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6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21) 본문: 히브리서 6:4-8 제목: 울림 서론) 20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우크라이나 국적의 어머니와 벨라루스 국적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벨라루스에서 성장하고 자랐지만 벨라루스가 채택하고 있는 사회주의적인 정치 체제에 반대했고, 조국 벨라루스는 물론 자기의 조국을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적인 위성 국가로 조종하고 있는 당시 소련 체제에 대해서도 글을 통하여 저항하며 강력하게 반기를 들고 평화에 관한 담론들을 펼치는 평화주의자로 활동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을 다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비롯하여 아프간 전쟁의 참상을 그린 ‘아연 소년들’ 그리고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다시 부각된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발생한 참극을 고발한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써서 20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이후 그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옹호하는 벨라루스의 독재자인 루카센코 정권에 항거하는 반체제 인사가 되어 블랙리스트 인물로 낙인 찍혀 2020년에 독일로 망명한 상태에 있습니다. 저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2016년에 접했는데 당시 읽다가 전쟁 범죄자들이 얼마나 인간에게 끔찍한 죄를 짓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미화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이 저지르는 최악의 사탄적인 형태임을 진하게 공부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찡하게 했던 한 대목을 하나 발췌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전쟁수기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알렉시예비치는 전쟁 당시의 웃픈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안토니나 그레고리예브나 본다레바라는 근위대 중위 선임 비행사의 일화입니다. “아, 재미난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규율이나 규정이니 기장이니 이런 군대 지식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아무리 해도 모르겠는 거야. 한 번은 비행기 앞에서 보초를 섰어. 규정에 누가 비행기로 접근할 경우, 멈춰, 거기 오는 사람은 누군가? 라고 제지해야 한다고 나와 있었지. 내 친구가 지휘관이 오는 것을 보고는 소리쳤어! ‘멈추세요. 거기 오는 사람 누구세요? 멈추지 않으면 죄송한데 쏠 거예요!’ 아이고, 한 번 상상해 봐. ‘죄송하지만 쏠 거예요! 세상에 ’죄송하지만‘ 이라니, 하하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문학 동네,p,138.) 2015년에 이 글을 읽었습니다. 읽다가 왠지 모를 가슴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이 땅에 피조 된 피조물 중에서 죄송함을 아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권력자들의 야욕과 욕심으로 인해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총을 들고 서로에게 쏴대는 바람에 이유 없이 죽어가야 하는 아픔들이 이 비루한 땅에 비일비재하지만 결국 이 아픔을 종식시키고 멈추게 할 유일한 존재도 역시 인간이라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더 강하게 새겨졌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소개한 글은 제게 엄청난 울림으로 다가온 셈입니다. 적어도 짐승들은 상상할 수 없고,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은 더 더욱 깨닫지 못하는 전쟁이라는 절망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울림이었습니다. 인간이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은 각성(覺醒)하는 것입니다. 각성이라는 단어를 풀이하면 깨달을 ‘覺’, 깰 ‘醒’이 합쳐진 단어이기에 풀이하면 ‘눈을 떠서 정신을 차리다. 혹은 깨달은 뒤에 생각을 수정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해외 토픽 뉴스로 전 세계에 나가 있는 러시아인들이 여권을 불태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 국민이라는 것이 치욕이라는 각성인 셈입니다. 해서 러시아가 행한 만행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죄한다는 행동의 반영을 러시아의 아주 평범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다운 사람들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각성 운동으로 인해 저는 희망을 봅니다. 저는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울림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싶습니다. 영적인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울립니다. 영혼이 울려지면 영적인 깨달음이 임하고 그 깨달음은 그리스도인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본문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적어도 제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4-6절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저는 이 구절을 평신도 시절에 이렇게 배웠습니다. 거듭난 뒤에 타락하면 다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렇게 배웠던 평신도 시절이 있었기에 저는 구원 받은 은혜에서 탈락되지 않도록 무척이나 애를 썼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 본문과는 별도로 저는 캘빈주의자가 아니라 웨슬리언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자들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목사입니다. 해서 구원 받은 자라면 민감하게 책임적으로 반응하며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번역해 내야하는 미션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대단히 주의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있다가도 타락하고 영적으로 빗나가면 구원의 반열에서 탈락은 하지만 그 탈락이라는 판결은 그 어떤 사람이 판결하는 몫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이 행하셔야 하는 몫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4-6절에서 말하고 있는 히브리서 저자의 이 갈파 역시 철저하게 주님이 판단하실 몫이지 히브리서 저자 개인이 결론적인 판단을 해서는 안 되는 본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신학적인 해석을 전제한 동의 때문입니다. 