 교회가 주목해야 할 제 일 순위는 아닙니다.

교회가 추구하고 목적을 두어야 하는 제 일 순위는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뜻에는 민감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둔감하다면 그것은 분명히 주객이 전도된 것이자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주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본론)

 

본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1절만 다시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수아가 죽었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세와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리더십의 종말을 맞이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 영적 공황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선언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본문은 이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급한 나머지 모세가 이야기했고 여호수아를 통해 어느 정도 그림을 완성했던 가나안 정착을 위해 누가 올라갈까를 하나님께 진지하게 묻는 장면입니다.

이 질문의 타당성을 인정하신 주님께서는 유다가 먼저 올라갈 것을 본문 2절에서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단지 이스라엘의 질문에 유다가 올라갈 것을 대답해 주신 것뿐만이 아니라 친절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올라가 점령할 땅을 하나님이 친히 만드셔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넘겨줄 것까지 조명하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조명해주시고 응답해 주신 말씀에 순종만하면 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기 좋게 거절하는 이스라엘을 본문 3절에서 보게 됩니다.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네가 올라가라는 명령에 유다는 정면으로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올라가면 되는데 명령으로 지목받은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시므온에게 동역을 요청합니다.

혼자는 못가겠다는 딴지 걸기를 한 것입니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혹시나 모를 가나안 정착 전쟁에서 패배를 염려하여 혼자 짊어지는 것을 분산화하려고 시므온을 불러 들이는 잔꾀를 부렸다는 해석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유린하고 본인들의 뜻대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주석서 중 상당수 많은 학자들이 본문의 이 상황을 유다의 충격적인 불신앙 장면으로 해석하는데 동의합니다.

그런데 독특한 또 하나의 해석을 여러분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어제 설교 준비 중에 차준희 교수와 본문에 대한 이해를 나누었습니다.

본인의 해석을 나눈 차 교수가 또 다른 구약학자의 사사기 해석을 소개하며 제게 그 자료를 보내주었는데 읽다가 신선했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전성민 교수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who of us)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누를 우리를 위해’ (for us)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전성민,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p,26.)

 

전 교수의 해석을 따르면 해석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유다는 가나안에 올라가서 차지할 땅에 대한 이익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실 것을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이익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전체에게 배분하고 싶지 않았고 단지 자기의 친형제 지파인 시므온과 나눠 갖고 싶어 했다는 말입니다.

해서 시므온에게 요청했다는 해석입니다.

결국 극단적 이기주의로 유다의 행태를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왜 제가 이 상반된 해석을 함께 교우들에게 전했습니까?

전혀 다른 해석이기는 하지만 영적 경종의 의미는 전혀 다르지 않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둘 다의 경우모두의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일의 극치였습니다.

유다 지파가 당시 12 지파 중에 가장 강력했던 세력을 갖고 있었던 지파인 시므온 지파를 끌어 들인 것은 가나안의 정착을 위한 첫 번째 전쟁의 결과를 하나님의 수단이 아니라 인위적 수단으로 이루겠다는 속셈 때문이었습니다.

환언하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살아내기가 아니라 시대에 걸맞는 우리 방식으로 살아내기를 결단한 셈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는 아주 질 나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의 살아내기를 거부하는 시대의 정신은 하나님을 성가신귀찮은 존재로 인식하기에 발생하는 정신입니다.

이것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죽은 현실 안에서 이루어졌던 사사시대의 전형적 자화상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알았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그래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가장 시급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라고 생각하지만 더욱 긴급한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는가이다.”(찰스 링마, “본회퍼 묵상집”, 죠이 선교회, 167)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우리에게 던지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있음을 묻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1인칭 객관화시키려는 몸부림과 치열함이 지금 나에게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일본 전후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침묵의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라는 작품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슈사쿠의 작품에서 소름끼치는 작가의 성찰을 읽다가 오싹해지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소설 안으로 들어가 보면 마태복음 26:59-68절의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대 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를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심문하는 장면이 슈사쿠의 독특한 필채로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전역에 걸쳐 유대 종교의 최고 권력자인 안나스가 볼품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심문당하는 예수에게 이렇게 독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체하는 기술을 나는 알고 있다네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성전의 모든 제사를 경건하게 거행하고율법을 지키는 것이지이것은 사회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거든그런 지혜를 나는 나이와 함께 배웠다네후회하지 않아나는 내 삶의 방식이 그대의 것보다 현명하다고 본다네민족이나 나라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유리하지인간이 남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주거지와 함께, 모여 결속을 다지는 장소는 만들어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세상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라네. 그런데 자네는...” (엔도 슈사쿠, “사해부근에서”, 바오로딸이석봉역, 2015,172.)

 

무시무시한 종교인의 껍데기 모습을 엔도가 무섭게 고발한 장면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의 절망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극이 어찌 예수님 당시만의 일이겠습니까?

오늘 우리 한국교회 공동체 안에 가장 치명적 위기는 예수와 관계가 단절된 자들이 예수를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파악한 마이클 호튼 교수도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 에서 각종 심리적 치료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하고 있고긍정의 힘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변질되었고이머징 처치가 어느새 복음의 능력으로 단장되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기독교를 좋은 조언 정도로 축소시키면 인생 코칭 문화에 딱 들어맞는다. (중략그러나 기독교를 구별시켜주는 핵심은 기독교의 도덕적인 계율이 아니라 예수의 이야기다개인이 하늘로 올라가는 여행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속죄부활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김성웅역부흥과개혁사, 140-141.)

기가 막힌 통찰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즉 예수쟁이라는 레떼르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세간의 판단입니다.

점검하십시다.

우리도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하나님께 묻는데 익숙한 종교적인 매뉴얼에 능숙합니다.

심지어 그 매뉴얼을 뛰어 넘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조명하셨어라고 간증하기도 합니다.

왜요?

묻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유다만 올라가라는 주님의 조명하심까지 알아차리는 종교적 민감함이 있는 수준까지 올라와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는 세간의 소리는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질문하십시다.

그렇다면 이렇게 익숙한 종교적인 행위에 민감하기에 혹시 나는 네가 올라가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1인칭 객관화시키고 있습니까?

그렇게 순종하는 신실한 종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왜 나만안 됩니다내가 가는 길에 시므온도 같이 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말씀을 2인칭혹은 3인칭 주관화시키는 영악한 종교인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베드로에게 두 번째 미션을 주신 주께서 베드로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예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로마에서 순교를 당할 것에 대항 에두른 예고였습니다.

베드로가 뭔가 찝찝하고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여 주님께 요한에 대한 행적을 묻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신 주님의 답변이 의미심장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합니다.

요한복음 21:22절을 이렇게 보고를 마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신앙의 승리는 종교적으로 익숙한 행위나 관례 그리고 주워들은 풍월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승리는 오직 한 가지나에게 주어진 말씀에 대해 1인칭 객관화를 시키는 것뿐입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는 전 주일인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시므온을 끌어들이지 마십시다.

유다인 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인격적으로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십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성 있는 삶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가오

험한 산이라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오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험한 산이라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오

목숨도 아끼지 않겠오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오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 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