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7일 수요일 성서 일과 묵상 아무리 보아도 나쁘다.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86편, 창세기 16:1-14, 누가복음 18:15-17 꽃물 (말씀 새기기) 창세기 4:4-6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마중물 (말씀 묵상) 나태주 시인의 시어대로 말한다면 오래 보아야 예뻐진다는 지론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뻐진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오늘 성서일과는 아무리 보아도 예쁘게 여겨지지 않게, 오래 보아도 매일반이다. 자기가 임신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남편에게 씨받이 여인을 본인이 직접 주어 후사를 보게 했다. 하갈은 씨받이였고, 그렇게 얻은 아들 이스마엘도 자기가 원해서 이땅에 태어난 게 아니라, 타의적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여성이면 누구나 갖는 패배의식과 보상심리로 인해 사라를 멸시한 하갈을 너무 몰아 붙인다. 그런데도 오늘 사라는 무죄, 하갈은 유죄라고 이미 이미 정해놓은 판결을 한다. 이런 폭력이 세상에 어디에 있나! 사라, 아무리 보아도 예쁘지 않고 오래 보아도 예쁘지 않은 짓을 했다. 아브라함도 도진개진이다. 더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성경의 역사는 하갈을 도외시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라는 명제를 갖고 하갈에 대한 항의는 불문율에 붙인다. 전형적인 승자독식구조에 입각한 역사가들의 영가다. 설상가상으로 심지어 하갈의 후손을 아랍인의 조상이라고 몰아붙이며 그들을 죄악시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적반하장이 어디에 있나. 성경을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은 불온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다. 성경을 곱씹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계보를 실패한 계보,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로 이해하는 아주 나쁜 버릇을 버리자. 하나님은 하갈을 찾아가셔서 그가 낳을 아들의 족보를 축복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그만하자. 두레박 (질문) 하나님, 이스라엘은 우리 편, 팔레스타인은 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미슈파트와 체다카 실천에서 흔들리지 않는 영성을 주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하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런 목회적 방향성을 상실하지 말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하갈을 보호하소서. 격려하소서. 안아주소서. |