제가 히브리서 강해를 위해 참고하는 도서 중에 본문 구절에 대한 제일 뛰어난 주석이라고 동의한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집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4-6절은 배교에 대한 일종의 정의다. 여기에 묘사된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 상태는 신약과 유대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표준적인 용어다. ‘한 번 빛을 받음’, ‘하늘의 선물을 맛봄’, 성령을 함께 받음‘은 모두가 회심 과정에서 일어나는 체험을 담아내는 표현들이다.’하나님의 선한 말씀 맛봄’, ‘다가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봄’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 체험이다.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배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중요할 수도 있는 이 질문을 설교자는 던지지 않는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배교는 적어도 히브리서의 설교자와 청중에게 기정사실이며 현실의 일부로 전제된다. 그리고 배교한 신자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도록 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새롭게 함은’ 아마도 배교자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상태를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셔야 가능한 일이다. 최초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배교자의 구원도(만에 하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한다. 여기서 비인칭 동사 역할을 하는 ‘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제한성이 아니라 당위(마땅히 그러해서는 안 됨) 혹은 사태의 확실성(결코 그렇지 않음)을 표현한다.” (조재천, “그리스도인을 위한 성경 통독 히브리서”, 홍성사,p,121.) 조 교수의 해제를 조금 쉽게 풀겠습니다. 분명히 은혜에서 탈락된 자들에게 서슬이 시퍼렇게 다가갈 이 경종은 배교하는 자에게 임하는 무서운 심판을 적시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시는 구원의 감격에 들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교수의 주석적 설명 중에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최초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배교자의 구원도(만에 하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한다.” 이 해석의 말뜻이 무엇을 담보합니까? 이미 우리가 이 구절에 대하여 학습되어 있는 것처럼 구원의 은혜를 맛본 뒤에 탈락된 자는 다시는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결론적인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인 유대적인 성향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 중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의 틀로 회귀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아쉬움이 컸기에 이렇게 히브리서에 글을 남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절대로 너희들(배교한 자)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아버리는 심각한 월권임을 4-6절이 역설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7-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 구원의 은혜를 이미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마음을 돌이켜 배교한 자들에 대하여 경종의 소리를 높이기 위해 농사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좋은 밭과 좋지 않은 밭에 대한 비유입니다. 땅이 좋은 밭은 비가 내리면 잘 흡수하여 밭에서 좋은 채소를 생산하게 해주지만, 나쁜 밭은 비가 내리면 도리어 그 밭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더 많이 만들어내 농부에게 뽑혀 불쏘시개 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못하는 꼴이 된다고 비유합니다. 결국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의 은혜에서 탈락되는 배교자는 가시와 엉겅퀴가 되는 것이니 그렇게 배신하는 자가 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셈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이 비유에서 앞에서 설명한 교훈과 똑같은 해석을 남기고자 합니다. 저 또한 분명히 좋은 밭과 나쁜 밭의 추수 결과물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의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남기고 싶은 본문 해석의 여백은 이것입니다. 좋은 밭과 나쁜 밭에 대한 최종적 판결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판단하셔야 할 몫이라는 것입니다. 양용의 교수가 아주 의미심장한 7-8절의 해석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6:7-8절이 그 청중들에게 가졌던 의미보다 덜한 의미를 갖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의 구원이라는 영원한 안전성에 대한 확신의 관점으로부터 도출된 많은 논의들이 이와 같은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7-8절이 원래 말했던 것보다 더 많이 말해서는 안 된다. 이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그 어느 것 한쪽으로 치우쳐 깨지게 되면, 하나님의 선물과 우리의 반응 사이에서 꽃피는 은혜의 아름다움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양용의, “히브리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p,153.) 정리해 보겠습니다. 본문 4-8절은 배교하려는 자들의 경종 메시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하려는 자들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안타까움 때문에 이런 아픔을 막아보려는 의지로 본문에 기록된 강한 단어들을 동원하여 독자들을 경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설교자인 제게 주셨던 울림의 여백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을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울림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하셔야 할 최종 결재 행위에 월권하지 마십시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음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시고 예루살렘 여정 중에 사마리아로 들어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냉대합니다. 