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6일 화요일 성서 일과 묵상 좌우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102:12-28, 열왕기하 8:1-6, 사도행전 15:36-41 꽃물 (말씀 새기기) 시편 102:21-24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마중물 (말씀 묵상) 지극히 개인적인 신학적 소회이기는 하지만, 내게 실천신학의 장(場)으로 최고봉이라고 생각하는 목회 현장에서 지난 35년을 살면서 내게 가장 크고 지대한 신학적 영향을 주었던 책 두 권을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와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이라고 답한다. 전자는 목회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목회신학적 자세를 알려주었고, 후자는 목회자가 가져야할 균형잡힌 신학하기를 공부하게 해준 길라잡이이기 때문이었다. 참 오래 전에 읽었는데도 달라스 윌라드의 날카롭기 그지없는 이 가르침이 명징하게 내 폐부의 깊숙한 곳에 남아 있다. “우익에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천국 입성의 ‘길’을 마련해주셨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가 말하는 ‘복음’이란 하나님 나라의 삶이 구속자이신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지금과 또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임재요 가까운 실체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기쁜 소식이다. (중략) 좌익에 입장에서 보는 ‘복음’ 또는 ‘기쁜 소식’이란 하나님이 친히 해방과 평등과 지역 사회를 지지하신다는 것, 예수가 그런 것을 증진시키기 위해 혹은 적어도 그런 것들의 결핍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그런 것들을 중시하는 노력과 동향속에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좌익 신학에게는 단순히 그것이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복음은 임재하시는 하나님이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않는 이들과도 얼마든지 공유하는 사회 윤리가 되고 말았다.”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복 있는 사람, 96-99)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다가 시편 102편에 내 시선을 돌리기로 했다. 시편에 기록된 7개의 참회시 중에 5번째에 해당하는 시편 102편에 집중하다가 시인의 토로가 달라스 윌라드를 생각하게 했다. 시인은 본시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도식으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시인 스스로가 당하는 고통의 심연이 개인에서 공동체로,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기에 그렇다. 이렇게 와 닿았다. 영적인 차원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분리할 수 없는 관계라는 설명으로. ‘시온’, ‘예루살렘’, ‘민족’, ‘나라’의 개념들로 야훼의 하나님의 관계성을 강하게 역설한 시인은 갑자기 ‘내 힘’, ‘내 날’, ‘나의 말’, ‘나의 하나님’, ‘나의 중년’, ‘나’로 갈아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인은 이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듯한 개념은 서로 단독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연대 안에서 긴밀하게 상호관계 하고 있는 상존의 개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그리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달라스 윌라드가 주목했던 좌,우의 첨예한 대립이 아닌, 상존의 개념으로 개인과 공동체를 엮고 있는 시인의 고백이 예사롭지 않다. 오늘 성서일과에 필이 꽂인 나를 위로하듯 친구 교수가 얼마 전에 시편 102편의 메시지를 이렇게 갈무리한 글을 읽으며 역시 친구는 잘 만나고 봐야 한다는 보너스도 받았다. “진정한 신앙은 신앙의 사유화(privatizion)를 허용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온전함이 회복되지 않은 채 개인의 온전함이 이뤄지기는 불가능하며, 개인의 온전함이 확보되지 않는 공동체도 온전해 질 수 없다. 우리는 개인의 온전함과 공동체의 온전함 사이에 우선순위를 논하기보다는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 (차준희, 『시인의 영성 Ⅲ』, 새물결플러스, 56-57) 내친 김에 성서구절 하나 나누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으로만 매도하기에 급급한 마태복음 23:23절을 나는 언제나 균형의 신학, 신학적 균형을 가르쳐주는 스펙트럼으로 올곧게 적용하곤 한다. 이렇게 말이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하는 것이 올바른 신학적 균형이 신학적 상식이라고. 제천 하늘에 눈이 내리고 있다. 서재에 바라본 제천 시내가 온통 하얗다. 두레박 (질문) 나는 치우치지 않았는가? 나는 편벽되지 않았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실천신학의 장에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오늘도 좌우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길을 걷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끝까지 신학적 균형과 목회적 성실함을 상실하지 않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