이 시기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차였기에 이미 예수님의 인지도와 인기는 하늘을 뚫을 기세로 높았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던 제자들은 주군의 인기로 인해 대단히 큰 자부심이 있었던 터라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에 기분이 상했습니다. 가뜩이나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는 경멸의 장소였기에 그들의 냉대에 감정적인 폭발을 한 것입니다.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예수님께 건의합니다. 누가복음 9:54절입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무슨 말입니까? 주님을 모욕하는 저들을 멸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면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천명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 폭력적 반응에 주님께서 행하신 반응이 이어지는 누가복음 9:55-56절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됩니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이 본문에 기록된 꾸짖는다는 단어가 베드로가 주님께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면 안 된다고 대들던 ‘항변하여’ 라고 번역된 ‘에피티마오’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멱살잡이 하는 꾸짖음입니다.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자는 요청에 주님이 얼마나 많이 분노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락입니다. 왜? 제자들의 요구는 철저한 월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히브리서 저자의 애절함을 압니다. 저는 히브리서 저자가 얼마나 긴급했는지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간다면 히브리서 저자가 얼마나 배교를 자행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안타까웠으면 4-6절에 기록된 민감한 단어로 배교자들을 압박했을지 정서적으로는 동의합니다. 얼마나 아쉽고 유감스러웠으면 농사를 짓는 밭의 비유를 통해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 것을 강조했는지도 나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히브리서 저자는 건너지 말아야 하는 루비콩 강을 건넌 것 같아 못내 유감스러웠습니다. 구원의 판단 여백은 주님이 그리시는 캔버스 안에서 그려져야 합니다. 내가 붓 칠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판단하여 무언가를 정의하는 것은 월권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는 정말로 그렇습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오늘 본문에서 대단히 아슬아슬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히브리서 저자가 다음 주에 볼 본문인 9-12절에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메시지로 마무리를 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월권을 인정하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선 권면으로 이 단락을 마무리해서 설교자로서 정말로 마음을 쓸어내렸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울림이라고 정했습니다. 이렇게 정한 이유는 히브리서 저자가 평가한 구원 받음과 그렇지 않음에 대한 평가를 해석하면서 받은 은혜가 적어도 제게는 큰 울림으로 공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 코스워크를 할 때 사도행전 연구를 강의하셨던 교수님께서 클래스에서 해 주셨던 가르침을 정말로 뜨거운 마음으로 아멘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어록들이 있습니다. Quelle라고 합니다. 이 크벨레를 중심으로 해서 해석되어진 것들이 복음서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성경임을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맞게 복음서를 다시 재해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서가 그럴진대 서신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잊혀지지 않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설교문이 히브리서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정황을 해석하지 않고 히브리서 저자의 설교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게 임한 울림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큰 생각은 없다는 울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보다 더 완벽한 인간의 계획은 있을 수 없다는 울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뛰어넘는 인간의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울림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의 최종적 판단은 주님의 몫입니다. 월권하면 안 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언젠가 소그룹 모임 시간에 고수자 권사께서 이사야 55장을 읽다가 본인이 받았던 감동을 나누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권사님이 나누었던 말씀은 이사야 55:6-9절이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당시 왜 권사님께서 우셨는지 저는 상상만 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8-9절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울림으로 다가옵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보다 다르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걷는 길이 내가 걷는 길과 다르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길이 내 길과 내 생각보다 높고 넓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가는 월권의 해석을 행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월권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울려주는 공명의 지침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주의 은혜 강가로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가라 나의 갈한 영혼을 생수로 가득 채우소서 피곤한 내 영혼 위에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